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인간탐험
‘빛’을 전하는 在佛 화가 김인중 신부
“빛을 찾지만, 한 번도 ‘빛의 화가’라 생각한 적 없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출생 연도는 단기 4273년, 서기 1940년, 昭和 15년… 시대가 우릴 만들어”
⊙ 혜화동 小神學校 미술교사 하다 스위스로 유학, 도미니코 수도회 입회
⊙ “남들이 제 그림을 추상화라고 하지만 나한텐 사실화”
⊙ “동양화나 서양화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世界畵 그려”
⊙ “제 작품은 한 인간의 표출. 예술은 ‘사건’이 아니라, 삶의 ‘계속’”
金寅中
1940년생. 서울대 미대 및 同 대학원 졸업, 스위스 프리부르대 및 파리 가톨릭대 수학,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서품(1974) / 프랑스 파리 거주하며 전 세계 200여 전시회, 샤르트르 대성당을 비롯해 독일·이탈리아·스위스 등 세계 38개 나라에 스테인드글라스 설치
유화(油畵)로 시작해 스테인드글라스, 도자(陶瓷)로 작품 반경을 넓히더니 최근에는 유리공예로 나아가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훈장인 ‘오피셰’(2010)를 받았고, 한국인으로는 처음 ‘아카데미 프랑스 가톨릭’ 회원(2016)에 추대됐다. 프랑스 중부의 소도시인 앙베르(Ambert)의 옛 재판소 자리에는 ‘김인중 미술관’(2019)이 들어섰다.
언제부터인가 국내 화단에 ‘김인중’이란 낯선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일종의 역(逆)수입 현상인데 모국을 찾는 그의 걸음도 분주해졌다. 2020년 3월에는 ‘빛의 꿈’, 2022년 1~2월에는 ‘빛의 노래’란 주제로 전시회가 열렸다. 문득 ‘꿈’과 ‘노래’는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는 한 쌍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자는 1월 22일 경기 안산 대부도의 유리섬박물관에서 김 신부를 다시 만났다. 멀리 서해가 보이고 갯벌 위로 몇 마리 갈매기가 떠 있었다. 영적인 느낌이 들었는데 갑자기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읽고 싶어졌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간 김인중과 카잔차키스가 종국에는 한길에서 만날 것만 같았다.
“장엄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독보적인 조형세계”
지난 1월과 2월 서울 서초구 흰물결아트센터에서 열린 김인중 초대전 <빛의 노래> 모습이다. 사진=조준우 기자 |
김인중의 그림은 비(非)구상화다. “내 그림은 동양화나 서양화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세계화(世界畵)”라고 역설한다.
“예술이란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향해 가는 끊임없는 과정입니다. 저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모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세계화를 그리겠다고 다짐했어요. 서양의 추상화 같으면서도 동양의 수묵담채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겁니다.”
그의 그림을 오래 응시하니 마치 영성무용(Spiritual Dance)이 떠올랐다. 무대 휘장, 혹은 색색의 긴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보이고 동심(童心)의 채색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보면 수묵화 같은 흰색 여백으로 착각인지 몰라도 살풀이춤을 추는 이의 옥양목 버선이 연상됐다. 무엇보다 그림이 정적이지 않고 동적으로, 문외한이 볼 때 어딘가에서 새어 나오는 굴절된 빛이 순식간에 바뀌는 듯한 모습이랄까. 찰랑찰랑하는 투명한 물컵에 물감을 떨어뜨릴 때 생기는 번짐 현상 같기도 하고. 매우 독특하지만 그림이 말을 걸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인 드니 쿠타뉴(Denis Coutagne)는 김인중과 세잔, 마티스, 피카소를 비교한 저서 《Kim En Joong artist della luce》에서, ‘김인중의 장엄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독보적인 조형세계는 다른 거장 화가들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평가했다. 쿠타뉴는 또 “김인중은 세잔, 피카소를 잇는 빛의 예술가”라고 했다. 범인들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전문가의 심미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그림인 걸까.
