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쎄마니」이춘복 마리아
+ 마르코 복음 1,12-15
그 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말씀의 향기>
광야에서 포도나무를 베어라 -이진용 베드로 사무처 차장
언제나 사순시기르 시작하면서 「포도나무를 베어라」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교회는 '포도나무'를 하느님에 비유하기 때문에 제목만 보면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관람을 마치고 나서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이 만들어내는 잘못된 모습의 하느님, 그 허상을 베어버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인 광야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적인 삶의 유혹과 불신에서 벗어나 하느님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곳입니다. 이러한 광야의 길을 우리 모두 걷고 있습니다. 해마다 사순시기가 되면 일부러 광야를 찾아 나서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들 삶의 전부가 광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광야의 삶으로 초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광야로 초대하셨겠습니까?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듯이 우리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유혹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광야에 주저앉아 버림으로써 고통과 시련만 체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광야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를 통해 당신을 체험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십니다. 원망과 분노의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광야는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이들에게 광야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광야에 서 있는 나는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고, 광야의 시간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광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께로 향한 믿음의 고백과 실천을 통해 축복의 땅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립시다. 광야에서,세상의 혼란과 유혹 속에서 각자에게 잘못 비춰진 하느님의 모습이 있다면 과감히 베어버리도록 합시다. 포도나무를 베어버린다면 은총의 사순시기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임기선 신부와 함께 하는 소공동체(5)>
복음화 하는 소공동체
마리아 : 신부님,지난 시간에 소공동체의 네가지 요소를 보면서 소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많이 정리되었어요.
신부님 : 그래요? 다행입니다.
마리아 : 하지만 소공동체가 '복음화 하는 친교의 공동체'라고 하셨는데 복음화 하는 친교의 공동체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요.
신부님 : 네,먼저 현실을 보면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톨릭교회는 괄목할 만한 외형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우리의 삶은 복음정신에 따라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찾고 이웃을 향해가는 형제적인 공동체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리아 : 맞아요! 신부님,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신자들이 신자아닌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하셨는데.. 참,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성당에서는 형제님, 자매님 하는데 말만 그렇게 하는 것 같고요.
신부님 : 부끄러운 모습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교회 내, 외적인 어두운 상황들은 우리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쉬는 신자들에게는 어떻게 신앙의 활력을 불어넣을 것인가?'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이 사회를 어떻게 복음의 힘으로 역전시킬 것인가?' 등 한 마디로 복음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성찰이지요.
마리아 : 교구가 복음화을 10%를 지향하고 있잖아요? 전 선교하는 것이 곧 복음화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신부님 말씀을 들으니 복음화라는 말의 의미가 넓은 것 같은데요.
신부님 : 그렇습니다. 복음화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이지요. 그 사명은 세상에 나가 모든 이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19-20)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화란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을 위배되는 세상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하느님 뜻대로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교회의 모든 활동(현대의 복음선교 17-19항)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 그러니까 복음 말씀이 신자들에게는 세상살이에서 판단의 기준이 되고, 복음이 삶의 최고가치가 되고, 복음이 힘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때 복음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신부님 : 저보다 더 쉽게 잘 설명하시네요. 복음이 우리 삶에 힘을 주지 못한다면 신앙과 삶을 따로따로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도전 받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마리아 : 신부님한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데요. 맞아요. 신부님, 우리가 복음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면 복음화가 아니라 인간화(?)가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어두운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도 없을 거구요. 그러니까 반모임의 복음 나누기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오네요.
<신앙인의 사색>
1313 나눔 운동 - 이정구 시몬
미사 봉헌 때 1313나눔 저금통을 주님 앞에 바쳤다. 한 사람이 한 끼 100원씩을 넣어 한 달에 한 번씩 봉헌하는 이 운동에 동참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우리가 늘 먹는 밥,김치,된장,간장에 때로는 고기나 생선도 맛보면서 이런 것을 먹게 해주신, 그래서 우리가 힘을 얻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 은혜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는 쌀과 야채를 농사짓는 농민, 고기를 먹게 해주는 축산 농민, 험한 바다에 나가 힘겹게 어로작업을 하는 어민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을 마련해 주는 많은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다. 해서 밥을 먹을 때 손자 손녀들에게 이런 고마움을 늘 잊지 말 것을 깨우친다.
