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성성당 남산공소 충청남도 당진시 오봉대길 65-31 (면천면 율사리 365)
<좌측 상단 사진은 1996년에 촬영한 공소 전경>
+ 요한복음 10,27-30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으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말씀의 향기>
들리시나요? -윤영중 필립보 성소국장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곳 성소국은 참 부담스럽고 오고 싶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더욱이 지금 같은 이 시기에는 말이죠(신학교 입학생 : 2018년 3명, 2021년 4명, 2022년 7명).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 안에 그렇게 복음적인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부담은 결국 많은 숫자의 사제 성소에 대한 부담감, 압박감이니까요. 과거에 적어도 15명~20명이 입학했던 영광을 내가 재현해내고 싶은 욕망과 같으니까요.
이런 부담을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본질적이고, 복음적인 차원으로 접근해 나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환이 필요합니다. 곧, 문제의 뿌리로의 전환입니다.
"과연 나는 복음적인가? 복음과 가까운가? 복음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가? 나를 관통하고 있는가? 내가 선포하는 것이 정말 복음인가? 나는 또 복음을 살고 있는가?"로.
성소에 대한 문제를 우리 교회가 다 함께 이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는 한 성소의 위기를 해결할 묘책은 결코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혹시 있다면 성소국으로 꼭 전화주십시오!).
숫자, 통계와 씨름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땅끝까지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데 다시 온 힘과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교회의 본질, 정체성의 회복 없이, 곧 복음화 없이 '성소의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닥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성소의 위기' 그 자체에 대한 의미, 곧 아버지께서 이 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해결책, 획기적인 방안, 프로그램이라는 미봉책에 매달려 숫자와 씨름하며 또다시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성소의 위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절박한 호소를 또 외면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이 '성소의 위기'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복음으로, 본질로, 원천으로, 곧 나에게 돌아오라.'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립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들리시나요?
교구 전담 사목을 소개합니다
대전직장직종사목부
"삶의 현장인 일터에서 복음의 씨앗을..."
직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과 더불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의 터전이자 자기 삶을 실현하는 중요한 삶의 현장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모습(마태 5,13~14)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삶의 현장인 직장생활 역시 예외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직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신앙과 삶이 분리된 채 신앙 따로 삶 따로라는 "따로따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본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직장과 세상 안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직장직종 사목부에서는 직장 내 교우 공동체의 형성과 복음화를 통하여 '삶의 현장인 일터에서 복음의 씨앗이'모든 이에게 뿌려져 각 직장 공동체가 복음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영사목적인 동반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직장 내의 모든 교우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만나는 사람들이 속에서 언제 어디에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나누는 신앙여정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대전 직장직종사목부는 1999년 1월. 교구 설정 40주년과 2000년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새 시대의 사목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전지역의 연구 단지, 대학교, 공무원 등 단위별 모임인 직장과 개인택시, 변화사, 세무사처럼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개개인이 함께 모인 직종을 아우르는 사목으로 현재 40여 곳의 직장직종 공동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본당은 성전을 중심으로 "찾아오는 교우들과 함께하는 사목"이라면 직장직종사목은 신앙공동체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찾아가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직장인의 삶을 나누는 "찾아가는 사목"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몇 년간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이상욱 요셉 신부 대전직장직종사목부 전담-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8. 미사 : 우리의 행위로써 봉헌하는 제사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행위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기도를 위한 합장, 무릎을 꿇는 행위, 일어서는 행위, 인사를 하는 행위 등 우리가 미사에 익숙해져서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분명 전례 안에서 우리의 행위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현행 보편교회에서 특별히 전례 안에서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능동적인 참여를 위해 "동작과 자세"의 중요성을 언급합니다. 전례헌장 30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능동적 참여를 증진하도록, 백성의 환호, 응답, 시편 기도, 따름 노래, 성가와 함께 행동이나 동작과 자세를 중시하여야 한다. 또한 거룩한 침묵도 제때에 지켜야 한다."