김 신부가 쓴 글들을 읽어 보았다. 이 문장이 눈에 박혔다.
“제 그림에서 의미를 찾지 마십시오. 형태와 색에 당신의 눈이 귀 기울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제야 잔뜩 긴장하며 초조하게 탐색하려 했던 기자의 눈이, 마음이 풀어졌다. 편해졌다. 그림이, 색채의 빛이, 색채의 움직임이 눈에, 마음에 천천히 들어왔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
“김 기자! 저는 출생 연도가 셋입니다. 아셨어요? 왜 그런지?”
― 말씀해주십시오.
“단기 4273년생이란 말이에요. 근데 어느 날 그게 없어지고 서기 1940년으로 바뀌더라고. 아버지(金容德·1918~2011년)가 두 살 때 나를 안고 찍은 사진을 보면 ‘소화(昭和)’ 몇 년이야. 굉장히 속상한 거죠. 무슨 데커레이션(장식·Decoration)도 아니고, 시대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거죠.
해방되던 다섯 살 때, 해방을 알리는 비행기가 제가 살던 (충남) 부여 시골까지 떴더라고요. 잊을 수가 없다고. ‘해방가’가 참 좋았다고요.”
낮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고 바다 건너 태평양까지/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다섯 살 때니까 학교도 안 갈 때인데 그 노랫말을 기억해요. 지금도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어….”
그러더니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인간에게 해방과 자유가 그렇게 중요한 거죠. 국민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니 미술·음악 시간이 없었어. 그 잘난 영어·수학 때문에. 성공해야 하니까…. 미술하고 음악 시간이 일주일에 딱 한 시간인데, 미국으로 보낼 메시지를 낭독하느라….”
‘메시지’란 당시 반공(反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전국 학생들을 동원해 이북 동포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반소(反蘇), 북한 의거(義擧) 촉진 궐기대회 낭독문을 뜻한다.
“미술이라는 말에 가슴이 뛰고 봄이 오는 느낌?”
“물감 입힌 교복을 입었는데 러닝셔츠까지 색이 짙게 배었죠. 다행히 고교 1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는데, 처음으로 미술이라는 말에 괜히 가슴이 뛰더라고. 저한테 무슨 봄이 오는 것 같은 느낌?”
대전고 1학년 때 미술교사였던 김철호 선생님이 부임한 것이다. 2학년 때 교내 미술부가 생겼다. 김 선생님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동창인 이종상(李鍾詳·서울대 명예교수) 화백과 함께 그림을 배웠다.
“선생님이 아주 좋으셔서 우리한테 과외(비)도 받지 않으시고 수업이 끝난 다음에 그림을 그리게 하셨어. 훗날 오만원권 신사임당 영정을 그린 이종상이 내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친구죠. 선생님 밑에서 (이종상은) 어찌나 그림을 잘 그리던지. 난 그때도 ‘저런 사람이라야 미술을 하지, 나는 어떻게 미술 하지?’ 그랬어요.
이종상이 그린 연필 데생을 교실 칠판에 붙여놨는데 사진보다 더 잘 그렸더라고. 기가 팍 죽었지. 그래도 전체 학급 60명 중에 그림 점수 만점은 두세 사람밖에 없었는데 나도 거기에 걸렸더라고(들어갔더라고).”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어느 여학생이 자기네 집 개가 고기 먹고 설사했다는 말이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재산을 제대로 지켰으면 (현대의) 정주영씨 못지않았을 거라고. 귀가 얇으셔가지고 다 날리셨어요.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등록금 내기도 어려웠고, 대학 다닐 동안 식사 안 한 날이 한 날보다 더 많았어요. 그렇게 고생했어요.”
