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09년 주보

사순 제3주일 2009년 3월 15일(나해)

모든 2 2021. 9. 22. 01:24

「기도」, 심순화 카타리나

 

 

+ 요한 복음 2,13-25

 

<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말씀의 향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이재흠 프란치스코 정림동 보좌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축제인 해방절에는 근방 30km 이내의 모든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그 외의 유대인들도 가급적 참여하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북적댔겠는가. 그런데 이 성전에는 제물로 쓰일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치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전의 제관들과 모종의 계약을 통해 성전 안에서 버젓이 상행위를 할 수 있었고, 순수한 신앙심으로 해방절 축제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서 비싼 돈을 주고 제물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이익을 본 장사꾼들은 그 돈의 일부를 다시 성전 제관들에게 상납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오늘 예수님이 목격하신 성전은 바로 이런 추악하고, 더러운 모습이었다. 이에 그분은 불같이 역정을 내시며, 이 모든 더러움을 쫓아내신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 할 성전이 인간들의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략한 현실에 안타까워하시며 이런 성전이라면 차라리 허물어버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진정한 성전이란 바로 당신의 몸이라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다.

 

  우리는 이 성전 정화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정한 메시지는 바로 예수님의 몸이 진정한 성전이며, 거룩함 자체이듯 우리들의 몸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시어 이 세상에 파견하시며, 당신의 모습을 닮아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신다. 결국 우리의 모은 성령이 머무시는 집이고, 성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혹시 오늘 복음에 등장했던 사람들처럼 거룩한 우리의 몸인 성전을 온갖 인간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루로 전락시킨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채찍질을 하고 더러운 것들을 다 둘러엎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임기선 신부와 함께 하는 소공동체(6)>

 

친교의 공동체인 교회

 

  마리아 : 신부님, 지난 주에는 데레사 자매님댁을 방문했었는데요. 가족들이 서로 따뜻하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 주는 모습이 참 부러웠어요.

  신부님 : 그랬어요? 친교를 나누는 가정,공동체의 모습이 아름다웠군요.

  마리아 : 네, 신부님, 소공동체가 복음화 하는 친교의 공동체라고 하셨는데 교회의 모습도 데레사 자매님 가정처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인가?

  신부님 : 아주 훌륭한 지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에 교회헌장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말은 공동체와 친교입니다. 우선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공의회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려 하지 않으신다(교회헌장 9항)」고 가르치면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사람씩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백성으로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마리아 : 혼자만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천당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구원의 승리를 얻는다는 것을 마치 축구경기에서 구성원 모두가 함께 승리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신부님 : 맞습니다. 아주 훌륭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하느님께 가야합니다.

  마리아 : 데레사 자매님의 남편 이야기인데요. 데레사 자매님이 어느 날 "당신과 떨어져서 나혼자 천당에 갈 수 없다."고 했더니 남편이 "나도 죽은 다음 당신과 떨어질 수 없다"고 하면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데요.

  신부님 : 부럽네요.

  마리아 : 그런데 교회가 친교의 공동체라고 했는데 친교를 한마디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신부님 : 예, 공동체를 공동체다운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친교입니다. 그러므로 친교의 다양한 요소들, 즉 친밀한 인격적 만남과 사랑의 나눔, 일치 등은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지요. 반대로 공동체에 비인격적 만남과 불신, 무관심 등이 지배한다면 공동체라기보다 어떤 집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 : 친교의 공동체, 친밀한 인격적 만남을 이루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소공동체, 본당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신부님 :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의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완전한 친교로 온전히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적 삶을 이 세상에서 재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교회는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온전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친교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친교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 그러니까 친교가 빠진 교회 공동체, 즉 신뢰와 사랑, 인격적 만남 등이 없는 소공동체는 알맹이가 빠진 쭉정이 공동체 혹은  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신부님 :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에서는 잘 양성된 소공동체 봉사자들이 친교의 공동체인 아름다운 소공동체를 잘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마리아 : 아자! 아자!

 

 

<신앙인의 사색>

 

등산길의 무덤 -김금자 마리아

 

 토요일이면 집에서 20분쯤 걸리는 태조산을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오릅니다. 그런데 지난 주는 토요일에 친정어머니를 찾아 뵈러 성환엘 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주일에 집으로 돌아와 다시금 태조산으로 향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초입과 중간쯤 양지바른 곳에 무덤이 있습니다. 초입에 있는 무덤은 내가 산에서 5년 동안 생활체조를 산에 오는 사람들과 40분씩 했는데 그때 그곳까지 중풍으로 힘겹게 올라오셔서 나름대로 운동을 하시던 분의 것이고 중간에 있는 무덤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것입니다. 가끔 다리가 아프거나 날씨가 따뜻한 날이면 무덤가 잔디에 앉아 봅니다.

 

  푹신한 잔디 속에 누워 긴 잠의 여행을 하고 계신 분을 생각하며 때로는 얼마나 편할까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소변 주머니에 기저귀까지 차고 누워서 생활하고 계신 어머니가 건강하셨을 때 천주교 공원묘지에 모시고 간 일이 있습니다. 꽃이 화창하게 피어있는 그곳이 어머니의 눈에는 너무나 좋아 보이셨나 봅니다.

 "나도 이런 곳에 묻혔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도 편안하게 죽길 원하고 좋은 곳에 가서 묻히길 바랍니다. 수의도 값나가는 것으로 하고 무덤도 잘 가꾸어 주길 바라죠.

 

  그런 무덤에 자손들이 얼마 동안이나 찾아오게 될까요? 결국은 풀이 무성해지고 사람들의 발길에 봉분마저 사라지고 말겠죠. 그런 까닭으로 나는 수목장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정원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집 정원의 가장 사랑하는 나무 밑에 화장을 하여 재를 묻어 드리고 아니면 잘 다니는 산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 선택하여 가족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100년이 흐른 후엔 무덤도 지금의 공중전화처럼 되지 않을까 모르겠네요.

 

  산을 좋아하셨던 중풍환자의 무덤가에 앉아 친정어머니를 생각하고 훗날 나는 어떤 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될지.. 문득 얼마 전에 본 버킷리스트란 외국영화가 생각이 납니다. 억만장자와 정비공, 흑인과 백인, 돈은 많지만 행복하지 못했던 백인과 돈은 없지만, 화목하고 행복했던 흑인 정비사, 결국은 모두 죽어 눈 덮인 산 정상의 돌무덤 속에 영원히 잠들어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 가거늘 사는 동안 왜 그리도 복잡하고 힘들어야만 하는 건지.. 무덤가에 앉아 잔디를 쓰다듬으며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대전가톨릭 문학회-

 

 

느리게 느리게

걸어갑니다.

 

나를 이웃한 많은 것들에

소중히 관심을 두며

천천히 서둘러 걸어갑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

 

자신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함의 첫 걸음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우선 저 자신을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제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서

제 이웃을 사랑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을 사랑할 때

그것이 자만심이 아니라, 자부심이게 하소서.

 

자만심은 제가 다른 사람보다

더 위에 있음에 저 혼자 만족하는 마음이라면,

자부심은 저도 다른 사람처럼

다 함께 소중함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우선 제 가족을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제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서 제 이웃을 사랑하기란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가족을 사랑할 때 그것이 맹목이 아니라, 연민이게 하소서.

 

맹목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뺄셈이라면

연민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덧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먼저'는 순서일 뿐 해답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를 향한 기도가 나 홀로 끝나는 막다른 길이 아니라

너를 향해 달려가는 지름길임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소서.

 

-이충무/극작가, 건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