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촌라공소(예산산성리성당) / 그림 안종찬(바오로)
+ 요한복음 3,14-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심판'과 '구원' - 김용태 마태오 사회복음화국장
“밥 안 먹어요!”
어려서 심통을 부릴 때 툭하면 부모님께 했던 말이다. 내가 밥을 안 먹으면 속상해 하실 부모님의 마음을 볼모로 잡은 같잖은 협박이었다. 그리고 그 협박의 결과는 대부분 부모님의 상심과 나의 배고픔으로 끝나곤 했다. 어떤 때는 심통을 심하게 부리느라 하루 종일 굶기도 했는데 한밤중에 배고파 잠 못 이루면서 부모님만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철없던 시절의 일이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미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밥 안 먹어봤자 결국은 나만 손해 보는 일 아닌가! 더구나 그렇게 자초한 손해를 부모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이라니! 아무 잘못도 없는 부모님은 그로 인해 또 얼마나 상심하고 자책하셨을까!
그런데 어려서나 할 법한 철없고 미련한 이 행동을 나이를 먹어서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다름 아닌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밥 안 먹겠다고 부모님께 심통을 부리듯이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며 빛이 아닌 어둠 속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서의 춥고 배고프고 막막한 처지를 하느님 탓으로 돌리며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거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이 나에게 가하시는 형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해’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자초하여 스스로에게 가하는 형벌인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요한 3,17-20).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형벌’이란 것도 ‘지옥에 떨어지기 싫어하는 죄인을 하느님이 억지로 떠미는 것’이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악인들이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지옥을 만들어 놓고는 스스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구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랑은 고통도 희생도 없는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진 처절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정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다.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21)
공동 책임,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바라시는 그대로 오늘날 교회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고자 그 여정을 걷고 있다. 이 길에서 교회는 시노드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느님 백성의 공동 책임에 관한 문제와 마주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참여적이고 공동 책임을 갖는 교회”(「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7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교회는 모든 구성원의 공동 책임을 말하며 이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실현 과정에 있어서 ‘그렇다면 누가 공동체를 주재하는가?’와 같은 상투적이고 소모적인 논의에 발목이 잡혀 분란과 혼란의 원인으로 여겨지고 결국에는 ‘예전에 하던 대로’ 하게 된다. 평신도 신학자인 오타비오 피로바노(O. Pirovano)는 ‘공동 책임’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예견했었다. 그에 따르면 ‘공동 책임’을 위험하다고 규정짓는 것은 어원적으로 자격이 없고 의욕이 없는 이들과도 무엇인가 를 공유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며 더욱이 공유하고자 하는 내용이 ‘책임’이라면 이는 결국 ‘권력’을 공유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위험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교회 전체와 교회 안의 모든 이가 주체”(「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55항)들이 행사하는 주체성과 관련된 공동 책임은 동일한 수준과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브 콩가르(Y. Congar)는 이를 ‘차별화된’ 공동 책임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 구성원의 “소명, 신분, 직무, 은사, 책임의 다양성과 보완성이”(「평신도 그리스도인」 20항) 동일한 가치와 존엄성을 지니고 있음을 우선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차별화된 공동 책임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개인의 고유성이 존중받고 인정되며 공동의 선익을 추구하는 ‘우리’ 곧 ‘차별화된’ 우리라는 것을 확증시켜 준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봉사 직무가 있지만, 그 사명은 하나”(「사도직 활동」 2항)이다. 산드라 마쫄리니(S. Mazzolini)는 그리스도인들이 행사하는 공동 책임을 실현하는 방식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이름과 교회의 이름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공동 책임을 행사한다.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행동할 때에는 세례받은 이의 고유의 세속성을 표현하고, 신자로서 모든 일상의 생활에서 드러내야 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반면에, 교회의 이름으로 행동할 때, 그의 행동은 협력의 형태를 이룬다. 더 이상 그것은 개인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가수원 주임-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74. 미사 해설 – 성찬 전례(38) : 교우들의 영성체 (5)
1. 영성체의 바른 자세 2. 양형 영성체에 대해서 3. 교회법에서 제시하는 영성체 (횟수, 준비) 4. 비정규 성체분배권자 5. 영성체송과 영성체 성가 6. 성체훼손에 대해서 |
5. 영성체송과 영성체 성가
“영성체 노래는 「로마 미사 성가집」이나 「단순 미사 성가집」에 실린 영성체송을 시편과 함께 부를 수 있고, 영성체송만 부를 수 있다. 또는 주교회의가 승인한 다른 알맞은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노래는 성가대만 부르든지 선창자가 교우들과 함께 부른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로마 미사 경본」에 실린 영성체송을 신자들이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독서자가 낭송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사제가 성체를 모신 다음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기 전에 직접 낭송한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7항).