풀빵 한 개가 한 끼 식사일 때가 다반사였다. 머리 깎을 돈이 없어 할 수 없이 머리를 길러야 했다. 캔버스를 살 수 없어 미군들이 쓰던 모래 포대를 얻어 이어 붙인 뒤 그렸다고 한다.
“시커먼 얼굴에 작업복 차림으로 버스에 오르면 학생 취급을 안 해주는 거예요. 학생증을 보여도 안 믿더라고. 그런 추억을 못 잊는다고.”
부잣집 장남으로 자란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근데 대학 2학년 때 4·19가 났죠. 1년 후에 5·16이 났고요. 미술대학에 다녀도 그림을 그릴 수 없던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못 잊는 것이 대학 4학년 때 《조선일보》에서 젊은 작가 초대전이 있었는데 거기서 받은 상금으로 몇 달을 살았다고. 하하하.”
고학의 어려움을 이기려 ROTC에 지원(1기)했고, 졸업 후 광주 보병학교에서 3개월 동안 훈련받은 뒤 1963년부터 2년간 육군 25사단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지금도 ‘후보생가(歌)’를 부를 수 있어요. ‘무등산 청운 높이 뭉친 건아들~’ 하고 노래가 쫙쫙 나올 정도로.
운이 좋게도 좋은 중대장님을 만났어요. 《조선일보》가 주최한 초대전에서 연속으로 상을 받았는데, 중대장님이 훈련 중이라도 수상을 위해 서울로 보내주더군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 내 가방에 연애편지가 가득했어요.”
― 연애편지요?
“전우들이 자기 가족, 애인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 부쳐달라는 거지. 서울 가서 다 우편으로 보내줬어요.”
25사단 최전방 장교 시절
김 신부는 당시 장기오(張基梧· 1932~) 중대장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육사 12기인 장기오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총무처 장관을 역임했다. 1958년 창설된 특전사의 전신인 공수특전단의 창설 멤버이기도 하다.
“간혹 국내 전시회를 가지면 지금도 연락하고 초대하고 있어요. 은인으로 기억하지요. 김 기자! ‘관물 정돈’이 뭔지 압니까?”
― 압니다.
“내무반에서 관물 정돈을 하다 보면, 그림물감이 나왔거든. 중대장님이 보시고도 야단치지 않았어요.”
― 어디서 복무하셨습니까.
“육군 25사단 최전방 파주 장단, 연천 백학인데 이북과 접경지대였어요. 몇 달만 더 근무했으면 영창 갔을지도 몰라. 그 무렵, 베트남 파병이 진행됐는데 이북에서 몰래 내려와 우리 군인들의 목을 잘라 갔다고.
초급 장교 시절, 새벽 4시에 일어나 초소를 둘러봤더니 (병사들이) 다 자고 있어요. 몰래 M1 소총을 가지고 부대로 내려왔지.”
― 한 번도 ‘얼차려’를 안 주었나요.
“기합은 주죠. 주는데, 사병들이 저를 따랐어. 거기(최전방) 오는 애들은 초등학교를 겨우 나온, 거르고 걸러서 오는 애들이었다고. 저녁이 되면 고향이 그리워 다 울곤 했어요.
그럼, ‘전부 반합 가지고 집합!’하라 해 메뚜기를 잡게 했어요. 그날 저녁에 모두 모여 볶아 먹고.”
“일찍이 연애를 그림하고 했어요”
― 볶아 먹고….
“어느 겨울, 말도 못하게 추웠어. 그래서 장작불 피워서 대원들을 다 쬐게 했더니, 대대장이 와서 지휘봉으로 제 배를 꾹꾹 찌르면서 ‘김 소위! 영창 보내겠다’고 했어요. 그 모습을 대원들이 보고 놀래가지고…. 그다음부터 말을 잘 듣더라고. 하하하. 그때는 ‘도강탕’ 먹던 시절이야. 도강탕이 뭔지 모르죠?”
― 네.
