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09년 주보

연중 제6주일 2009년 2월 15일(나해)

모든 2 2021. 9. 21. 22:33

제공 : 노 모니카

 

+ 마르코 복음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말씀의 향기>

 

내가 "외디푸스 대왕"을 읽는 이유는 - 한동성 갈리스토 노인사목

 

  우리 삶을 이끄는 힘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지만, 우리는 때로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테베시에 기근이 들고 역병이 창궐하자 임금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이때 날아온 비보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혼인한 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임금은 당장 그자를 찾아내어 심판하려 하지만 결국 그 파렴치범이 임금 자신임이 밝혀진다. 그는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의 어리석었던 삶을 참회하고 장님이 된다. 희랍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대왕"이다. 세상엔 많은 비극과 슬픔이 있다. 개인적이건 사회 국가적이건 우리 모두는 외부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엔 우리 자신이 그 비극과 슬픔의 일차적인 책임자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매 미사 중에 고백한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내가 선택한 나의 인생이지만 내 안에 거짓된 어떤 것이 나를 선택해서 나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나는 진실하게 내 삶을 살아내기를 바랐으나,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 질투, 편견, 미움 등의 힘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고백이다. 진실한 고백이지만 왠지 씁쓸하다. 내 삶을 선택한 힘이 바로 내 삶의 어두운 일면들이기에 그러하다.

 

  한 나병 환자가 있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거침 없이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 1,40) 스승에게 자신의 몸과 영혼을 모두 맡기고 의탁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다. 당신의 손에, 당신의 의지에, 세상의 모든 일이 달려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심지어 나의 병과 영혼의 아픔까지도 당신께서 치유하실 수 있으시다는 고백이다. 아름답고 거룩한 고백이다. 이러한 굳은 신뢰는 기적같은 치유를 동반하게 된다. 그 사람 마음속의 빛이 그를 회복에로 이끄는 힘이 된 것이다. 그 빛에 대한 체험은 그를 예레미아의 고백에로 이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한번 뿐인 인생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임기선 신부와 함께 하는 소공동체(3)>

 

몸이 튼튼해야지

 

  마리아 : 신부님,지난 번 소공동체 모임에서 참 난감했어요.

  신부님 : 아,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마리아 : 글쎄, 한 자매님이 '소공동체도 본당의 한 단체인데 자기는 레지오 마리애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으니 앞으로 소공동체 모임은 참석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날 참 속상했어요.

  신부님 : 아하,그랬군요.

  마리아 : 그런데 제가 대답도 잘못하고 얼버무렸어요. 신부님, 소공동체도 교회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리고 소공동체가 본당의 단체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모르겠어요.

  신부님 : 음, 자매님, 지난 주에 봤던 나무가 생각나지요. 소공동체는 교회운동이 아니라 교회 그 자체입니다. 소공동체는 공소 혹은 작은 본당(지역교회)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것 같네요. 반면에 교회운동 혹은 단체들(꾸르실료, 레지오 마리에, 성가대, 연령회 등) 은 교회를 위한 것이고, 교회 안에서 봉사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운동이나 단체들은 교회(소공동체/본당/교구/보편교회)를 위한 성령의 특별한 선물(교회의 은사)로서 교회 안에서 봉사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마리아 : 아하, 그래서 지난주에 신부님께서 소공동체는 세례 받은 우리 모두가 소속되는 기초교회이고 교회운동이나 단체는 신자들이 선택적으로 가입하다는 말씀을 하셨군요.

  신부님 : 그렇습니다. 이젠 그 자매님에게 잘 설명할 수 있겠지요.?

  마리아 : 내 이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신부님, 조금 더 쉽게 소공동체와 단체와의 차이점을 설명주실 수 있나요?

  신부님 : 좋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소공동체, 본당, 교구, 보편교회)가 몸이라면 교회운동과 단체는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보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때때로 병들기도 하고 피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며 몸에 활력이 없겠지요. 이러한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보약이나 비타민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운동과 단체들입니다. 보약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몸에 필요한 보약을 먹어야 하듯이 교회는 교회에 활력을 주는 보약이라 할 수 있는 교회운동이나 단체를 식별하여 교회에 봉사하게 합니다.

  마리아 : 그럼, 우리가 교회운동이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은 마치 보약을 먹는 것과 같겠네요. 그렇다면 몸을 위해서, 몸이 힘들 때 보약을 머근 것이지 보약을 먹기 위해 몸이 있는 건 아니라는 말씀이죠?

  신부님 : 그러네요. 아래 표를 보시면 더 이해하기가 좋을 겁니다.

소공동체 교회운동 및 단체
교회의 성사(몸)이다 교회를 위한 은사(보약)이다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봉사한다
영구적이다 일시적이다
필수적이다 선택적이다
식별이 권위를 가진다 교회에  의해 식별된다
예수님에 의해 세워졌다 창설자에 의해 세워졌다

  마리아 : 와, 이렇게 하니까 이해하기가 쉽네요.