사실 우리도 50여 년 전에는 끼니 굶기가 예사였다. 6.25 한국전쟁 3년 동안은 물론이고 그 뒤로도 한참동안 먹을 것이 없어 굴뚝의 연기가 끊겼다. 그러다가 미국정부가 보내온 잉여양곡인 밀가루, 우유가루 따위로 연명하기도 한 것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당시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일곱 살의 나는 대구에 피난 갔다가 길거리에서 강제 모병 당해 군인으로 끌려가 최전방에 투입됐고, 집에는 60대 부모와 취학 전의 어린 동생 하나만 남아있었으니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우리 집 식구들이 생명을 연장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에서 나눠주는 옥수수죽이었다. 대흥동성당 왼쪽 모퉁이, 지금 어린이놀이터가 있는 자리에서 판잣집을 짓고 거기서 하루 한 번씩 옥수수죽을 나눠주는데 그걸 받으려고 모이는 사람들의 줄이 대전여중 앞을 지나 지금 중구청 앞 네거리 가까이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어려운 고비를 외국 교우들의 도움으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교구 60주년을 기념해 우리가 1313운동을 펼치게 된 것은 참으로 뜻이 깊다. 우리 가톨릭은 다른 종파들에 비해 사회복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우리 사는 세상 여기저기에는 도움의 손길이 아쉬운 분들이 아직 많다. 홀로 사는 나이드신 분들, 어른들과 헤어져 살고 있는 어린이들, 일자리가 없이 벌이가 끊긴 분들, 느닷없는 재앙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들, 살펴보면 우리가 마음 써야 할 분들이 참으로 많다.
이런 분들을 1313운동에 우리 교구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참여해 따뜻한 손길을 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좋을 것인가.
-대전가톨릭 문학회-
길을 갑니다.
그 길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집니다.
마지막 낡은 구두 벗어 털 때쯤
그 길을 뒤돌아봅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이충무의 행복나침반>
종에게 소리를 찾아준 눈송이처럼 사랑한다면...
종 위에 내리는 눈처럼 사랑하기
허공에 움직임없이 가만히 매달려 있는 종 하나, 그 종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흰 눈이 내려 종 위에 쌓입니다. 한쪽에 더 많이 쌓인 눈의 무게에 중심을 잃고 흔들린 종은 비로소 자신도 몰랐던 아름다은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종의 진동으로 흰 눈은 그만 대지 위로 떨어져 내리고 말죠.
조용히 다가와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일깨워주고, 어느새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난 그런 흰 눈 같은 사람 혹시 만나 본 적 있나요? 살면서 우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비유적으로 우리가 나무라고 한다면, 아마도 어떤 사람은 햇빛 같은 사람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빗줄기 같은 사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무를 휘감고 돌아나간 바람이었거나, 혹은 예고 없이 갑자기 나무로 떨어져 내린 벼락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냥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잎사귀만을 흔드는 그런 가벼움으로 스쳐 지나간 사람도 있고, 나무를 뿌리째 흔들어 놓은 그러한 무거움으로 왔다 간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내면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그 아름다움이 열매 맺도록 도와주는 그런 고마운 사람을 만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그래서 결국 우리 모습을 뒤틀린 나무의 모습으로 왜곡시키고, 그 푸르렀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 현실이죠. 우리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정작 우리가 하는 일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 아닐까요?
눈처럼 조용히 다가와,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인가를 일깨워주고, 종에 달라 붙어 종을 부식시키지 않고, 늘 그 아름다운 종소리가 변하지 않고 울릴 수 있도록 자신은 기꺼이 종에게 떨어져 내려가는 그런 하얀 눈송이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느껴 봅니다.
-이충무/극작가, 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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