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가는 길
나무들이 알몸으로 서 있다
감출 것도 비밀도 하나 없이
바람에 눈에 빗물에 안개에
얼굴을 씻고 영혼을 씻는다
한 해가 저물고 한 세기가 저물고
천년 만년이 저물어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내 알 바 아니라 한다
다만 침묵하며 제자리를 지키며
안으로의 여행을 계속할 뿐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꿈꾸지 말고
꿈을 이루려 애쓰지 말고
옷이나 벗어라 한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벌거벗은 그대로 떠나라 한다
세상에 어둠만이 있다면
그 어둠은 어둠이 아닌 빛일 것이니
그대의 어둠속으로
기꺼이 걸어가라 한다.
-신현봉의 <숲에서2 >전문
물가에 잔잔히 퍼지는 파동처럼 숲으로 가는 길에도 파동이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에너지는 고요히 다가오고 전율하듯 그 힘으로 다시 출발한다. 걸어간다는 것은 자아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너를 생각하며 숲에서 길에서 무수한 나를 만나는 것이다.
올레길, 둘레길, 마실길, 갈맷길, 골목길, 숲길등 다양한 길이 이름을 달고 자연과 순수가 그리운 우리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직도 풋풋한 숲의 향기와 새소리, 바스락거리는 숲의 숨소리, 거리낌 없이 자라준 투박한 나무둥치의 그 칼칼한 촉감, 그리고 그 아래를 다니는 짐승과 작은 풀과 꽃들, 숲자락을 적셔주는 냇물의 잔잔하거나 콸콸거리는 물소리가 있기에 숲길은 회춘의 길이요 수많은 사람들이 다니며 그 흔적들을 놓아둔 역사의 길이다. 때문에 누가 언제 이 길을 무슨 사연으로 오고 갔는가. 누가 이 나무 아래서 쉬다가 갔는가를 헤아리며 가슴이 뭉클거리기도 하는 숲길이다. 때문에 나는 숲이 스며드는 숲속의 길을 천천히 가는 것을 좋아한다.
제주도 올레길을 시작으로 지리산의 둘레길, 부산 바닷가의 갈맷길까지 걷기의 열풍은 건강과 힐링과 맞물리며 과히 국민적인 돌풍을 일으키는 길 위의 인문학, 소통과 철학적 명상을 생산해 내고 있다.
라인강의 지류인 넥카강이 흐르는 독일의 하이델베르그는 칸트, 헤겔, 하이데거,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들이 산책하며 사색에 잠겼던 산책길을 ‘철학자의 길’이라고 관광 명소화하였고 칸트는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기 때문에 칸트의 산책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시간을 알 수 있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루소는 나무들과 돌들 사이의 떨림까지 느끼면서 위대한 사상을 건져 올렸고 괴테, 헤르만 헤세, 빅토르 유고, 스땅달, 워즈워스의 문장은 그들의 발끝에서 나왔다. 특히 건각을 자랑하는 워즈워스는 자신의 고향 호수변에서 자연의 어울림과 시인 자신의 사물을 보고 감동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시편들을 남겼다.
풍경을 만드는 것은 신이지만 그 풍경에 혼을 불어 넣는 것은 시인이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이 뛴다”고 노래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는 어렸을 때도 그러하였고 어른인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그러하길 바랬다. 만약 무지개를 보고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죽어버리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던 워즈워스는 영원한 어린이로 살다 갔다.
그는 건각으로 케임브릿지대학 졸업 직전 친구와 함께 도보로 프랑스,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의 열렬한 찬미자가 된다. 또한 활기에 차고 격렬한 시인이며 비평가인 콜리지를 만나 그의 열렬한 동반자인 여동생 도로시 등 세 사람이 대륙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호반을 걸어 남쪽 브리스톨 항 부근까지 접의자를 메고 다녔다. 그는 의자를 들고 걸으면서 풍광 좋은 곳에 앉아서 시를 쓰고 경치를 감상했다.
17C 세워져서 폐허가 된 틴틴 사원 몇 마일 위쪽에서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경계를 흐르는 와이강이 구불거리며 수풀 속에서 숨박꼭질하며 흐르는 곡류의 길은 바로 워즈워스의 시흥의 길이었다. 직선 길이 8km의 두배가 되는 길이의 강을 보며 그는 그 강을 찬탄해마지 않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지만 부와 명성을 좇는 화려한 생활을 따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 속에서 글을 쓰며 일생을 보냈다. 1845년 봄, 28세 때 그는 도끼 하나를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가서 3개월 동안 소박한 통나무집 한 채를 짓고, 단 하나의 침대와 단 세 개의 의지를 만드는 등 생활을 최소한으로 간소하게 하면서 홀로 살았다. 통나무집 주변은 숲이 무성했고 호수와 가까웠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사방 1.5km 내에 아무도 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소로우는 혼자 힘으로 먹고 살며 2년 2개월 2일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밭을 일구고 자연을 관찰하고, 명상하고 사색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일출과 일몰을 보면서 전율하지 않는다면 이미 인생의 아침과 봄은 지나간 것이다.”
"달빛이 내리는 밤에는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음까지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사물들은 복잡하게 보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은 더 이상 심란해지지 않는다.
달빛이 내리는 밤은 마치 물과 빵만의 식사처럼 단순하다...."
숲으로 가는 길은 희망의 길이요 시작의 길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가득 심호흡으로 숲의 공기를 들어 마시고 오욕정의 찌꺼기를 토하면서 조금씩 푸르름으로 물들어 가야 하리라. 벌써 뽈록거리면서 새잎이 숲속에서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니체는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했다.
-정영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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