“간혹 고깃국이 나오는데, ‘윗선’에서 건더기를 다 먹어서 일선 부대는 젓가락으로 (고깃국을) 저어서…. 담배를 안 피워도 장교한테는 담배가 나오잖아. 병사들에게 다 나눠줬지.”
― 정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사제의 길을 가게 된 배경 같아요. 종교의 목표는 사랑 아닙니까?”
그는 휴전선 근처 계곡에서 홀로 머문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한번은 미동도 없이 난초의 아름다운 보라색에 빠져 명상에 잠긴 적도 있었다. “비무장 지대에서 근무하면서 사제의 길을 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 연애는 한 번도 안 해보셨습니까.
“하고 싶어도 다방 갈 돈도 없는데. 일찍이 연애를 그림하고 했어요. 하하하.”
― 그래도 신부님이 좋다는 여성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이번 서울 전시회 때, 옛날 나 좋아하던 여성들 몇 명이 왔더라고. 하하하. 근데 우리 때는 여학생들하고 감히 만나지도 못했어. ‘저 여성하고 나중에 결혼해야겠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시절이야. 미술대학이 물론 남녀공학이었어도 무슨 스캔들 같은 건 없었어요. 그런 데서 인간의 훌륭함을 본다고. 간혹 법대생들이 조각과 여학생들을 보려고 괜히 (미대를) 넘나들긴 했지만 여학생을 건드렸다가는…. 하하하.”
小神學校 미술교사 시절
▲사제가 되기 전의 김인중. 그는 서울대 미대를 나와 천주교 소신학교의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 어떻게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셨나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택해주신 것 같아. 성소(聖召)는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선택받는 것이니까. 당시 혜화동 소신학교(小神學校·지금의 서울 동성고)에서 미술교사를 했어요. 개신교 계통 미션스쿨에서 정교사가 될 수 있었지만 세례를 받는 조건이어서 안 갔어요. 아무런 확신 없이 양심을 팔아 교사가 될 순 없었다고.
소신학교에 갔더니 신부들이 굉장히 권위적이데요. 저한테 영향을 준 사람들은 선생(신부?)들이 아니고 학생들이었어요.
어느 날 ‘창경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오겠다’고 교장선생님께 허락을 받았어요. 해방감을 느꼈던지 (신)학생들이 너무 좋아해 (창경원) 담을 넘어가기도 했어요. 관리인이 와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왜 이렇게 놔두냐’고 따져요. 제가 그랬어요. ‘보세요. 저 학생들도 바깥 구경을 좀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 일이 있고 학생들은 신학교에서 쫓겨날 각오까지 했더라고. 전방에서 고달픈 장교 생활을 해봐서 그 고충을 경험했잖아요. 지금도 그때 제자들이 날 초대해요. 못 잊어서.”
― 그분들, 다 사제가 됐죠?
“사제 된 사람 중에 주교도 있어요. 이용훈 수원교구장도 있고, 세상 떠난 최기산 인천교구장도 있고…. 초대받아 간 제자의 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면, 신자들에게 ‘옛날 소신학교 선생이셨는데 미술점수 잘 줬다’고 절 소개해요. 하하하.”
스위스 유학과 도미니코 수도회 입회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된 김인중.
― 가톨릭 영세는 언제 받으셨어요.
“소신학교 선생 할 때인 1967년에 받았어요. 세례명은 베드로.”
1969년 김인중은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다. 낮엔 신학을 공부하고 밤엔 아르바이트를 했다. 듣던 대로 여름·겨울 방학 때 열심히만 하면 1년 학비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스위스는 부자나라였다. 슈퍼마켓에서 짐을 날랐고 동물원에서 야경(夜警)을 돌았다. 틈틈이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 때 찾아온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프리부르대 지도 신부가 입회를 권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가난에서 벗어나 마음껏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해 주었다”고 한다.
