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사람들/한승원(소설가)
“상기네 할머니가 올해 아흔네 살인데, 아들하고 며느리한테 자꾸 굿을 해달라고 한다네요. 밤이면 검은 갓에 검은 도포 입은 얼굴 새까만 남자가 자꾸 어른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이룰 수 없다고… 그 할머니 노망났을까?” 아내가 이 말을 한 지 열흘쯤 뒤에 새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상기네 할머니가 낮잠을 자다가 문틈으로 거실을 내다보면, 아들과 며느리가 들에 나갔다가 들어와서는 무슨 맛있는 보약인가를, 당신한테는 주지 않고 자꾸 마신 모양이어요. 속이 상한 상기네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가 들에 나가고 없는 새에, 그들이 하는 대로 그 맛있는 것을 뜨거운 물에 타서 하루 서너 차례 마신 것이어요. 그것이 뭣이냐 하면 믹서 커피라… 그 사실을 알아차린 상기네 아버지가 점쟁이한테 갔다가 왔다고 하면서 ‘어무니, 이 봉지 속에 들어 있는 가루에는 코쟁이 귀신이 들어 있어서 조선의 노인들이 마시면 밤에 귀신이 어른거린답니다’ 하고 말했더니, 다시는 그것을 마시지 않는지, 굿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네요.”
내가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살 적에, 어머니보다 열 살이 아래이신 상기네 할머니는 말동무를 해주려고 어머니를 찾아오곤 했는데, 그 할머니는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점심을 먹으러 가자 바야흐로 현관을 나오던 상기네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우리나라가 해방될 적에, 일본 놈들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아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다급했는데요?” 하고 추임새를 넣자, 그 할머니는 두 팔을 십자로 벌리고 쫙 편 오른손 손가락들을 외로 비비꼬고 왼손 손가락들을 오른쪽으로 비비꼬면서 엉덩이를 흔들며 노래했습니다.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디
똥은 마렵고오
허리띠는 안 풀어지고오
염소는 달아나고오…
그러다가
푸드럭!”
마을 아래 골목의 머리 허연 90세의 영감님은 지난여름의 어느 땡볕 쨍쨍한 날 분무기통을 짊어지고 고추밭과 참깨밭과 콩밭에 무슨 농약인가를 뿌렸는데, 다음 날부터 고추나무와 참깨나무와 콩나무들이 시들부들 앓다가 황갈색으로 말라죽었으므로, 사람들은 글씨를 해독하지 못하는 그 영감님이 제초제를 뿌렸을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농로를 타고 바닷가 모래밭으로 산책을 가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그 영감님은, “등산 가시는가?” 하고 인사말을 합니다. 이 영감님이 ‘등산’과 ‘산책’을 구별 못 하는구나 하고 치부하면서도 나는 허리 굽혀 공손히 절하며 “네” 하고 대답하곤 했는데, 어느 날 문득 그 영감님의 ‘등산 가시는가’라는 말에 미끄러지면서 속으로 소리쳤습니다.
‘아하, 바닷속에 산이 있다. 그 산에 내가 있으므로 나는 날마다 꾸준히 그 산을 오르곤 하는데 그 등산으로 인하여 사리 같은 앙금이 나의 모래밭에 깔리는 것이고 나는 그것들을 헤아리며 걷는 것이다.’
일찍이 홀로되어 행려 장사를 하며 사시던 누님은 넉넉하게 벌어놓은 돈은 없지만, 아들만 넷을 모두 다 잘 키우고 가르치고 장가보내 제 밥 벌어먹고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모시겠다는 자식이 있지만 뿌리치고 혼자 울산광역시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사셨습니다. 노모 모시고 사는 나와 내 아내를 항상 고마워하고 짠해하고, 내 건강 걱정을 제일로 많이 하시는 형제가 그분이셨습니다. 그 누님은, 내가 울산 문인협회에서 초청 강연을 했을 때, 강연장으로 찾아와서 강연을 들으셨습니다. 여느 부잣집 아낙처럼 화사한 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고, 뚱뚱했고, 이빨은 거의 빠져 합죽이가 되어 있고, 이마에는 얼마 전에 수술한 푸르스름한 흉터가 있었습니다. 나는 강연을 하는 동안 내내 청중 가운데 앉아 있는 누님과 눈을 마주치곤 했습니다. 누님은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내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이 어떻게 나의 소설 속에서 형상화되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강연장에 앉아 있는 누님 때문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목이 메곤 했습니다. 내 어린 시절 한복판에는 나의 빼어나게 예쁘고 고운 누님이 굳게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이 있은 다음 나는 단상으로 누님을 나오시게 하고 내 누님을 청중에게 소개했습니다. 물론 아까 강연 중에 들먹거린 그 아름답고 고운 누님이 바로 이 늙은 여인임을 이야기했고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누님은 혼자 강연장에 오지 않고 많은 사람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수양딸을 삼았다는 보험 설계사 아주머니도 있고, 당신의 고객이라는 회사 과장이나 직원들도 있고, 약국의 약사도 있었습니다. 강연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울산의 한 서점 주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제 서점에서는 선생님의 책들이 제일로 많이 팔리고 있습니대이. 누가 제일 많이 사가시는지 아시는교? 일흔 살이 훨씬 넘은 할머니인데, 열 권이고 스무 권이고 계속 사가시는 기라예. 궁금해서 물었더니, 한승원 선생님이 당신 동생이라고 하대예. 그것들을 사다가 무얼 하느냐고 했더니, 당신 단골손님들한테 그냥 나누어준다는 거라예.”
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변변치 못한 이 동생은 그 누님이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신 이후까지도 대관절 어떤 행려 장사를 하고 사셨던 줄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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