교우분들께서 자주 묻는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영성체송과 영성체 성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위에 소개해 드린 지침을 보면, “… 부를 수 있고, 할 수 있다.” 등의 표현을 통해서 엄격한 규정이 아닌 상황에 맞게 고려할 수 있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영성체송이나 영성체 성가는 성체를 모시는 동안 교우들이 함께 부르는 것으로 그 의미를 전달합니다. 곧, 영성체송을 함께 읽거나, 영성체 성가를 함께 부르면 됩니다. 또한 영성체송도 바치고, 영성체 성가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함께 영성체송을 바치는 것은 성체를 모시는 공동체가 영적인 일치를 드러내고, 마음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영성체 때 영성체송이나 영성체 성가를 선택적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성체 성가가 정해져 있을 경우, 영성체송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체송이나 영성체 성가 둘 다 하지 않는 경우는 전례의 정신에는 어긋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례적 특성은 입 당송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영성체송, 영성체 성가의 목적입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6항에서는 분명하게 그 목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성체를 모실 때 영성체 노래를 시작한다. 한 목소리로 부르는 이 노래는 영성체하는 이들의 영적인 일치를 드러내고, 마음의 기쁨을 표시하며, 영성체 행렬의 공동체 특성을 더욱 밝혀준 다.” 오히려 영성체송과 영성체 성가를 형식적인 부분 만을 치우칠 것이 아니라, 한 목소리로 성체를 모시기 위한 내적 준비와 찬미의 목적을 상기한다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는데 성가는 거룩한 도구가 되어 성전 안에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대전성모병원 췌장·담관 경구내시경 원스톱치료실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은 ‘췌장·담도 진단 및 치료내시경(ERCP)’이 가능한 투시촬영실을 리모델링했습니다. ERCP는 소화기 내시경과 방사선을 이용한 검사 및 시술법으로 내시경을 십이지장까지 삽입하고 ‘십이지장 유두부’라고 하는 작은 담관의 입구를 통해 담관과 췌관에 조영제를 주입시켜 병변을 확인하고 치료합니다. 최고난도의 검진 및 시술로 영상 장비가 중요한데 이번에 ‘Artis zee MP’를 새로 도입, 환자의 방사선 피폭량을 최소화하고 고화질의 3D 다각도 영상으로 환자의 병소 부위에 대한 정교한 시술이 가능해졌습니다. 또한 시술 시간이 단축되고 환자 몸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새롭게 구축된 원스톱 투시촬영실은 ERCP 시술뿐 아니라 내시경초음파(EUS)를 이용한 진단 및 중재시술, 스파이글래스 담도내시경 시술이 한 곳에서 신속히 가능합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70)
추억은 주름을 지운다
학교를 졸업한 지 꽤 오래된 제자들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어떤 친구들은 연락 만으로 그치지 않고 시간을 내서 직접 학교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학교로 찾아온 제자들을 만나면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약속이나 한 듯 늘 이런 대화로 만남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쩜 너는 나이가 들어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니?”
“아니에요. 선생님이야말로 그때 그대로 신데요?”
사제지간의 이런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이없다고 놀릴 테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모두 사실로 느껴진 인사말이기 때문입니다.
가까웠던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게 돼도 우리는 그를 첫 만남 때의 그 모습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무 살 때 처음 본 제자는 세월이 흘러 외모가 아무리 변해도 신기하게 제겐 늘 스무 살로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추억이 주는 신비한 ‘착시효과’입니다.
만약에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가 지금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면, 저는 그 제자를 스무 살이 아닌 현재의 나이로 인지했을 겁니다.
추억은 일종의 방부제입니다. 시간을 이겨내는 고마운 선물입니다. 좋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를 지금보다 젊게 보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이 들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고,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꾸 늘어만 가는 주름살. 요즘 젊어 보이게 하는 시술도 많다는데, 저도 한번 받아볼까 하는 유혹이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유혹을 ‘추억’의 힘으로 뿌리쳐 보렵니다. 피부에 뭐라도 하나 바르는 것보다, 오늘 만나게 될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것이 더 먼저임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
신앙 선조들의 십자가의 길, 성로선공
십자가의 길은 우리 신앙 선조들이 열심히 바치던 기도 중 하나입니다. 신앙 선조들은 십자가의 길을 성로선공(聖路善功)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의 길'이라는 의미만 생각한다면 '성로(聖路)'라는 말로도 충분합니다. 또 굳이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면 기도를 뜻하는 '신공(神功)'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 선조들은 굳이 십자가의 길 기도에 만큼은 '선공(善功)'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선공은 선행이나 선업(善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존경할만한 행동이나 찬양할만한 업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신앙 선조들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그저 입으로 외는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 죽음을 묵상하며 그 길에 동행하는 '실천'으로 여겼습니다.
신앙 선조들이 성로선공을 대했던 마음은 신앙 선조들이 사용하던 기도서인 「천주 성교 공과」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천주 성교 공과」는 "예수의 십자가상에서 받으신 고난을 묵상함으로 마음이 감동하여 허물을 고쳐 자기를 새롭게 하며, 의덕을 보존케 한다."라면서 십자가의 길이 신자들의 신심 수양을 위한 실천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십자가의 길이 가장 하느님의 뜻에 흡족하고 알맞은 기도"이며 "영혼 구원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되는 기도"라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쌓을 수 있는 선행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원 재활용
찬미 예수님
코로나 이후 쓰레기양이 늘었습니다. 그전에도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코로나 이후 배달 음식, 택배로 물건을 받은 경우가 늘면서 재활용 쓰레기도 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제대로 알고 버려야 하는데 우리는 습관처럼 플라스틱이면 재활용되겠거니 하고 버리게 되는데요.
사실 종량제봉투로 가야 하는 쓰레기들도 많이 재활용으로 버려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음식물이 그대로 들어있는 플라스틱류를 버리거나 깨진 유리 같은 위험한 쓰레기를 버려서 분리 작업의 어려움을 과중하게 합니다.
오늘은 몇 가지 분리배출 시 알아야 할 사항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플라스틱 제품 라벨을 보면 영어로 OTHER라고 적혀 있으면 재활용이 안 되는 쓰레기입니다. 종량제봉투에 버려야 합니다.
둘째, 유리 제품과 사기그릇 같은 재질은 극과 극입니다. 사기그릇은 폐기물로 처리해야 합니다.
셋째, 박카스 병, 비타 500 병은 재사용이 가능한 병입니다. 뚜껑은 닫아서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재활용으로 쓰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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