“프랑스로 (유학) 가서는 고학을 할 수 없어. 안 돼. 그런데 스위스에 가면 바캉스 시즌 동안 일하면 1년 동안 지낼 수 있었어요.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 동물원 야경을 돌고 나머지 시간은 부호들이 사는 저택 경비를 섰어요. 유니폼 입고 순찰 방망이도 들고 말이지. 도둑놈이 한 명도 안 나타나더군요. 애쓰고(힘쓰고) 싶었는데… 하하하. 새벽 5시부터는 청과물 시장에 가서 짐을 날랐어요.
부모님께 편지 쓸 시간조차 없이 사는데… (동물원) 원숭이가 새끼를 낳는지 지켜봐야 하는 처지가 기구하더라고. 부호의 저택에는 피카소 그림이 수두룩해. 화가가 되려고 유학 와서 겨우 야경이나 서고 있구나 하는 자책감 비슷한 게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전람회를 열어주겠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얼마나 기분이 좋아. 다 마무리 짓고 (그림으로) 돌아갔지.
상직의 길과 화가의 길을 동시에 걷는 어려움이 컸지만 두 길을 분리해서 생각해본 일이 없어요.”
“항상 아웃사이더였는데…”
김인중 신부가 그린 가로세로 20X20cm 크기의 연작 유화들. 김 신부는 올해 기준 단기(檀紀) 4355년의 햇수만큼의 작품을 만들 계획이다. 지금까지 300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사진=조준우 기자 |
그는 “교회에서는 ‘이색화가’, 미술계에서는 ‘이색사제’로 불리는 어려움과 지탄은 되레 자신을 정화하는 힘이 됐다”고 고백했다.
― 유럽에 정착한 초기 작품과 지금의 작품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지요?
“그때는 침침했죠.”
― 침침하다고요? 하하하.
“당시 생활과 비슷하게 그냥 침침해요. 퍼스펙티브(관점·Perspective)가 없는 거죠.”
― 대학 시절에도 추상화를 그린 건가요.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 중에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신 감각 있는 분들이 계셨다고. 대학 1~3학년 때는 어느 선생님도 저한테 관심을 안 갖는데, 그 선생님은 칭찬을 하더라고. 항상 아웃사이더였는데….”
영국 노트르담 수녀회 소속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명한 미술사가인 웬디 베케트(1930~2018년) 수녀는 김인중의 작품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만일 천사들이 그림을 그린다면 그들의 예술은 틀림없이 김인중의 그림과 같을 것이다. 눈부시고 빛나는 아름다움, 자유로움에 흠뻑 젖어 있는 것과 같으리라.”
― 신(神)이 작품 속에서 현현(顯現)하는 거죠?
“제 스스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죠.”
― 보는 이의 눈에 따라서?
“그렇죠. 제목을 안 붙인 것도 그렇지만, 저는 ‘해방’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어요.”
“천사들이 그림을 그린다면 김인중의 그림과 같을 것”
2020년 3월 15일 김인중 신부가 자신의 도자 작품을 든 채 전시장에 걸린 대형 그림 <무제(2003년 작·200x386cm)> 앞에 섰다. 사진=조선일보DB |
― 요즘 자주 쓰시는 색깔이 있으신가요.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빨간색이죠. 빨간색은 어떤 뜻이냐? 우선 정열, 사랑…. 출산할 때도 그렇고.”
― 생명과 관련된 색이네요.
“생명의 나무가 빨간색이죠. 멀리서도 잘 보입니다.”
― 이번 전시 작품 중에 파란색이 눈에 띄던데요.
“제일 무난한 색인 파란색은 희망, 순결을 뜻하죠. 바다와 하늘이 다 파랗잖아요.”
이 대목에서 김 신부는 늙은 수사(修士)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술은 지식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음식하고 똑같아. 지식인이라고 해서 그림을 더 잘 감상하고, 음악을 더 잘 듣는 게 아니고, (예술은) 직관적이니까. 그래서 전 제 그림에 대해 절대 설명을 안 하잖아요.