지난 시간에 미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거룩한 표징"으로 거행되는 부분을 설명드렸습니다. 표징으로서의 전례와 연결되는 부분이면서, "거룩한 표징"가운데 하나로 "동작"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예식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동작과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작은 전례의 표징과 상징들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에 중요합니다. 특히 미사는 거룩한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의 행위와 은총을 표현하기에, 우리 입장에서 올리는 거룩한 표징인 우리들의 행위는 매우 중요한 화답이기도 합니다.
전례 안에서 동작은 인간의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행위를 배제하고는 미사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역시, 집전자들의 동작과 말을 통하여, 생기를 돋우는 성령의 능력이 주어지고, 우리들의 행위로 인해서 능동적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가 참여하는 미사 안에서 '행동이나 동작과 자세'는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더욱이 미사에서 동작과 자제의 일치는 예식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하는 요소입니다.
"(미사 안에) 동작과 자세는 거행의 여러 부분들이 지닌 참되고 완전한 뜻을 밝혀 주고, 모든 이가 거행에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통일된 자세는 거룩한 전례에 모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구성원이 이루는 일치의 표지다. 이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정신을 표현해 주고 길러 준다."
다음 시간에는 "보편교회에서 중요시하는 미사의 요소- 공동체"라는 주제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 교구 내 공소
순성성당 남산공소
▲1996년 촬영
남산공소는 신앙의 자유를 맞이한 후 합덕성당 크램프 신부의 사목 담당 공소로 재개되어 초대 조익환 프란치스코 회장집에서 신자 44명이 공소예절을 했다. 6.25 한국전쟁 이후 임재인 안토니오가 2대 회장을 맡아보았고, 1956년 폐가옥을 해체하여 얻어진 목재로 25.92㎡ 규모의 한옥식 공소를 건립하였다. 토지와 공사비는 임 회장이 봉헌하였다. 2000년경 공소가 폐지되고 주택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소유권도 몇 차례 변경된 상황이다. 교구 내 몇 개소 남지 않은 한옥구조의 공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현재 3세대 3명이 순성성당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32)
가정관계 증명서 제출요망
살다보면 가끔씩 증빙 서류를 제출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서류들 가운데 가족관계 증명서라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부모나 자녀, 남편과 아내 등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재직 증명서나 경력증명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느낌이 가슴 한 구석에서 올라온다.
너무나도 익숙해져 관계가 문서 안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가족 한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우리가 증빙해야 할 서류가 하나 더 있다. 어떤 관공서나 기관, 단체 등이 요구하는 증명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중요한 증빙서가 있다.
'가족관계 증명서'가 바로 그것이다. 가족과 가정은 어떻게 다를까? 가족은 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반면, 가정은 그 관계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혹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누구인지는 가족관계 증명서로 충분히 입증되지만, 그 가족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소통하며 살고 있는지는 '가정관계 증명서'가 입증해 줄 것이다.
가족이 있다고 모두 가정을 이루는 건 아니다. 함께 있어도 서로 자기만의 섬 안에 갇혀 생활한다면 그건 가족 관계만 충족되었을 뿐 가정생활이 성립된 것 아니다.
반대로 가족과 떨어져 산다고 가정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건 아니다. 서로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면서 가족들과 늘 함께하는 기쁨의 공동체 안에 머무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혼자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매일 전화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함께 있어도 각자 방 안에서 문을 닫고 대화 없이 지낸다면 그는 가족만 있는 고독한 사람일 뿐이다.
5월이 가족의 달이 아니라 '가정의 달일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오늘은 마침 어버이날이다. 단지 가족 중의 한 분이라서가 아니라, 가정 안에 늘 함께 머물러 주셨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찾아뵙는 그런 날이다.
연말 정산 서류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꼼꼼하게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을 '가정관계 증명서'를 완성해 가는 뜻깊은 5월을 보내야겠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 교수-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9차 성소 주일 담화(2022년 5월 8일)
인류 가족을 이루라는 부르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전쟁과 탄압이라는 냉혹한 바람이 불어닥치고 양극화의 징표들을 빈번히 마주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 교회는 시노드 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경청, 참여, 나눔의 정신을 키워나가며 함께하는 여정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선의를 지닌 모든 이와 더불어 인류 가족을 이루고 인류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며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제59차 성소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곧 하느님과 세상에 귀 기울이는 교회라는 맥락 안에서 ‘성소’의 더 넓은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성찰하고자 합니다.