 

 

<신앙인의 사색>

 

노인들의 자식에 대한 가치관-이익환 바오로

 

  설을 지내면서 자식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설이면 앞 다투어 자식이 고향을 찾든지 아니면 부모가 자식이 사는 곳으로 가든지 하면서 전통의 명절을 보내기 위한 교통대란이 연례행사가 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유독 중국을 포함하여 우리나라가 그렇다고 한다. 자식이 부모를 찾을 때는 이미 부모는 노인이 되어 있기 마련인데, 관연 노인에게 자식은 어떤 가치관으로 다가올까 음미해 본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일반적으로 노인들에게 자식의 존재란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는 존재인 것 같다. 흔히 노인정이나 노인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자식에 대한 가치관이 노인들의 얘기 속 이슈로 떠오르기 마련인데, 최근 노인들 사이에서 자식의 존재가치를 아예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꽤 있다고들 하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예로, 노인에게 가장 중요한 5가지를 꼽는다면 과연 무엇으로 집약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우선 노인들에게는 일(事)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공감이 된다. 다음은 배우자(아내)가 중요하여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자식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건강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럼 그 다음인 네 번째는 역시 자식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그래도 돈(錢)이라고 말하는 노인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면 마지막 다섯 번째로 자식을 생각하는 것일까? 매우 회의적이다. 매일 같이 소일할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러면 노인에게 자식은 중요도에서 다섯 번째에도 들지 않는 위치일까?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데는 거의 공감을 하면서도 이를 무시하니 현실론에 너무 집착하는 노인들이 무심하기도 하여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하느님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생각도 이와 같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적어도 자식이란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와 버금가는 그러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주장하고 싶다. 성경에서도 제 몸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에페 5,28) 그리고 자녀와 부모에 대한 말씀, 즉 부모에게의 순종과 자식을 주님이 가르침으로 훈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에페 6,1-4) 다 중요함을 내재하는 성경구절이다. 나 역시 어릴 때의 유교식 가정교육에서  그 원인이 작용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식을 적어도 아내와 같은 반열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감히 다시 한 번 주장해 본다. 노인들의 주관적인 현실론에서 벗어나 보다 건전한 사회와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대전가톨릭 문학회-

 

 

 

계절과 계절

 

이 순간

당신의 호흡이 느껴집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문화 바이러스>

 

미네르바와 강호순

 

  미네르바가 잡혔다. 붙잡힌 사람은 물론 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이 아니라, "미네르바"라는 아이디로 인터넷 포털 다음의 토론 게시판 '아고라'에 경제에 관한 글을 올리던 인터넷 논객이다. 누리꾼들로부터 '얼굴없는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일컬어지던 그는 2008년 12월 29일 "정부가 주요 7대 금융기관 등에 달러 매수 금지 명령을 내렸다."라는 내용을 인터넷에 게시했다가 2009년 1월 7일에 긴급 체포되었다. 경제학자일 거라는, 외국 금융기관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을 거라는 등의 추측과는 달랐다. 그는 경제학을 공부하지도, 금융업계에서 근무한 적도 없는 30세의 무직자였다.

 

  강호순이 잡혔다. 군포여대생 살인범이다. 그를 잡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거은 CCTV다. 범행장소와 가까운 곳에 설치된 기기에 기록된 자료를 바탕으로 경찰은 마침내 혐의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단순살인범이 아닌 2008년 12월까지 일곱 명의 여성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으로 밝혀졌다. 그의 자백으로 미궁에 놓여 있던 많은 사건들이 해결되었다. 지난 연말에는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상대방의 핸드폰에 남아 있는 자신의 전화번호로 추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이 목숨을 구했다.

 

  핸드폰, 인터넷, 블로그, CCTV 등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기계문명의 이기와 함께, 그 이기 속에서 살고 있다. 잠시라도 핸드폰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인터넷 등의 가상공간 안에서의 삶이 현실의 삶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기계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삶은 이전에 비해 훨씬 편리해지거나 안전해진 것은 사실이다. 네트워크 안에서 현실이 나가 아닌 '나 아닌 나' 혹은 '또 다른 나'로 살아갈 수 있거나, 많은 범죄행위들을 CCTV나 핸드폰의 기록으로 찾아낼 수 있거나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에 종속되어 본래의 정체성이 사라지거나,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보여주었듯이 언제 어디서나 '빅 브라더'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감시의 세계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영인 [eisvogel@hanmail.net]

 

 

 

새롭게 사랑하는 기쁨으로

 

우리는 늘 행복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이 길에서

메마름을 적시는 자비의 마음,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손길이

더 많이 더 정성스럽게

빛을 밝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행복합니다

그래서 힘겨운 일들 우리에게 덮쳐와도

세상은 아직 아름답고 노래하렵니다

이웃은 사랑스럽고, 울도 소중하다고

겸허한 하늘빛 마음으로 노래하렵니다.

(후략)

이해인 수녀의 「사계절의 기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