가장 가까이 지냈던 수사님이 104세에 돌아가셨는데, 초등학교도 안 나왔어요.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감자 하나로 사흘을 버티셨대요. 저는 그분께 받은 성덕(聖德)의 기쁨이 큽니다. 우리 수도원에 난다, 긴다 하는 사람이 다 있어도 그분 성덕에 못 따라갔어요. 그분이 제 그림을 보시고는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하셨어요.
어느덧 수도 생활을 혼자 하실 수 없게 되어 요양원에 계셨는데 제가 이발 기계를 들고 찾아갔어요. 농담으로 ‘나는 좋은 신부도 아니고, 좋은 화가도 아니지만, 이발은 자신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하하하.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을 텐데, 그분은 이렇게 물어요.
‘당신의 색깔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가슴이 철렁하지.”
가슴 철렁하던 그 질문…
― 깊이 있는 질문이네요.
“그분이 어느 정도 직관적이시냐 하면, 묵주를 가리키면서 ‘악마를 죽이는 권총’이라 했어요. 지금 북한에서 미사일을 막 쏘잖아요. 그럼, 저는 (그림으로) ‘빛’을 쏘겠다는….”
― 이번 전시회 주제가 ‘빛의 노래’지 않습니까.
“나는 빛을 찾지만, 한 번도 내가 ‘빛의 화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보통 수도자 중에서 성인(聖人)품에 오르면 바티칸에서 기적심사를 합니다. 그런데 옛 성인을 보면 그런 심사를 한 사람이 없어요. 주위에서 성인이라고 해서 성인이 된 거지. 민심이 천심이란 말이 그런 데 쓰이는 겁니다. 제 그림이 좋다고, 제가 성인이 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전혀 자격이 없다고 말할지 몰라요.”
― 신부님 그림을 이해하려면 종교적 배경지식이 있어야 할까요.
“답이 될지는 몰라도, 제 창작은 숨 쉬는 것과 똑같아.”
― 숨 쉬는….
“특별히 기도시간, 《성무일도(聖務日禱)》를 읽을 때도 있지만, 항상 숨 쉬듯 생각해요. 산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제 작품은 한 인간의 표출이지. 거기에 가식이 들어가면 금방 표시가 나요. 예술은 ‘사건’이 아니라, 삶의 ‘계속’이고 ‘연장(延長)’이고….”
김인중 신부는 잠시 숨을 돌린 뒤 이런 말을 보탰다.
“저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 이지적인 것들을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제 그림을 보고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만, 또 어떤 이들은 보면서 행복하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제 그림을 이해하는 데 이지적이어야 할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어요.”
“종교 전람회는 아예 안 나가”
지난 2018년 5월 김인중 신부가 파리 시내 생플루아 성당에서 설교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대형 그림 넉 점은 김 신부가 빛을 주제로 그려 2012년부터 이 성당 제단 중심부에 건 작품이다. 사진=김인중 신부 제공 |
― 평론가들이 신부님 작품을 ‘종교화’라고 평하면 받아들입니까.
“아뇨. 그러나 영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은 받아들여. 모든 작가 작품은 다 영적이니까. 머리 깎았다고 모두 스님이 아니듯 저절로 우러나야지, 종교 전람회는 아예 안 나가.”
― 알겠습니다.
“절 그렇게 매김 하고 싶지 않다고요.”
― 예술에 있어서 ‘뮤즈’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던데, 신부님한테 뮤즈는 신이신가요.
“물론이죠. 목표가 하느님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죄….”
― 죄….
“죄라고 말하면 남 속이고, 거짓말하고, 무슨 남녀관계 같은 걸 떠올리지만 가장 큰 죄는 나를 만들어주신 분을 몰라보는 거라고요. 성경을 떠나서 동양사상에서도 충효(忠孝)가 제일 바탕이 되잖아요.”