모든 이가 교회 사명의 주체가 되라는 부르심
여정인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교회의 본질적인 성소입니다. 이러한 지평 안에서만 다양한 성소와 은사와 직무를 식별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자기 바깥으로 나가며 역사 안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명은, 사목 활동의 모든 영역이 다 함께 어우러져 일하고 더욱 중요하게는 주님의 모든 제자를 참여시킬 때에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이 받은 세례에 힘입어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마태 28,19 참조). 세례 받은 모든 이는 교회 안의 역할이나 신앙 교육의 수준에 상관없이 복음화의 능동적인 주체입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20항). 우리는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사고방식, 곧 사제는 주체이고 평신도는 실행자라는 사고방식을 경계하며, 평신도와 사목자가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함께 이어 나가야만 합니다. 교회 전체는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서로의 보호자 그리고 피조물의 보호자가 되라는 부르심
‘성소’라는 단어를 그저 특별한 축성 생활을 통해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한정을 지어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분열된 인류를 다시 하나로 만들고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함께 참여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모든 이는, 심지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생명이라는 선물과 함께 근본적인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사랑하셔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 마음 안에는 우리 저마다가 차지하는 유일하고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모든 이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이 거룩한 불꽃을 키워서, 사랑과 상호 수용에 힘입은 인류의 성장에 이바지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보호자가 되라고, 화합과 나눔의 유대를 강화하라고,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도록 피조물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피조물의 눈부시게 훌륭한 공동의 집에서, 그 구성 요소들의 조화로운 다양성 안에서 단 하나의 가족이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개개인들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 다양한 분야의 단체들도 ‘성소’를 가집니다.
하느님 눈길을 환대하라는 부르심
하느님께서는 이 위대한 공동 성소 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우리 삶을 어루만지시며 우리의 최종 목적, 곧 죽음의 문턱을 뛰어넘는 충만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고자 하셨고 또 지금도 보고 계십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모든 돌덩어리는 조각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조각가의 일입니다.” 예술가의 눈길이 참으로 이럴진대, 하물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눈길은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나자렛의 젊은 여인에게서 하느님의 어머니를 보셨습니다. 어부 시몬 바르요나에게서 장차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레위라는 세리에게서 사도이자 복음사가인 마태오를 알아보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가혹한 박해자 사울에게서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를 보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눈길은 늘 우리에게 닿아 있고 우리를 어루만지며, 우리를 해방시키고 변화시켜 우리가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성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눈길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거룩함과 마찬가지로 성소도 극히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경험이 아닙니다. ‘이웃집 성인들의 거룩함’이 있는 것처럼(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6-9항 참조), 모든 이에게 주어진 성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바라보시고 또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극동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자는 알에서 독수리를 알아볼 수 있고, 씨앗에서 큰 나무를 알아보며, 죄인에게서 성인을 알아본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방식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때로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잠재력을 알아보시고 공동선에 봉사하는 데에 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우리 삶 내내 지치시지 않고 일하십니다.
거룩한 조각가이신 분의 솜씨 덕분에 성소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손’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부름 받은 그 걸작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 말씀은 특히 우리를 정화해 주고 밝혀 주며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성소에 더욱더 마음이 열리도록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입시다! 또한 믿음 안의 형제자매들에게 경청하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언제나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시는 하느님 계획이 드러나는 데에 그들의 조언과 모범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눈길에 응답하라는 부르심
사랑과 창조의 하느님 눈길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히 독자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닿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 이처럼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눈길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이러한 눈길에 마음을 움직여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도록 그분의 이끄심에 우리를 내어 맡깁시다! 또한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 어떤 이든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만나는 모든 이가 환대받는다고 느끼고, ‘어떤 분’께서 사랑을 담아 바라보시며 그들이 지닌 모든 잠재력을 일깨우도록 초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시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눈길을 환대할 때 변화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 자신과 주님 그리고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이 나누는 성소의 대화가 됩니다. 깊이 있는 대화는 우리가 더욱더 본연의 모습이 되게 만듭니다. 사제 성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의 도구가 됩니다. 축성 생활 성소 안에서 하느님 찬미와 새 인류의 예언이 됩니다. 혼인 성소 안에서 서로에게 선물이 되며 생명을 낳고 가르치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이들과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라고 우리를 부르는 모든 교회적 성소와 직무 안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선에 봉사하고 사랑을 널리 전하게 됩니다.
