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09년 주보

주님 공현 대축일 2009년 1월 4일(나해)

모든 2 2021. 9. 21. 05:04

 

+ 마태오 복음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말씀의 향기>

 

"빛이 생겨라" -송우진 베드로 천안성정동 보좌

 

  창세기의 1장과 2장은 창조사 이야기입니다. 특히 "빛이 생겨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세상을 가꾸어 나가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많은 것들을 묵상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렇다면 "빛이 생겨라"는 하느님의 이 말씀을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바라시는 소망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어둠이 아닌 "빛"이 생기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명령하고 계시고, 그 빛으로 모든 믿는 이들이 풍성해지길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빛의 사람이 되길, 매일 아침 새로운 태양을 창조하시며 우리들 각자도 재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빛을 통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차별된 삶으로 나아가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는 데 힘쓸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산상설교 5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빛이 하는 역할은 자신의 빛으로 주변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빛이 생겨라"는 하느님의 창조 말씀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게 비추는 일입니다. 따라서 2009년 한 해를 시작하며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일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우리 안에 "빛이 생길 수 있도록 우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전례에서도 강조되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공현은 말 그대로 드러내 보이심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빛이 아니었다면 결코 주님은 드러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라 불리는 우리들이 그 명성에 맞갖도록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허울좋고 이름뿐인 빛의 자녀가 아닌, 참 빛을 통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신앙인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모두를 재창조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빛이 생겨라!"

 

 

이방인의 구원를 위한 사도, 성 바오로(10)

 

예루살렘의 방문과 체포당함 - 이재훈 세례자요한 신부

 

  3차 선교여행의 종착지가 되었을 안티오키아에 이르기 전, 바오로는 체포와 구금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선다. 죽음이 뻔히 눈앞에 보이는 데도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이 유다인과 로마제국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갈등 상황 안에서 바오로가 그리스도교를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알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한다(사도 1,15: 2,41: 4,4: 21,20 참조) 이에 반해 야고보는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바오로를 비방하고 나선다고 전한다. "당신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모세를 배신하라고 가르치면서 자식들에게 할례를 베풀지도 말고 우리 관습을 따르지도 말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그들이 들었습니다."(사도 21,21) 그래서 바오로는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난한 나지르인 네 명의 정결 예식에 드는 제물 비용을 대고 자신도 그들과 함께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사도 21,24-26): 민수 5,2-5: 13,21 참조) 유다 계 그리스도인의 불만을 잠재운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비그리스도교 유다인은 바오로가 이번에는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고 하며 오해한다.(사도 21,28-29 참조) 원래 이방인은 예루살렘 성전 안뜰에 들어올 수 없도록 되어 있었고, 이것을 어기는 사람은 돌로 쳐 죽여도 무방했던 것이다. 곧이어 바오로는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우리 백성(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이 성전을 거슬러 가르치는 사람"(사도 32,28)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고, 소등에 휘말린다. 이때 성전의 파견 대장인 천부장은 즉시 군인을 보내어 바오로를 쇠사슬로 묶어 체포한다(사도 21,32-33 참조)

 

  끌려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는지 변호하기 시작한다.(사도 22장) 바오로가 전개한 이방인 선교는 이방인이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을 준수할 의무도 없으며,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경신례에도 참석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아가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다는 유다교의 선민주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방인 선교는 그 자체로 율법과 성전과 백성에 대한 도전 또는 모독으로 충분히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회에 출두하게 된 바오로는 자신을 두고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사도 23,1) 라고 간단히 소개한다. 그러면서 최고의회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과 천사의 존재를 믿고 있는 바리사이들과 그것들을 부인하는 사두가이들로 양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사도 23,6) 바오로는 굳이 예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고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만 언급함으로써 의회는 격렬한 토론에 말려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 몇 사람이 강력히 항의하며 바오로 편을 들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사도 23,9) 이로써 예수님의 부활은 유다교 신앙에 위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 가능성을 입증해주는 셈이 되었다. 처음에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했던 로마의 관리 천부장은 이 일이 로마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다교 내부의 종교적 문제라는 사실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과연 로마의 정치권력 앞에서 무해한 종교로 인정받는 유다교에 속하느냐 아니면 유다교와 상관없는 위험한 종교인가?" 바오로는 어떤 박해에도 불구하고 유다교와 로마의 정치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기 위한 호교론자였다. 핵심교리가 유다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고,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한 분파로써 로마제국의 정치권력 앞에서 유다교처럼 "합법적으로 허락된 종교"(테르툴리아누스, 호교론 21,1)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에 주력했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러했듯, 현대사회 안에서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 정의롭고 일치되는 생명력으로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신앙인의 사색>

 

내 안에 있는 에덴  - 김미영 아네스

 