― 작품에 제목이 없는 이유가 있나요.
“제목을 붙이면 사람들이 제목하고 (그림을) 금방 연결시켜서 생각해요. 사실 제 그림을 (사람들이) 추상화라고 그러지만 나한텐 훨씬 사실화예요.”
― 사실화라….
“사실이라는 개념도 보이는 것만이 사실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거죠.”
― 작품에 대해 처음 영감을 받을 때 도움이 된 구체적인 대상이나 사물, 사건이 (그림의) ‘제목’이 될 순 없나요.
“작가에 따라 그럴 수는 있겠는데, 그걸(제목을) 고수하면 그림이 안 되더라고요.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기쁨이 신비인데 옛날 예언자처럼 ‘할 줄 몰라요’라고 말하면 (하느님이) 뒤에서 다 도와주시는….”
북한의 카드섹션에 큰 충격 받아
▲2016년 12월 프랑스 생제르베 성당에서 직접 작업한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 서 있는 김인중 신부. 사진=김인중 신부 제공
― 좋으시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단기와 서기, 소화라는 3가지 시간표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했잖아요. 그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제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북한의 카드섹션이나 집단체조를 보면서 더 큰 확신이 생겼어요.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다른 얼굴, 다른 눈빛을 지녔는데 어떻게 기계처럼 똑같이 움직일 수 있나요? 그건 창조주의 뜻에 거스르는 거여.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을 뜯어 맞추면 안 되죠. 올해가 단기 몇 년인가요? 4355년.
저는 20x20cm의 유화 작품을 단기 햇수만큼 만들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4355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선보일까 합니다. 각각의 그림이 모두 다른데 지금까지 3000점 정도를 그렸어요.”
그러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절대 문하생을 안 기릅니다. 제가 선생 될 자격도 자신도 없고, 문하생을 두어서 그들이 제 그림을 베끼면, 이기적으로 말하면, 저한테 고통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그 사람의 창조성을 막기도 하고. 소경이 소경을 끌면 둘 다 물에 빠져 죽어요. 하하하.”
― 하하하.
“난 그렇게 말해요. 항상 제 작품이 환영받고 좋으면 하느님 덕분이고 시원찮으면 내 탓이라고.”
― 무조건 그림이 좋다고 일단 말해야겠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며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많이 와요. 예를 들면 라스코 동굴벽화가 있는 (프랑스 남서쪽 도르도뉴 지방의) 한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었어요. 그동안 방치됐던 이 성당에서 100년 만에 미사를 올리게 됐어요.
그 마을 노파가 제 작품을 보고 ‘당신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현대의 라스코 벽화’라고 했어요. 그런 말은 어떤 평론가한테도 못 들어. 제가 침체되고 그럴 때 그런 분들의 말을 떠올리는 거죠.”
― 그런데 조금 전에 제자를 키울 생각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신부님 세계관을 닮고자 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텐데….
“전시회에 온 분 중에 훗날 화가가 있을지 모르죠. 마찬가지로, 젊은 분들이 제 예술에 관심을 가지면 (저에게) 큰 용기가 되는 거지.
유럽 미술학교에 구경 간 적도 없지만 어떤 경향이 휩쓸어 버려요. 그게 코로나19죠. 코로나19는 여기만 있는 게 아니라 각 분야에 다 있어요. 그래도 유럽은 우르르 몰리는 것은 없어요. (한국은) 어느 미술대학 나오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이 그림보다 더 좌우해요. 그림이면 됐지, 무슨 대학 무슨 학과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유럽 화단은) 미술학교하고 관계없는, 그냥 좋아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 그림이 좋으면 얼마든지 다른 화가들과 거리낌 없이 살아갈 수 있어요. 오히려 등용문이라는 관전(官展) 비슷한 것을 보면 냄새가 나죠.”
