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4년 주보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24년 4월 7일(나해)

모든 2 2024. 4. 14. 21:04

 

참행복 /황원경 헬레나 (목천본당)

 

 

+ 요한 복음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였다. 그런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앞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부활하신 예수님, 저도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 오종진 베드로 천안오룡동 주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었던 그분은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사람들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이 느낀 좌절과 절망, 그리고 두려움의 깊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제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를 건네십니다. 참 의미심장한 인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얼마나 큰 절망과 두려움에 짓눌리며 힘겨워하고 있는지, 그들에게 지금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짧은 인사말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얼마나 깊이 염려하고 사랑하고 계신지를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가 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지쳐 주저앉아 버린 제자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살피고 그들을 찾아와 평화를 건네주셨던 예수님은 삶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평화를 건네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 체험이겠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찾아오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증언을 했을 때, 토마스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토마스가 의심이 많고 완고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토마스의 마음을 따라가 보면 이 말은 단순한 의심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었습니 다. 기쁨에 가득 찬 제자들을 보며 토마스는 엄청난 부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도 다른 제자들처럼 희망을 노래하고 싶지만, 자신의 마음속에는 아직 절망과 어두움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 깊은 절망을 떨쳐버리고 기쁨과 희망을 담아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말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토마스는 이렇게 간절하게 예수님을 뵙고자 했고 예수님은 토마스의 이 간절한 마음을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앞에 다시 나타나시고 토마스는 부활 하신 예수님을 뵙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뜨거운 고백을 합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저도 예수님을 만나고 이 답답한 마음에 새로운 희망을 담고 싶습니다. 예수님 저를 좀 찾아주십시오.”라고 진심을 담아 예수님께 내 마음을 열어 보인다면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함께 걷는 신앙 여정

 

연재 취지 및 목적 안내(1)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주일 미사 참여율을 유지하면서 유의미한 사목 성과를 이룬 본당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제와 수도자, 하느님 백성이 함께 마음을 모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본 연구소는 「함께 걷는 신앙 여정」이라는 제목 아래 이러한 본당 중 일부(합덕, 판암동, 홍산, 서천)를 선정하여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앞으로 6회에 걸쳐 전체 설문 자료 내용과 개별 인터뷰의 내용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이 나눔을 통해 신앙 여정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① 전례와 성사 생활 : < 표 1 > ‘미사 전례’와 ‘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원동력 (1순위)

(단위: 명, %)

  합덕 판암동 홍산 서천
응답 범주 응답자 비율 응답자 비율 응답자 비율 응답자 비율
미사의 분위기 100 58 154 45 62 53 75 49
신부님의 강론 40 23 103 31 18 16 25 16
사제의 위로
(고해성사,면담)
13 8 7 2 5 4 4 3
수도자의 위로 6 4 1 0 2 2 2 1
신심단체
교우들의 관심
5 3 4 1 2 2 3 2
의무감,신앙의 습관 - - 63 19 22 19 39 26
기타 6 4 8 2 5 4 4 3
합계 170 100 340 100 116 100 152 100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쉬는 교우가 증가했고 미사 참례와 고해성사도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어려움에도 여전히 미사와 신부님의 강론이 신앙생활에 큰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설문 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신앙의 기쁨과 성장을 돕는 여러 요소들(신심, 공동체 모임, 인간적 요소)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이고 동시에 강론이 교우들의 영성생활에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개별 인터뷰에서 여러 신자들은 미사에 잘 참례하기 위해 먼저 성당에 조금 이른 시간 도착했고 한 주간 자 신의 삶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독서와 복음을 읽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며 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러한 실천은 미사를 통해 하느님과 더 깊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영성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② 영성생활 : < 표 2 > 내가 하고 있는 ‘기도 생활’ (1순위)

(단위: 명, %)

  합덕 판암동 홍산 서천
응답 범주 응답자 비율 응답자 비율 응답자 비율 응답자 비율
아침 저녁 기도 72 42 195 58 74 64 80 54
매일성경읽기(복음) 22 13 51 15 10 9 16 11
십비자가의 길 5 3 3 1 1 1 1 1
성체조배 4 2 7 2 3 2 4 2
묵주기도 61 36 69 20 23 20 37 25
9일기도 2 1 4 1 2 2 3 2
기타 6 3 8 3 2 2 8 5
합계 172 100 337 100 116 100 149 100

