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3년 주보

연중 제14주일 2023년 7월 9일(가해)

모든 2 2023. 8. 2. 15:38

 

배방성당(아산지구)

본당설립 : 2008.01.23 / 주보 성인 : 성모 승천

<사진 : 대전가톨릭사진가회>

 

 

+ 마태오 복음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애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말씀의 향기>

 

겸손, 온유, 평화 그리고 자유를 사는 그리스도인 - 이대재 막시모 산성동 주임

 

  오늘 제1독서는 즈카르야 예언서로서 비참한 바빌론 유배 생활 이후 하느님 백 성의 재건을 위해 오시는 겸손한 메시아 임금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메시아 임금님의 역할 중에 멸망한 나라를 재건하는 것에도 그 중요성이 있지만 그보다는 겸손한 임금님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데에 더욱 강조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임금님은 겸손과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가난한 모습과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모든 전쟁 무기를 없애 버리시고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평화의 소 식을 제시하는 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메시아 임금님을 통해 볼 때, ‘평화’는 인간적 도구가 아니라 하 느님께 대한 신뢰, 겸손, 가난한 마음, 서로 간의 사랑 으로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마음이 온유 하고 겸손한” 분으로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통하 여 당신 자신과 당신을 통해 드러나신 하느님, 그리고 하느 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을 따르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에 대해 예수님 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 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 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감사드리는 이유는 당신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과 ‘철부지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철부지들’은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온전히 인간의 지력과 지혜를 넘어서는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내맡기 는 겸손하고 가난한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신앙 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알기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주님임을 아는 사람일 뿐만 아 니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안다’ 라는 말은 ‘사랑한다’라는 말입니다. 이런 관계 안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과 마음의 가난, 그리고 신뢰와 일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이런 관계를 맺고 살 때, 우리는 함께 평화를 누리고 삽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와 평화를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 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현실이 어 렵고 힘들어도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 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씌우신 멍에는, 우리가 부족하고 실수하고 죄를 짓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나는 너를 끝 까지 사랑한다’라는 사랑의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겸손하고 온유하며, 함께 평 화와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살 아갈 수 있도록 함께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이 오늘 제2 독서에 나오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겸손, 온유, 평화, 자유’라는 하느님의 생명을 은총으로 주시는 하느님 이십니다.

 

  겸손, 가난한 마음, 신뢰, 평화, 안식, 자유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부터 옵니다. 아멘!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5)

 

알기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노달리타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명확한 정의 가운데 하나는 ‘교 회의 구성적 차원’이다. 언뜻 보면 아주 쉽게 이해될 법 하지만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될 수 있다. 실제로 현실 에서 접하는 교회는 거의 대부분이 ‘본당’이며 그보다 크게는 ‘교구’이지만 교회는 단일 교구 차원을 넘어서 한국 교회, 아시아 교회 더 나아가 보편 교회를 아우른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구성적 차원인 시노달리타스 역시 다양하고 다채로운 수준으로 이해되고 인식되어진다. 시노달리타스는 좁게는 개별 교회 즉, 특정한 지역에 서 구체적으로 자리하는 교회의 친교와 관련될 뿐만 아 니라 넓게는 교회‘들’의 친교(communio Ecclesiarum), 더 나아가 ‘교회 전체’(Ecclesia tota) 또는 ‘보편 교회’ (Ecclesia universa)의 친교와 관계된다. 그리고 정서적 인(affetive) 차원과 실제적인(effetive) 차원으로 구분 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는 내부(ad intra)와 외부(ad extra)의 방향성에 따라 교회 ‘안에서의’ 시노달리타 스와 교회‘의’ 시노달리타스를 구별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노달리타스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의미와 해석이 가능한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라고 말하는 내용들 가운데에는 진위 여부를 의심할 만한 것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인 마르첼로 세메라로(M. Semeraro) 추기경은 이러한 현실을 한탄 하며 “시노달리타스는 최근 몇 해 동안 매우 빈번하게 마치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때때로는 적절하 지 않은 의미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진단하였 다. 그가 애석하게 여긴 현실의 모습들은 모두 오용(誤 用)과 남용(濫用)으로 초래된 것들로 결코 시노달리타스가 아님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첫째, 시노달리타스는 하나의 슬로건이 아니다.