회화에서 유리공예로
경기도 용인 신봉동성당. 김인중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이 성당 곳곳에 설치돼 있다. 사진=조선일보DB |
김인중 신부는 마치 외치듯 “내 예술은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말했다. 갑작스런 선언에 기자도 깜짝 놀랐다.
― 이제부터라고요?
“지금까지 전부, 오늘을 위해 존재하니까요. 여기(유리섬박물관) 와서 희열을 느끼는 것도 유리공예를 통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완전히 내 세계가 생길 거라 믿어요.”
김 신부는 회화에서 스테인드글라스, 세라믹에서 이제는 유리공예로 작품 반경을 넓히고 있다.
“제 그림이 서예에서 출발했거든요. 지금까지 매체만 다를 뿐이지 한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고, 경계에서 늘 자유로웠어요. 유리공예를 아무리 잘해도 회화가 뒷받침 안 되면 평범한 공예에 머무를 텐데, 회화가 그 매체(유리)를 선택해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변신할 수도 있어요. 유리 작업이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마음이 놓여요.”
표정이 아이처럼 밝아졌다.
“유리그릇에다 그림을 안착시키면 완전히 다른 회화가 되는 겁니다. 장래가 무궁무진해요. 여기서 유리 입체 작업도 가능하고 스테인드글라스 작업도 가능할 것 같아요.
피카소도 유리에다 그런 것은(그림을 그리지는) 안 했어. 내 예술은 이제 새롭게 시작입니다.”
화업의 유전자는 어머니에게 이어받아
화가 김인중은 유교적 가풍이 짙은 광산김씨(光山金氏) 가문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교육자 출신 아버지 김용덕으로부터 《동몽선습》 《소학》 등 한문 및 서예 교육을 엄격하게 받았다고 한다. 선친은 신구전문대, 대전보건대학, 대전대학교 등의 법인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훗날 동·서양화 경계 없이 섭렵했던 60년 화업을 회고하면서 그는 “자신의 세계화 뿌리는 바로 서예”였음을 밝혔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수도자의 길을 가는 데 그리 커다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버지로부터 대의(大義)를 따르되 부지런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삶의 태도를 늘 가까이서 보고 배웠기 때문”이라 말한다. 유교적 전통을 이어 가문을 일으켜야 할 장남이 하느님과 결혼하여 사제가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일견 커다란 실망을 접고 그의 뜻을 흔쾌히 존중해주었다.
그의 집안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면, 화업의 유전자는 아무래도 아버지보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심미안이 뛰어난 어머니 신소저(愼小姐·1914~2003년)에게서 받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본다.
김인중 신부의 작품 전시할 ‘빛섬미술관’ 설계
2019년 6월 프랑스 중부 도시 앙베르의 옛 재판소 건물에 ‘김인중 미술관’이 세워졌다. 김 신부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사진=김인중 제공 |
위로 누나 고(故) 김연중(金蓮中·1934~1987년)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아래로 첫째 동생인 김효중(金涍中·1944~)은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 그의 남편 김윤한(金允漢·1938~)은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으며 2남 1녀를 두었다.
둘째 동생 고(故) 김대중(金大中· 1949~2011년)은 LG전자 임원으로 재직했고 피아니스트 아내 한상례(韓相禮·1952~)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셋째 동생 김영중(金暎中·1951~)은 한국외대 명예교수로 아내 심우정(沈雨晶·1958~)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넷째 동생 김계중(金啓中·1953~)은 프랑스 교육학 박사로 외부 강연 및 수필가로 활약하고 있으며 1남을 두었다.
다섯째 동생 건축가 김억중(金億中·1955~)은 한남대 명예교수로 있으며 안면도에 김 신부의 작품을 전시할 ‘빛섬미술관’을 설계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 김미영(金美永·1956~)과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여섯째 동생 김항중(金恒中·1957~)은 대전대 중등특수교육과 교수로, 그의 아내 이혜숙(1962~)은 가톨릭대 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슬하에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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