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교성당 주래공소(구 공소)
충청남도 예산군 용동1길 27-5(삽교읍 용동리 870-17)
+ 마르코 복음 13,24-32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말씀의 향기>
주지 않고 남겨 두는 것은 모두가 사라지고 만다-김용남 힐라리오 대전성모병원장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 나무의 변화를 통하여 그 비유를 깨닫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시는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준비라는 것이 특이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나뭇잎이 돋는 사소한 일상을 잘 살피면 그때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현실, 그냥 시간의 흐름만이 존재하는 그곳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때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것 안에서 당신을 '찾아내고',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이웃의 삶에 동참하고 하느님의 일에도 참여하면,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때도 알아가게 될 것이고 자신이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기도 합니다.
인디언 속담에 "주지 않고 남겨 두는 것은 모두가 사라지고 만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 힘찬 부름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만큼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갖가지 재능과 능력, 기술, 우리가 품고 있는 온갖 생각과 느낌, 우리가 늘 보는 갖가지 아름다운 광경,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온갖 물질적 재화는 궁극적으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참다운 인간적인 행위란 나누어 가질 줄 아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자기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태어났고, 죽을 때 빈손으로 떠납니다. 인간이 홀로 살 수 없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나눌 때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살아 날 것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성해지는 것이 곧 나무의 신비인 것입니다. 요즈음부터 특히 코로나19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때에 우리에게 굶는 사람, 목마른 사람, 실직자,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불면증에 걸릴 정도로 힘겹고 어렵게 살아가는 처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눔은 아픔과 고통, 희생과 헌신을 수반하지 않고는 진정한 나눔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 그것이 재물이건, 시간이건, 봉사이건,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비단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하찮게 보이는 사소한 한 만디,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자신의 희생을 동반하여 이루어지는 나눔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나눔이요, 그러한 나눔이 실천될 때 우리 사회는 조금씩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목적없이 살아가도 될 만큼 길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실제로는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삶 속에서 어떤 기쁨과 보람을 맛볼때만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부끄럽지만 지난 6월 27일에 있었던 '제22차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하기 전까진 골령골이 어떤 역사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는 장소인지 몰랐었습니다.
골령골에 도착하여,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무덤과 그 앞에 모여 있는 수많은 희생자 유가족들을 보며 딴 세상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대전이 고향은 아니지만 벌써 대전에 산 지도 30년이 되는데 이곳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충격이 컸었나 봅니다.
무지한 상태로 민족화해위원 사제로서 위령제 예식을 거행하고 희생된 영혼들을 추모하였습니다. 저의 무지했던 상태와 이곳이 담고 있는 역사적 진실이 합쳐져 가슴이 쓰라리고 억장이 무너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골령골 사건을 다른 KBS다큐멘터리 방송 첫 부분을 시작하는 한 철학자의 글입니다.
11월 위령 성월에 우리 교우분들의 발걸음을 학살사건이 이루어졌던 이곳 (대전 동구 낭월동 13)으로 재촉해 봅니다.
깊이 3미터, 길이 1km에 다다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 있는 골령골에 오셔서 보시고, 기억하시고, 기도하시며 골령골에 묻혀 있는 영혼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시청바랍니다]
Kbs 특별기획! 묻혀버린 진실 1부
http://naver.me/GjRq1NV1
Kbs 특별기획! 묻혀버린 진실 2부
http://naver.me/GXEy8XAk
-김은석 요셉 신부 대전가톨릭민족화해위원회-
'교회와 나' 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하느님의 백성'과 '시노달리타스'의 중심에(하느님 백성 모두가)'함께'라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로 지난 회를 맺었다. 오늘은 여기에 그 '함께'의 중심에 있는 '성령의 인도'를 본질적 토대로 하여 시노달리타스의 개념과 내용을 살펴보자.
시노달리타스의 신학적 의미와 이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 교황청 국제신학위위원회 문헌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Synodalitas-오해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 이전의 출판물로 '공동합의성'으로 표기된 것에 따름; 지난 회 참조)」(2018)에 따르면, "공동합의성은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modus vivendi et operandi)의 고유한 특성"(6항)인데, 그것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 사이의 일치를 가리키는 '친교로서의 교회'와 관련된다. 그리고 "공동합의성(시노달리타스)의 개념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교회의 삶과 사명에 관련되고 참여하는 것을 일컫는다"(7항). 이는 무엇보다 시노달리타스가 어떤 형식이 아니라 실제여야 함을 드러낸다. 곧 교회의 보이지 않는, 영적 친교개념을 실제로(보이게) 적용해 실현하면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실제 삶에 적용되는, 교회의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교회의 친교의 영성을 향한 하나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민주주의적 합의 과정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교계적 합의 구조를 존중하면서도, 성령의 인도 아래 신앙 감각의 주체인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참여하여 서로 경청하고 식별함으로써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전망을 함께 찾아나간다는 영적 의미에서 해석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 위에(「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에 따라) 시노달리타스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순례하는'특성을 드러낸다(49항)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간다. 길이신 그분께서 당신 사랑의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가 그분 안에서 '더욱 뛰어난 길'을 따를 수 있게 하신다. 곧 시노달리타스는 마지막 안식에 이르기까지 친교 안에서 걸어가는 교회 여정의 역사적 형태이며, 하느님의 백성 전체는 복음 선포의 주체이다.(53항) 따라서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전체와 교회 안의 모든 이가 주체임을 드러내고(55항), 친교인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표현이다(58항). 그 란에서 공동합의적 과정은 교계적으로 구조화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한 교구 안에서, 식별과 자문과 협력의 공동작업을 통해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과 사목적 차원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곧 결정을 내리는 것은 사도성과 보편성의 보증인 주교의 권위에 속한다.(68항)