이제 저는 의사 호세 그레고리오 에르난데스 시스네로스(José Gregorio Hernández Cisneros)의 경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그는 프란치스코회 3 회원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후에 수도자이며 사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였지만, 건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소가 의학 전문의라는 것을 깨달아, 그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자신을 모두 바치며 살았습니다. 그는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세계적 유행병에 감염된 이들에게 아낌없이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환자들 가운데 고령의 환자 한 명을 위하여 약을 사서 약국을 나오는 길에 차에 치여 선종하였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그 부르심을 온전히 끌어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 준 모범적인 증인인 그는 일 년 전에 시복 되었습니다.
형제적 세상을 이루라는 부르심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개별적으로만 성소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자이크를 이루는 조각들과 같습니다. 각각 그 자체로도 사랑스럽지만 모두 함께 모여 있을 때에만 하나의 그림을 이룹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 마음에 있는 별처럼 그리고 우주 창공에 있는 별처럼 빛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시작하여 인류의 길을 이끌고 비출 수 있는 별자리를 이루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다름의 향연 안에서 인류가 부름 받은 모든 표징이자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더욱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조화로운 다양성 안에서 일치하여 함께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이가 이바지할 몫을 지닌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소’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이런저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 특정 직무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것, 또는 수도 가족, 운동 또는 교회적 공동체의 은사에 이끌리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실 때 품으셨던 형제애의 위대한 전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 안에서 각 성소는 공동의 목적에 이바지합니다. 성령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다양한 은총의 조화를 모든 이 가운데 널리 알리려는 목적입니다. 사제, 남녀 축성 생활자, 평신도 여러분, 사랑으로 일치한 하나의 위대한 인류 가족은 이상적 전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바로 그 목적이라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우리 함께 걸어가고 일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에서 하느님 백성이 이러한 부르심에 더욱 잘 응답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모두 이 위대한 하느님 계획 안에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찾고 최선을 다하도록 성령의 빛을 청합시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2년 5월 8일
부활 제4주일
프란치스코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for the 2022 World Day of Prayer for Vocations, Called to Build the Human Family, 2022.5.8., 영어와 이탈리아어>
2022년 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들에게 보내는 경축 메시지
(30148) 세종특별자치시 국책연구원 5로 12 대표전화 : 044-270-3000 E-mail : tjub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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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교리>
Q) 성소 주일 이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한 부르심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불러 주시는데, 부르시는 모습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은 더욱 사제성소와 수도 성소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 성소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이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하느님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고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끊어지지 않기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착하신 목자이시면서 양들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는 길을 보여주셨음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전 세계 인구의 70%
전 세계 인구의 70%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근데 세상은 왜 이럴까요? 겉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건 아닌 건지? 정말 믿어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모를 일입니다.
바티칸 뉴스에 나온 내용입니다. 비통해하시는 교황님, "우리도 동참하길 바랍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5월 1일 부활 제3주일 부활 삼종기도의 말미에서 "아이들이 쫓겨나고 추방당한다는 끔찍한 소식이 들리는 " 우크라이나를 다시금 언급했다. "우리는 인류의 끔찍한 퇴보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평화를 찾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교황님은 "성모성월인 5월 모든 신자와 공동체가 매일 평화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초대했다. 아울러 "야만적으로 폭격을 받아 파괴된 '마리아의 도시'인 우크라이나의 마리우폴"을 언급했다.
"지금도 여기서 마리우폴의 제철소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안전한 인도적 통로를 마련해 달라고 다시 한번 간절히 요청합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 특히 가장 취약한 이들, 노인들,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쫓겨나고 추방당한다는 끔찍한 소식도 들립니다.
우리는 인류의 끔찍한 퇴보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과 함께,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찾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황님은 다음과 같은 진심 어린 호소를 전합니다. "폭력의 논리, 무력의 악순환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대화와 평화의 길에 나서야 합니다!"
-글.사회복음화분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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