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4년 주보

사순 제3주일 2024년 3월 3일(나해)

모든 2 2024. 3. 3. 17:23

 

다 이루었다 / 손제현 마리스텔라(세종성요한본당)

 

 

+ 요한 복음 2,13-25

 

<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말씀의 향기>

 

걸림돌 - 김광호 요셉 여사울성지 전담

 

  걸림돌은 어떤 일을 해 나가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신앙에 있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 돌은 무엇일까?

 

  제1독서는 10계명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이 계명들을 기초로 율법이라는 거대한 계율들이 생겨난 다. 시대가 지나고 많은 계율들이 생겨남으로써 해석 해 주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 많은 율법을 기억하지 못하여, 상황에 따라서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권위 있는 사람이 필요해졌다.

 

  이 해석은 인간이 해 나간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그 가운데에는 이권과 권력과 욕심이 함께하게 된다. 소수이거나 제한된 경우라면 그 사회에서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법이 권력이 되는 상황이 되면 최초의 계명이 이야기하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 권위는 필요하나 권력이 되면 방향을 지시하던 표지판이 목적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라고 이야기한다. 다윗이 성전을 세운 것은 하느님의 집으로 하느님이 머무르는 곳, 성별된 곳으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준 장소라 할 수 있겠 다.

 

  구약에서 말하듯 하느님에 대한 형상은 만들 수 없고, 현실적 존재감을 찾을 수 없기에 성전의 건재함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해 왔을 것이다.

 

  그러한 성전을 허물라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깨뜨리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성전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일깨워주는 곳이었지만 그 역할을 다하고 율법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걸림돌이 되었듯이, 하느님을 상징해 주던 건축물이 하느님 그 자체가 되어 걸림돌이 되어 버린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순 시기 동안 유형의 참회는 물론이거니와 무형의 죄에 대한 참회도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다면 거두어내는 노력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분의 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전교구 관련 포교성성(현, 복음화부) 자료 소개 3

 

1948년 6월 10일 자 주한 교황 순찰사 번 몬시뇰이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

포교성성 역사문서고 Nuova Seria, vol. 1649(1947-1949), rubr. 36-1, prot. 2763/47, f. 156-157.

 

  이 서한에서 1948년 6월 4일 라리보 주교가 파리외 방전교회 총장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주한 교황순찰사 번 몬시뇰과 전 대구대 목구장 무세 주교, 그리고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가 라리보 주교를 설득하여, 그가 서리의 임명을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위의 서한에서 특이할 점은 파리외 방전교회에서는 충청도 전체를 원했지만, 노기남 주교는 충청도 전체를 파리외방전교회에게 넘겨주기에는 부담스러워하였다. 그래서 만약 38선이 없어져서 서울 대목구가 황해도 지역을 다시 담당하게 된다면, 충청북도도 파리외방전교회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충청남도만 파리외방전 교회에 분할하기로 했다. 이 결정이 포교성성의 충청남도지목구 설립에 반영되었다.

 

  “3. 마찬가지로, 한국에 새롭고 독립적인 프랑스 선교지의 설립에 관한 결정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들의 마음에 환호성을 불러일으켰고, 라리보 주교는 이미 그의 새로운 책임을 위한 물품 조달에 착수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책임을 지기를 꺼렸지만, 다행히도 전 대구대목구장 무세 주교가 이곳에 방문했고, 두 사람은 노기남 주교와 저와 함께 회의했으며, 그 회의에서 어려움에 대해 논의했고, 라리보 주교의 주저함이 극복되었습니다. 모두 잘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선교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포교성성의 서한 1616/48에 따르면 ‘필수적’ 은 아니지만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극히 존경하올 노기남 주교는 미래에 그들이 충청북도라고 부르는 지방에서도 철수할 계획이며, 현재 위도 38도에서 소위 레드 라인으로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는 그의 대목구의 경계가 어느 시점에서 마침내 복원되면, 새로운 지목구가 충청북도로 추가되어 확장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프랑스가 이미 충청남도만 받아들이기로 동의 했기 때문에 라리보, 무세, 노기남 세 주교에게 이 점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노기남 주교는 ‘후자를 추가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명 안드레아 내포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가톨릭 신자로소 알아야 하는 <미사>