  둘째, 시노달리타스는 이미 실현되었다.

  셋째, 함께 걷는 여정인 시노달리타스는 가벼운 산책이 아니다.

  넷째, 시노달리타스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다섯째, 시노달리타스는 쉽고 빠른 지름길이 아니다.

  여섯째, 시노달리타스는 주교 단체성이 아니다.

  일곱째, 시노달리타스는 교회를 민주주의화시키는 길이 아니다. ‘시노달리타스가 아닌 것들’을 살펴보며 왜곡과 오해를 극복할 때, 그제야 비로소 ‘함께 걷는 여정’의 제대로 된 첫걸음을 내딛게(primerear) 될 것이다(『복음의 기쁨』 24항, 참조).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한산주임-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50. 미사 해설 – 성찬 전례(14) : 감사 기도에 대해서 (8)

 

4) 기념과 봉헌


105. 사제는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나이다.
또한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미사를 봉헌하며 바친 빵과 포도주가 성찬제정과 축성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성변화가 이 루어졌고, 그 신비를 “신앙의 신비여”를 통해서 환호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 제사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성령 안에서 깨끗한 제물로 아버지께 봉헌하고자 합 니다.

 

  교회는 초세기부터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억 하여 기념합니다. 이러한 기념은 감사 기도에서 잘 드러 납니다. 특히 성찬 제정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남겨 주신 사명에 대해 기억합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는 단순히 말씀의 반복이나 역사적인 과거를 회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그분을 기억하여 행하도록 즉,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주님께 봉헌하도록 초대합니다. 앞서 기념했던 축성문은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성 변화를 이루었다면, 우리 교회 공동체도 거룩함으로 변화 되기를 바라며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한다는 점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념과 봉헌의 목적은 공동체가 함께 거행하는 이 제사를 통해 서 우리의 감사와 희망을 우리 주 하느님께 고백하고, 우리를 향해 열어 주신 구원의 신비와 위대한 사랑을 언제나 새롭게 마주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우리가 모실 성체와 성혈은 현재를 함께 살고 있는 교회의 힘이 되고, 이 거룩한 시간에 대한 감사는 오늘날의 신앙고백문이 됩니다.

 

  감사 기도문은 주로 사제만이 고백되는 기도이기에 그 중요성이 사제에게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동 체 대표인 사제가 공동체와 함께 마음을 모아 드리는 기도의 부분이라는 점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기도문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인지하고 마음을 모아 거룩한 제사에서 우리의 미사임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문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합당한 자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감사 기도 중 “성령 청원과 전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천주교대전교구 성령쇄신봉사회

 

<9> 치유 화요일 치유미사 / 목요일 치유의 밤

 

  상처받지 않고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삶의 상처들이 우리의 삶을 어둡게 만들고, 희망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치유는 크게 내적, 영적, 외적인 치유로 구분됩니다. 내적 치유는 삶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받는 상처들에 관한 치유이고, 영적 치유는 죄, 어둠(악마)의 영향, 치유되지 않은 내적인 상처들이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며, 외적 치유는 질병의 치유를 말합니다. 복음의 곳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에 관한 이 야기들을 들었습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해 성령께서 많은 이를 치유해 주시고 낫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과 함께하신 성령께서는 지금도 교회 안에 함께하시면서 치유의 표징 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치유와 기적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며, 치유를 얻은 이들을 복음의 선포자로 세우시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또한 치유자를 쫓아다니는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매주 화요일 오후 2시에 치유미사가 있습니다. 미사와 치유기도 안수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둘째 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는 치유의 밤이 있습니다. 치유의 밤에는 치유 은사자들을 초정해 강의와 기도를 함께하고, 사제의 안수와 봉사자들이 함께 기도해 줍니다.