  '내가 바로 에덴이다.'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창세기의 두 나무로 인해 끊임없이 갈등하는 내게 예수님께서 지금도 성실히 말씀을 선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나는 에덴의 두 나무에게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생명의 나무는 "하느님 뜻의 나무" 혹은 "사랑의 나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내 뜻의 나무"또는 "경쟁의 나무"라고 부른다. 다소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구분을 하면서까지 내가 하느님의 뜻에 부쩍 마음을 쏟게 된 것은 루이사 피카레타를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하느님 뜻의 작은 딸'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1947년 8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64년 동안 산 제물로 살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으며, 유일한 음시은 자기 방에서 기행된 미사에서 영한 성체뿐이었다. 예수님의 명령으로 40여 권의 책을 썼는데,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원작인 「수난의 시간들」도 그 중 하나이다. 현재 시복 조사 중인 루이사의 삶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순명이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본이라 하겠다. 산 제물을 필요로 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에 완전한 자유의지로 동의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워, 나는 잔잔한 감동과 더불어 매일 그녀의 책을 두세 쪽씩 읽는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소유하고자 갈망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가!

 

  오랜 시간 교회활동을 해 왔지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느님과 함께 그 일을 했는가에 주목하기보다는 하느님은 문제 삼지 않는 것들을 검증하려하거나 사람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한 때가 대다수였다. 인간의 삶이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의 뜻으로 엮어가는 창조적 작업이라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새해에는 하느님의 뜻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나를 만드신 그분께 창조의 기쁨을 되돌려 드리고 싶다. 매일매일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물로 주어지는 내 안의 에덴에서 생명의 나무를 지고 뚜벅뚜벅 걷다 보면 언젠가는 내 등에도 사랑의 십자가가 아로새겨질 것이다. 버림과 따름을 가르쳐주신 분이 힘이 되어 주시리라 믿으며 내 뜻의 나무에는 한 모금의 물도 주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대전가톨릭 문학회-

 

 

 

새해에는

맑고 투명하여

싸우지 않고 국민을 위하며,

서로 이웃을 염려하여

밝은 웃음이 넘쳐나기를

꿈꾸어 봅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이충무의 행복나침반>

 

착한 얼굴과 이기적 얼굴

 

 

  "혹시 당신의 얼굴은 착한가요? 아니면, 이기적인가요?"  이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없다면 긴장하셔야 합니다. 왜냐면, 자칫 당신은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분류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착한 얼굴은 '얼짱', 이기적 얼굴은 '얼꽝'을 의미한다는 것을(설마 얼짱과 얼꽝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진 않겠지요?)

 

  어디 얼굴뿐입니까? 몸매에도 착한 몸매가 있고 이기적 몸매가 있다는 군요. 만약 당신이 잘 생기지도 않았고, 거기다 몸매까지 S라인이 아니라면, 함부로 귀여운 표정을 짓진 마세요. 그랬다간, 이번엔 '몹쓸'이라는 말까지 자동으로 따라오니까요.

 

  이게 다 무슨 소리냐구요?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유행어 이야기입니다. 이젠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거리낌 없이 '착한'과 '이기적' 혹은 '몹쓸'이라는 단어를 종종 얼굴과 몸매에 적용해 사용합니다. 젊은이들은 아무 주저 없이 사람 면전에서 '착한'얼굴과 '이기적'얼굴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들 말대로 '쿨' 하게 농담을 즐깁니다.

 

  근데 왜 전 '쿨'하지 않고 이렇게 기분이 쓸쓸하죠? 사람 외모를 그런 방식으로 나누는 과감한 농담이 제겐 왜 섬뜩하기조차 할까요? 우리의 생김새는 그저 하느님이 주신 저마다의 선물일 뿐 인대, 그걸 '착한'과 '이기적'이라는 잣대로 함부로 나누는 경박함이 혹시 사람 속보다 겉만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허영심을 더 부추기는 건 아닐까요? 진짜 착한 마음은 이기적 얼굴이라는 경박한 꼬리표에 가리지고, 진짜 이기적인 마음은 착한 얼굴이라는 찬사 속에서 은폐되는 공허한 술래잡기가 더 이상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가 되어 살 좀 빼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배에 왕(王) 자가 새겨지는 그 날이 되면 남들이 저를 착하다 할까요? 새해엔 그 어느 때보다도, 새나라의 어린이였던 그때보다도, 더 착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운동에 전념해 볼 셈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실래요?

 

 

 

별이 되게 하소서/이해인 수녀

 

예수님

부를수록 새로운 당신의 그 이름만이

언제나 우리의 별이 되게 하소서

이제 당신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오셨으니

당신이 오신 날은 우리의 생일이며

새해 첫날의 설레임인 것을

오늘은 더욱 마음으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