 

73. 미사 해설 - 성찬 전례(37) : 교우들의 영성체(4)


1. 영성체의 바른 자세
2. 양형 영성체에 대해서
3. 교회법에서 제시하는 영성체 (횟수, 준비)
4. 비정규 성체분배권자
5. 영성체송과 영성체성가
6. 성체훼손에 대해서

 

4. 비정규 성체분배권자

 

  성체분배를 할 수 있는 “정규 성체분배자”는 성직자인 주교, 사제나 부제입니다. 성체를 만지고 관리하고 보존하는 직무가 성직자에게 유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교 회법, 910조 1항 참조). 하지만 현실적이고 사목적인 이유에서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에게 “비정규 성체분배 직무”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구 직권자에게 비정규 성체분배권을 청원하는 이는 형제나 자매, 봉 사자 입장에서가 아닌 관할 주임 사제나 소속 수도회의 책임자입니다. 곧 다른 교구 교육과 달리, 관할 주임 사제가 “비정규 성체분배 직무”가 필요하여, 적임자를 교육을 받게 하고, 교구장 주교에게 그 권한을 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보통 비정규 성체분배자는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이를 곧, 신학생, 수도자, 평신 도 모두를 지칭합니다. 그리고 비정규 성체분배 직무를 받은 봉사자가 있다 하더라도, 사제와 부제 역시 반드시 성체를 분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비정규 성체분배 직무를 수여하는 이유는 그들의 건강이 좋지 않거나, 연로하거나, 영성체 할 신자 수가 너무 많거나, 정규 성체분배자들의 부족으로 전례가 너무 길어지는 경우에서 보조적으로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체 분배자에 관한 규정」에 매우 구체 적으로 그 권한과 범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성체가 훼손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이용되기 위함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교구에서 간단한 교육과 수여 예식을 통해 이 직무를 수행할 수여증을 부여받습니다. 교구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대전교구는 처음 그 권한을 받는 이들이 “신규자 교육”을 통해 3년 동안 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고, 3년이 지나면, “갱신자 교육”을 통해서 3년을 더 갱신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천주교 대전 교구 비정규 성체분배권자 규정, 8조 참조).

 

  이러한 비정규 성체분배권자는 분명히 교구로부터 권한을 받은 이들, 그리고 사목구 주임 사제를 통해서 이뤄질 수 있는 부분이지, 임의대로 성체를 만지거나 분배할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규 성체분배 직무를 받은 이들에 대해서 일반 신자들이 바라볼 시선은 누가 성체분배를 하느냐에 따라 은총의 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닌, 성체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도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숙지해야 할 점입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1면 사진 설명

 

다 이루었다 / 손제현 마리스텔라(세종성요한본당)

 

낮 12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3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부르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마태 27,45-46.50-52)

태풍 뒤에 오는 이 하늘을 보는 순간 예수님이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신다는 사랑의 징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어렵고 힘들 때면 위로가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75)

 

단추 단상 

 

  “단추 달린 옷들을 입어 본 적이 최근 언제쯤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요즘은 옷을 입으면서 단추를 채워 본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겨울인지라 단추 달린 옷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옷걸이에는 단추 대신 지퍼가 달려 있는 옷들만 잔뜩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씩 일일이 채워야 하는 단추보다 한 번에 쓱 밀어 올리기만 하면 끝나는 간편한 지퍼가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환영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단추는 그 번거로움 때문에 우리에게 뜻밖의 고마운 추억을 선물해 줬습니다. 모양과 크기, 색깔마저 각기 다른 단추들 안에는 따뜻한 삶의 이야기들이 간직 돼 있습니다.

 

  어린 시절 단추가 떨어지면 어머니께서는 바늘과 실로 단단하게 단추를 다시 달아 주시곤 했습니다. 새로 단 단추의 단단함은 학교에 등교하는 제 마음까지 든든하게 해줬습니다.