결국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삶과 사명을 특징짓는 고유한 방식으로, 함께 걸어가는 것,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려는 성령의 능력으로 주 예수께서 소집하신 하느님의 백성이 회중으로 모이는 것이 곧 교회의 본질임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이는 당연히 교회의 일상적인 생활방식과 작용방식 안에서 표현돼야 한다. 그러한 방식은 공동체적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성찬을 거행하는 것, 친교의 형제애를 이루는 것, 하느님 백성 전체가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직무와 역할을 구별하며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고 공동 책임을 지는 것을 통해 실현된다(70항)
-서명옥 로사(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교구 내 공소
삽교성당 주래공소(현 공소 내부)
주래(용동리 1구) 마을 전교는 1938년 김도흥 리노, 양 요안나 부부가 합덕 양촌에서 세례를 받고 용머리, 주래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1956년 예산본당 정 에밀리오 신부가 공소를 설립하고 김도흥 리노를 초대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957년 김춘배(외인)가 부지를 희사하고 본당에서 자재를 지원하여 시멘트벽돌조(49.62㎡)구 공소를 건립하였다. 1966년 삽교본당 설립으로 주래공소는 1972년에 폐지되었고, 1985년 구 공소 아래쪽에 경량철골조 강당을 신축하여 공동체 모임의 장소로 활용해 왔다. 현재 본당으로 미사에 다니고 있으며 30여 세대에 20여 명이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20)>
상대성의 목소리 원리
잘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연락할 일이 생겨 전화를 했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거라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밝고 큰 목소리로 안부부터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당황스러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의 내용이 아니라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당혹스러웠다.
모기만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전화를 받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고 나도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해야 했다.
지금 회의 중이라 나중에 전화해 주겠다는 상대방의 속삭임에 그럼 꼭 연락 부탁한다고 덩달아 속삭이며 전화를 끊고 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툭 튀어 나왔다.
상대방이야 크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 작게 말했다지만, 나는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어째서 똑같이 속삭이듯 말해야 했는지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귀로 듣는 것이 고함이면 내 입에서도 고함이 나가고, 귀로 듣는 것이 속삭임이면 내 입에서도 속삭임이 따라 나간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깨달았을 때의 그 심오함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 경험은 나에게 세상살이의 너무나도 당연한 상대성 원리를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했다.
내 목소리의 높낮이와 강도에 따라 상대방도 똑같이 반응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관계의 출발이 나 자신으로 비롯될 수 있다는 질실을 보여 준다.
상대방으로부터 부드러움을 원한다면 내가 먼저 시작을 부드럽게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면 상대방도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이치를 종종 망각하고 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만 트집 잡고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만 차곡차곡 마음에 쌓아가며 고통받곤 한다.
누구나 행복한 대화를 꿈꾼다. 하지만 아무나 그 대화를 시작하진 못한다. 그 시작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상대성 목소리 원리'를 발견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빨강보다 붉은
언어보다 짙은
속살거림.
못내 그리운
손짓보다 앞선
마음 한 켠.
가을의 시간.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환경의 시각에서 보는 11월 11일
많은 사람들은 이 날을 빼빼로 데이로 기억한다. 화려하게 포함된 고자를 선물하면서 안부를 묻고, 사랑을 전한다. 좋은 의미에서 보면 참 좋다. 그러나 환경을 생각하면 매년 되풀이되는 과대포장이 문제이다. 화려하게 눈길을 끌기 위한 상술로 재포장과 과대포장이 심각한 실정이다.
환경단체가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소비자의 64.0%가 과대포장으로 구매 시 불편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가뜩이나 배달 음식과 1회용품 사용의 폭증으로 쓰레기가 넘쳐나는데 괴대포장도 거들고 나섰다. 심각한 문제이다.
한편, 11월 11일은 '보행자의 날'이다. 대기오염을 줄이고, 국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지난 2010년 지정된 국가기념일이다. 탄소제로의 중요성이 증대되는 시기에, 빼빼로 데이의 과대포장으로 인한 쓰레기 범람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걷는 보행자들의 걸음걸이에 한층 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이기도 하다. 우리 농업과 농촌의 소중함을 알리고, 농업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1996년 지정됐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019년 기준 45.8%로 수입의존도가 높다. 요즘 우리나라를 요동치게 만드는 요소수 사태를 보면서, 만약 외국 농산물 수입이 요소수처럼 중단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매년 돌아오는 11월 11일이 올해는 더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탄소중립을 실현해야 하는데 과대포장으로 인해 쓰레기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거리는 걷고, 승용차 운행을 자제하여 탄소제로 실현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농업분야가 탄소제로 실현에 기여해야 할 부분도 많고 먹거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게 되어, 농업인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게 된다.
여러가지 면에서 11월 11일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출처 : 불교공뉴스(http://www.bzeronews.com)
-글. 사회복음화분과제공-
<1분 교리>
1) 이성이란 무엇인가요?
이성(理性)이란 인간 영혼의 속성 중 하나로, 하느님께 부여받은 능력입니다. 이성은 선과 악을 식별하고 이치를 따지며 추리하고 종합하는 지적(知的) 능력을 말합니다. 인간이 신을 감지할 수 있는 것 역시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이성의 '지적 작용'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무신론자들은 하느님과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이러한 '지적 작용'까지도 물질의 한 작용으로 보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육분과 제공(김동규 신부님 예비자 교리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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