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09년 주보

연중 제2주일(일치주간) 2009년 1월 18일(나해)

모든 2 2021. 9. 21. 11:07

카리타스 유통 1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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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35-42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카페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사도, 성 바오로(11)

 

심문과 압송, 그리고 죽음 -이재훈 세례자 요한 신부

 

  바오로에게 있어 최대 현안문제는 '로마의 통치 안에서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인종과 문화와 지역의 장벽을 넘어 하느님의 구원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며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려는 그의 의지가 죽음 직전 절정에 다다른다.

 

  예루살렘에서 카이사리아로 이송되어 온 바오로는 펠릭스 총독이 주관하는 법정에 선다. 유다인은 바오로를 흑사병 같은  자로서 모든 유다인에게 폭동을 선동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나자렛 분파의 괴수라고 몰아붙인다(사도 24,5-6 참조) 이에 대한 바오로의 변론은 명확하다. 우선 폭동 선동죄에 대한 그의 논증은 예루살렘에 올라온 열이틀이라는 짧은 기간에 성전에서나 회당에서나 시내에서 그가 어느 누구와 토론하거나 군중의 폭동을 주도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사도 24,11-12 참조) 또한 그가 성전에  들어간 것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고 나지르의 정결예식을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전 모독이라는 죄목도 터무늬없다는 것이다.(사도 24,11-12 참조) 그러면서 바오로는 자신이 고발당한 진짜 이유를 죽은 자들에 대한 부활 교리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힌다(사도 24,21 참조) 이 교리는 정통 유다교인 바리사이의 믿음으로써 유다교가 가르치고 있는 바였다. "나도 바로 저들이 품고 있는 것과 똑같은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있습니다.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모두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24,15)

 

  펠리스는 2년 동안이나 바오로를 카이사리아 감옥에 가두어 놓고 뇌물을 받을 욕심으로 자주 그들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눈다(사도 24,26 참조) 그러다가 페스투스에게 총독직을 물려주게 되자 유다인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바오로를 그대로 감금해 둔다(사도 24,27 참조) 페스투스 지하에서 유다인은 또 다시 확실한 증거 없이 바오로에게 무거운 죄목을 씌워 고발하는데 역시 유다인 율법과 성전과 황제를 거스르는 죄들이었다(사도 25,7-8 참조) 이어 페스투스에게 인사차 카이사리아에 들른 유다인의 마지막 왕이며 대사제의 임명권을 가진 자로서 유다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권위를 가지고 있던 아그리파스 앞에서 바오로는 또다시 변론한다(사도 26,2-23  참조) 그러나 곧 바오로가 무죄임을 인정한다(사도 26,31 참조) 바오로는 지방 총독들의 법정에서 올바른 판결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마 황제에게 직접 상소한다(사도 25,11 참조) 그래서 바오로는 카이사리아를 떠나 시돈, 리키아의 속주 미라, 크레타 섬의 라새아, 몰타 섬,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이탈리아의 레기움과 푸데올리를 거쳐 로마로 압송된다(사도 27,1-28,16 참조) 로마에서의 선교 이후, 바오로가 어떻게 죽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전승에 따르면 바오로는 로마 성벽 밖에서 참수되었다고 전하는데 그의 머리가 칼에 잘려 세 차례 구른 다음 멈추었고 그곳에서 세 개으 샘에 솟아났다 하여 '트레 폰타네'(The Fontane)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오로는 닥쳐오는 박해의 위협 앞에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에 전혀 무해한 종교로 인정받게 하고 싶었다. 그는 유다교가 로마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은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한 분파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유다교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도 양심을 존중하고, 유다인의 미풍양속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적어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믿음에 있어서도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 유다교의 가장 엄격한 바리사이들과도 일치했다. 따라서 로마제국은 유다교에 허락한 종교의 자유를 유다교의 한 분파인 그리스도교에게도 허락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유다인이 제국 곳곳에서 자신들을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분리시키고 그리스도인을 로마의 안녕과 평화를 해치는 범법사로 고발함으로써 로마의 박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2 코닐 12,10, 1 코닌 15,10 참조)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숨기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두었던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그는 시대와 민족을 초월한 신앙의 영웅이 되었다. 진정한 영웅이란 세상 사람들에게는 좌절이나 연약함과 거리가 먼 강한 자의 모습으로 드러나겠지만 자신에게는 인간적 약점과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하느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힘겹게 쌓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신앙인의 사색>

 

일상의 순수 -김미영 아녜스

 