 

  종종 단추 일부가 깨지면, 비슷한 단추를 구하느라 시장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완벽히 똑같은 단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가장 비슷하게 생긴 단추를 골라 옷에 달면서 배웠습니다. 똑같지 않은 것도 필요하고, 똑같지 않아도 자꾸 보면 사랑스럽고 고맙다는 것을...

 

  그리고 단추에 관한 어머님의 ‘잔소리’ 또한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해. 안 그러면 모든 게 엉망이 된단다!”

 

  첫 단추의 올바름이 옷매무새를 결정하기에, 늘 시작 할 때 신중해야 된다는 교훈은 살면서 수도 없이 절감하고 또 절감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와 부활은 단추를 채우는 마음으로 준비하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 그 어느 때보다도 깨끗한 마음의 옷을 입고 나서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심 없이 순수하게, 사랑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해 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단단함으로, 나와 다른 것들을 포용하는 겸손으로, 마음의 옷의 첫 단추를 조심스레 여며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

 

 

성지를 걷다 - 신리성지(1)

 

1. 신리성지

▲ 성 다블뤼 주교관

 

  내포지역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신리성지는 조선 후기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천주교를 전했을 때 신리의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특성과 결합되어 마을 주민 중 400여 명이 신자로서 신앙생활하였던 조선 최대의 교우촌이었다.

 

  또한 다블뤼 주교님께서 오랜 기간 신리성지에 머무르면서 조선 교회 역사와 순교자 기록의 정리 등 교회를 위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이루어진 장소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손자선 토마스 성인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신리성지 순교미술관에는 일랑 이종상 화백이 봉헌한 13점의 순교기록화와 5점의 영정화가 전시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 유래와 14처

 

  오늘날 우리는 14처를 만들어 성당에 설치하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각 처(處)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며 이동하던 중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장소들입니다. 이렇게 각 처를 만들어 기도하는 관습은 12세기경부터 시작된 풍습입니다.

 

  신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걷고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순례했습니다. 그래서 순례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도시에도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을 본뜬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14처입니다. 각 처를 따라가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행위는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행위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각 처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곳이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원들이었습니다. 작은형제회 회원들은 수도원이나 경당에 각 처를 설치했고, 

 

  이를 통해 십자가의 길 기도가 널리 퍼질 수 있었습니다.

1688년부터는 모든 성당에 십자가의 길 각 처가 설치될 수 있도록 허용됐습니다. 이를 공포한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은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교회 내에 도입됐지만, 각 처의 수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클레멘스 12세 교황은 1731년 십자가의 길 14처를 승인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십자가의 길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19세기경에는 14처와 십자가의 길 기도가 전 세계로 퍼져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기도로 바쳐져 왔습니다. 현재에는 14처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길을 기도로 바치고 있습니다.

 

 

줍깅(플로깅)

 

+ 찬미 예수님

 

 줍깅(플로킹)은 줍다와 조깅을 결합한 단어입니다. 스웨덴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걸으면서 쓰레기를 줍는 환경 실천 운동입니다. 

 

  실천 방법은 일회용 쓰레기봉투 대신 에코백, 못 쓰는 가방,종량제 봉투 등을 준비하고, 다회용 장갑과 집게, 가위 등을 준비해 손을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게 쓰레기를 주운 후 재활용 여부에 따라 쓰레기를 분류해 쓰레기 수거함에 버리면 됩니다.

 

 간단하게 준비해 실천할 수 있으므로 누구나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환경과 건강 모두를 챙길 수 있습니다. 줍킹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본당에서는 3월 9일 토요일에 갑천 일원에서 줍킹 환경 실천 운동을 하려 합니다.

 

  갑천 습지는 국가 습지로 지정될 정도로 계절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생태적 감성 충전과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희망합니다. 본당에서 종량제 봉투는 준비할 예정이오니 간편한 복장으로 집게랑 장갑 정도만 준비해서 오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