 

-김기범 시몬 신부 성령쇄신봉사회 전담-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 (50)

 

낱말 뒤에 숨은 행복 2

 

   [머그컵 손잡이 ]

 

  손잡이가 달려 있는 컵을 머그(mug)라고 합니다. 손잡이 하나의 차이일 뿐인데 머그컵은 다른 컵에 비해 사용하기 참 편리합니다.

 

  아주 뜨겁거나 아주 차가운 음료를 담아도 부담없이 컵을 잡을 수 있고, 컵을 들고 이동할 때에도 보다 안전 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머그컵을 닮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합 니다. 언제라도 손잡이에 손가락만 걸면 편안하게 맛 볼 수 있는 위로를 내어 주는 사람들 말입니다.

 

  반대로 손잡이 없는 컵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마주 칩니다. 온종일 컵을 가득 채울 것만 생각하느라 손잡 이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방해가 되어 이미 없애 버 린 사람들 말입니다.

 

  약속을 하려면 손가락을 걸어야 합니다. 행복도 마 찬가지입니다. 행복하려면 내 삶의 잔에 누군가 손가 락을 걸어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라는 약속]

 

  무지개는 하느님의 약속의 표징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게 다시는 노아가 겪었던 대홍수 같은 재난 으로 벌하지 않으시겠다는 연민 어린 약속을 주님은 무지개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무지개였을까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로 혹은 아침에 떠오르는 붉은 해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알록달록한 총천연색 무지개로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셨을까요?

 

  모든 생명은 각자 고유의 색을 갖고 태어나고, 그 다양한 색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 님께서 소망하시는 삶이라는 걸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무지개였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아무리 변화무쌍하고, 별이 빛나는 밤이 아 무리 아름답고, 노을빛이 아무리 곱더라도, 하늘 위의 무지개처럼 영롱하고 다양한 색을 보여 주는 것은 또 없습니다. 서로 달라서가 아니라, 서로를 자기와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고통과 불행의 시작임을 명심하라고 무지개를 띄우신 주님... 고통 뒤에 오는 깨달음이 무지 개처럼 아름답길 기도합니다.

 

-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

 

 

성지를 걷다_ 공세리성지성당(1)

 

  1. 133년의 신앙역사를 이어온 공세리성지성당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찾은 후 내포에 신앙의 빛을 밝히기 위해 두 성당을 세웠는데, 하나는 공세리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합덕성당입니다. 두 성당은 1890년부터 내포 지역에 복음을 선포 하였습니다. 공세리성당의 출발은 간양골에서 시작됩니다. 1894년 동학교도에 의해 간양골이 파괴되면서 공세리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내포의 입구인 공세리성지성당은 조선시대 조세 (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입니다. 성당은 드비즈(Devise, 成一論, 2대) 신부에 의해 1922년에 완공되었는데, 현재 옛 사제관과 함께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공세리성지성당에는 병인박해 때까지 순교하신 32위 순교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또한 ‘박물관’과 ‘예수마음 피정의 집’과 ‘동굴 성체조배실’, ‘분도패’, ‘조운선’, ‘야외 십자가의 길’과 국가 보호수 5그루를 비롯한 오래된 거목들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T. 041·533·8181(사무실), 533·8187(피정의 집) / http://www.gongseri.or.kr 미사 |주일 06:00, 10:00, 11:30(순례자), 16:00(격주), 19:00 토요주일 19:00, 평일 월~토 11:00(순례자), 화·금(19:00), 수~금(09:30)

 

 

김동규 신부의 '함께하는 여정 "동행"' 4. 제3과 성령의 은사로 더욱 새롭게 살아가는 우리(의견)

https://www.youtube.com/watch?v=YbbGz-xp2q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