  지하철을 타면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너무 가까이 느껴져 어떻게 시선을 처리해야 좋을지 당혹스러운 때가 있다. 그래서 긴 거리를 나란히 가거나 남자들이 여러 명 있으면 되도록 눈길을 피한다. 그런데 그 날은 그렇지 않았다. 초로의 남자 셋이 어찌나 정겹게 대화를 하는지 부러운 마음으로 눈을 감은 양 하고서는 실눈으로 훔쳐 보았다. 남성의 미소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놀라워하는 동안 그들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적셨다. 그들은 어린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조금 전에 경기를 끝냈을 터인데 결과가 몹시 궁금하다면 말을 주고받았다. 가운데에 앉은 사람이 결과를 알아보겠다며 핸드폰을 들자 나도 덩달아 궁금해졌다. 그 사람은 더욱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직하게 "그렇구나, 그렇구나, "를 연발하더니 '안타깝게도 실수를 했다는구먼, 점수 차이도 적지 않고."라고 말했다. 그들의 뒷이야기가 그저 그러려니 생각했던 나는 그 다음 이야기에 급기야 눈을 번쩍 떴다. "우리가 너무 부담감을 주었나 보네요." "그런가 봐요." "왜 안 그렇겠어요. 그 어린 마음이.. "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들의 표정에서 꽃말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 그들이 내게 준 교훈을 되새겨보는 동안 지난여름 내내 기쁨을 주었던 꽃들이 생각났다. 채송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얼마나 기뻐했던가, 작다는 생각도 줄기가 볼품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또 해바라기를 보면서 멀거나 키만 껑충하다거나 얼굴이 너무 크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채송화는 아기자기하게 아름답고 해바라기는 시원시원하게 아름다워 마음이 끌렸을 뿐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젊은이에게나 있을 법한 독백을 나는 거울 앞에 서서 거룩한 울림으로 온 천하에 선포했다.

 

  내 영이 기꺼워하며 하느님의 창조의 손길을 감지하는 순간 하느님의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요한 4,23)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소리 없는 덕담을 주셨다. '내가 너희를 완전하게 만들었으니, 너희는 서로 축하해주고 사랑해주어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가슴 떨리게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복되게 하는 누룩이 아닐까?

 

  저녁 무렵 그 어린 선수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허참, 오늘은 시작할 때 성호를 안 긋고 해서 걱정이 되더니만, " 남편 역시 향기로운 꽃이었다. 다시는 편견을 갖지 말자. 모든 이가 사랑스럽게 피어 있음을 영원히 기억해야 하리, 나 또한 순수한 꽃이 되어.

 

-대전가톨릭 문학회-

 

 

 

 

아버지

아직 제 손이 따뜻한가요?

 

그럼

이 손이 식기전에

놓지 말아 주세요

 

사랑합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문화 바이러스>

 

다름

 

  "지빠귀들은 검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그런데 어느 날 파랑지빠귀 한 마리가 텔레비전 안테나 위에 앉아 있었니다. 그녀는 먼 지역, 지빠귀들이 파란 곳에서 왔습니다. / 어떤 검정지빠귀 총각이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져서,자기 아내가 되어달라고 청혼을 했습니다. 그들은 보금자리를 꾸몄고, 검정지빠귀 남편이 번갈아서 먹이를 가져오거나 그녀를 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동안,파랑지바귀 아내는 그들의 알들을 품었습니다. /남편이 벌레잡이를 나간 언젠가, 몇몇 검정지빠귀들이 와서 파랑지빠귀를 보금자리에서 끌어내고 그녀가 품고 있던 알들을 바닥에 던져 깨뜨렸습니다. /"도대체 왜?" 돌아와 그것을 본 남편이 절망적으로 물었습니다. /"우리 지빠귀들은 까맣거든, " 검정 지빠귀들은 그렇게 말하고,파랑지빠귀를 쳐다보며 그들의 노란 주둥이를 삐쭉거렸습니다. "(프란츠 홀러,「파랑 지빠귀」/Franz Hohler: " Die blaue Amsel", In: Die blaue Amsel. Munchen: Luchterhand 1995, S.94)

 

  '다르다'는 것은 '같지 않다'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이 동일한 것이 아닌, 구별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혼동해서 사용하는 단어로 '틀리다'는 말이 있다. '틀리다'는 '맞지 않다'라는 말이다. 서로 어그러져 맞지 않거나, 바른 점에서 어긋난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구별된다'라는 뜻의 '다르다'를 옳고 그름을 가르는 '틀리다'로 쓰는 것은 '틀린'어법이다. 안타까운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잘못 받아들이고, 그에 반응하는 것이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국적이 다른 사람들, 종교가 다른 사람들,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그 외에도 가지고 있는 재화 힘, 관심사 등이 다른 사람들끼리 가르고 나누고, 그들끼리 뭉쳐서 그들과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배척하는 것.

 

  2009년, 새해가 시작된 지 벌서 열흘이 넘게 지나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와는 분명 다른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가르고 나누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해,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영인 [eisvoge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