 

  설문 조사에 따르면 신자들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일상적으로 아침,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가장 많이 바쳤습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기도 습관을 통해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체험하고,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신자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미사 참례뿐만 아니라 아침과 저녁에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도와 매일성경읽기 등의 개인 기도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실천 할 때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을 잊지 않고 힘을 얻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노드사목연구소-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76. 미사 해설 - 성찬 전례(40) : 영성체 예식 : 감사 침묵 기도


137. 성체 분배가 끝나면 사제나 부제나 시종은 성작 위에서 성반을
깨끗이 닦고 성작도 그렇게 한다. 그동안 사제는 속으로 기도한다.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이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

감사 침묵 기도
138. 영성체 후에 사제는 자리에 가 앉는다. 경우에 따라 모두 잠깐 거룩한 침묵을 지키며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시편이나 다른 찬양 노래나 찬미가를 부를 수 있다.

 

  성체 분배가 끝나면 사제는 성합의 잔여 성체를 감실 에 모십니다. 그리고 성혈이 담겨 있던 성작을 복사의 도움을 받아 썼습니다. 이렇게 씻는 이유는 한 조각의 성체, 한 방울의 성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잠시 침묵 중에 주님과의 만남을 되새기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동안 사제는 거룩한 만찬의 정리를 경건히 하는 것입니다. 사제가 성작을 닦고, 정리하는 동안 미사에 참여한 교우들은 침묵 속에 기도를 하게 됩니다. 미사 경본에서는 “감사 침묵 기도”라는 명칭을 통해서 이 시간의 침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때의 성전은 성체를 모시고 침묵 속에 주님을 만나도록 인도하고,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미사 중에 몇 차례 요구되는 침 묵 시간이 있지만, 의미로 보아 영성체 후 침묵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침묵을 생략하거나 지나치게 짧게 한다면, 또는 침묵 대신 해설자가 묵상 지도라는 의미로 별도의 해설을 하는 것은 성체를 모시고 주님을 만나려는 교우들의 거룩한 만남을 가로막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가대가 특송이라는 이름으로 묵상곡을 노래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침묵 속에 주님을 만나는데 도움이 된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교우들이 성체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시간을 방해한다면, 이는 지양하는 편이 전례의 정신에는 더욱 옳습니다. 또한 특송이라는 이름으로 성가대가 묵상곡을 노래할 때, 절대 박수를 치거나 환호를 하지 말아야 합 니다. 영성체 후 “감사 침묵 기도”시간에 노래를 부르는 것은 공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가대의 역할이 특별한 성가를 부르기 위한 봉사자가 아닌 전례 안에서 봉헌되어야 할 성가를 돕는 역할로서 존재하는 것이 라면,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과 보편교회에서 제시하는 규정에 따라, 미사라는 전례가 가진 본연의 의미를 되 찾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 “감사 침묵 기도”는 본래 미사가 끝난 다음에 자발적으로 남아서 하는 것으로 인도하였으나, 이러한 부분이 잘 실천되지 않아 하나의 예식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되새긴다면, 우리 역시 로마 미사 경본이 제시하는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1면 사진 설명

참행복 / 황원경 헬레나(목천본당)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사이에는 미소가 있다.

 

그걸 50이 된 이제야 깨닫는다.

 

20대에 희귀질환으로

어둠의 절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를 살린 건 미소였다.

 

너무 아프고 외로울 때

 

내 얼굴의 눈물 닦아주고

처진 어깨 들어 올려주며

기쁘게 나아가라 북돋아 준

 

미소는

하느님 집으로 가는 정류장이다.

 

미소는

성령의 날개 아래에서 늘 빛나고

 

미소는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루카 6,20)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17)

 

봄으로 가는 갈림길

 

  아플 때 내가 아픈 것만큼 내 주변 사람들이 나와 똑 같이 아파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어쩌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기쁠 때 내가 느끼는 기쁨만큼 내 주변 사람들이 똑 같이 기뻐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고 해도 나의 아픔과 기쁨을 완전하게 공감하고 완벽하게 나눠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 결국 아프면 나만 서러울 뿐이고, 기뻐도 나만 신날 수밖에 없기에 인생은 오직 혼자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뜻밖의 갈림길 앞에 멈추게 합니다. 끝없이 의심하는 길로 가게 되거나, 혹은 끝없이 용기를 얻는 길로 가게 되는 그 지점 말입니다.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 길로 걸어갈수록 고독해지고 불안해집 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마주해도 그것 뒤에는 추함이 있기 마련이고, 사람의 진실한 얼굴 표정을 보고도 그것은 단지 가면에 불과할 뿐이라고 끝없이 의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잠시라도 기쁨과 아픔을 나누려 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길을 선택한 사람 들은 걸어갈수록 든든하고 편안해집니다.

 

  ‘어차피’ 혼자가 아니라 ‘어쨌든’ 함께해 준 순간 그 자체가 축복이고, 내 것이 아닌 아픔과 기쁨일지라도 조금이나마 나누려는 사람들의 표정 그 자체가 희망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요즘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을 자주 접합니다. “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꾀함”이라는 뜻의 이 짧은 한자성어가 유독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오로지 믿을 건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한 세상에 봄날은 요원하기만 할 것 같습니다. 두꺼운 외투 안으로 자꾸만 더 움츠러들려고 하는 마음으로 꽃 피는 사랑과 평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

 

 

성지를 걷다 - 여사울성지(1)

 

1. 여사울성지

 

  여사울전교성지는 내포의 첫 신자이며, 한국천주교회의 못자리를 만들어낸 이존창(1759-1801) 루도비꼬 곤자가의 생가터다. 이존창은 여사울 부농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면학을 위해 한양으로 상경, 당시 권일신의 제자가 된다.

 

  스승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게 된 이존창은 1784년 세례를 받았으며 가성직 자제도 하에서 사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충청도 전교의 사명을 띠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는 예산과 아산, 면천, 당진, 해미, 덕산, 홍성, 서산 등 내포 여러 고을에 천주교를 전한다.

 

  내포는 여느 지방보다 교세가 커졌고, 구한말 신자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이들의 후손이라고 할 만큼 큰 공헌을 했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집안도 당시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여사울이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라 불리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하느님 자비 주일이란?

 

교회는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를 기리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 요한 바아로 2세 교황은 2000년 파우스티나 수녀를 성인품에 올리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요청하고,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선포했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후 첫 주일인 이날을 자비의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가장 위대한 표현임을 상기시켜 준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성경에서는 '자비'의 의미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 보려고 합니다.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성경에서 '자비'는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느님 혹은 예수님께 쓰일 때는 '깊은 동정의 마음, 상대를 도와주는 사랑,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갖는 사랑이나 열망'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때로는 '관대한 용서'도 뜻한다. 이 경우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에 대한 구원 은총의 신적인 사랑을 드러냅니다.

 

  히브리어의 '라함', '헤세드' 등 용어적으로도 자비를 나타내는 여러 단어가 쓰이지만, 성서적 개념은 결국 하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자신의 연민을 드러내 보이며, 인간은 창조주를 본받아 자기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식물 쓰레기

 

+ 찬미 예수님

 

  온실가스라고 해서 대기 중에 쏟아내는 해로운 대기만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물 쓰레기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체 온실 가스양의 10%가량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7억 3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루에 10억 끼니 이상을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유의 문제이긴 하나, 한쪽에서는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음식물이 버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로 버려지는 60%가 가정에서 나왔으며, 28%는 음식점, 12%는 소매판매처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런 음식물 쓰레기는 항공 분양의 온실가스 배출보다 거의 5배가 큰 규모로 발생하며 엄청난 환경비용, 사회 및 경제비용이 발생합니다. 일본은 3분의 1 가량을, 영국은 18% 정도 줄인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에 성공한 사례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