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들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비옵니다.
-오늘 '복음환호송'-
「연옥에 가신 예수님」Andrea Da Firenze,1365-1368
+ 루카복음 20,27-38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참여할 자격도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죽음 후의 생명 -이창덕 마르코 대흥동 주임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저 세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지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 희망을 내거는 예수님의 말씀에 교활한 지혜를 발휘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신명 25,5)에 의하며 남편이 자식 없이 죽으면, 아내는 자기 남편의 형제와 결혼을 해서 대를 이어야 한다. 한 여자가 그렇게 일곱 번이나 남편 형제와 결혼하고 죽으면, 저 세상에서 그 여자의 남편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저 세상에 항상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예수님을 가소로운 인간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 세상은 실재하지만 이 세상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대답하신다. 이 세상의 인간적 관계를 저 세상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의 규범으로 하느님 나라를 측정할 수 없고, 인간의 정신 규범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판단할 수 없다. 저 세상의 문제는 인생을 가꾸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저 세상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할 일이란, 우리 삶을 가능한 아름답게 꾸미고, 관능적이고 본성적인 감성을 여과할 필요도 없이 그저 즐기면 될 것이다. 저 세상에 대한 희망은 하나의 환상이며 고통스런 낙담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저 세상이 있다면, 인간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 세상은 저 세상을 위한 준비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도 항상 높은 곳, 미래의 생명을 향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 생애가 초지상적 생명을 믿느냐, 혹은 믿지 않느냐에 따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게 된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저 세상의 실재를 증거하기 위해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역설하신다.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하셨는데, 이 생명을 다시 죽음 속으로 떨어지게 놓아 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이다. 그 근거로 성경을 인용하신다. 성경에서 저 세상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에 저 세상은 실재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죽은 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시니어 칼럼>
노년기의 의료보장 제도의 필요성 - 한동성 갈리스토 . 노인 사목부 전담 신부
의료보장이란 국민 개인이 한 시민으로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도록 국가가 개입, 보장해주는 제도이다. 이는 의식주를 포함한 최소한의 생활보장과 함께 사회적 권리로 인정되어 현대 복지국가의 핵심적인 사회보장 프로그램으로 제도화 되고 있다. 임금 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위하여 시작된 의료보장 프로그램은 퇴직자의 건강관리와 노년인구의 급증으로 선진 산업사회에서부터 제도화 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보건 사회 연구원은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년들 중 한 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년은 저체 노년인구의 90.9%이고 두 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년은 70% 이상으로 나타났다. 만성질환은 연령이 많을수록 증가하였다.(한국 보건사회 연구원. 2004) 이로 인한 비용 발생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02년에 65세 이상 노년인구가 사용한 건강보험료는 19.3%였으나 지난 해에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노년들이 전체 보험료의 30%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노년기에 더 많은 의료혜택이 필요함을 전해준다.
의료 보장의 필요성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건강은 개인 생활에 있어서 자신을 유지하고 사회적 생활에 있어서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할 뿐 아니라 사회 심리적 면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향상 시킨다. 국민의 건강과 높은 삶의 질은 국가가 개인에게 보장해 주어야하는 중요한 의무이고 개인의 권리로써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갑작스런 사고와 잦은 질병, 이에 따른 고액의 의료비 부담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이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노인은 유병률이 높고, 대부분 질병이 만성적이며 합병적인 경우가 많아 장기적인 치료와 요양을 요한다. 이에 따른 많은 의료비 부담을 안고 있다. 노년기엔 더 많은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하지만 수입이 전무한 상태에서 의료비의 개인적인 해결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개입 필요성이 절실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비 부담체계는 다소 모순적이다. 의료비 부당에 있어서 가구수가 여성, 노인, 교육 수준이 낮을 때, 배우자가 없을 때, 주관적 건강상태가 좋지 않을 때 및 가구의 소득수준이 낮은 경우, 가구원 중 만성질환자가 있는 경우 의료비 부담이 높았다. 특히 소득이 낮으면서 의료급여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차상위계층의 의료비 부담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손수인, 2010)
셋째, 예측불허의 사고에 대한 의료비 부담을 사적이고 상업적인 보험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일부 노인인구에만 가능하다. 의료비 서비스의 필요성이 다른 연령집단에 비하여 빈번히 요청되며, 또한 진료비가 고액으로 요청되는 노인 인구의 보험가입은 보험료를 계속 상승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하며, 일부 제한된 인구의 위험분산 또한 보험료의 부담을 더욱 크게 만들게 된다. 그러므로 위험부담을 보다 많은 인구에게 분산, 부담시키는 의미에서도 국가의 개입에 의한 강제적 보험 등의 필요성이 크게 요청된다.
넷째, 건강유지는 노년들 개개인의 생활 만족감을 향상시키고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적 조직망에로의 통합, 즉 가족 집단, 친족 및 근린 집단, 지역사회, 나아가서는 국가사회전체로의 통합을 촉진 시킨다. 이는 미국과 한국의 노년들에게도 잘 입증되고 있다.(Larson,1980, 최성재, 1984)
* 노년들의 기본적인 일상생활수행능력(Activites of Daily Living)은 옷 입기, 세수하기, 양치하기, 목욕하기, 식사하기, 화장실 사용하기 등이 있고 이 중 가장 어려운 일이 목욕하기이다. 수단적 일상생활 수해 능력(Instrumental Activities of Daily Living)으로는 몸단장하기, 식사 준비, 빨래하기, 근거리 외출하기, 물건 사러가기,전화 사용하기, 약 챙겨 먹기, 금전 관리하기이다. 이 중 금전 관리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 마당>
"초대받은 사람들"을 보고나서 - 박순하 율리아 . 대화동 성당
파란 하늘과 황금들녘,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가을에 매주 목요일마다 2시간씩 5주라는 기산에 걸친 순교영성교육에 초대받았다.
5주 동안 10까지의 교육에 졸리면 어떡하나 했던 염려는 나의 기우였다. 2시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강사 신부님의 구수한 사투리의 타임머신을 타고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의 공동체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갔다. 교재와 시청각 자료로 내포 교회사를 배우니, 충청도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축복받은 일인지 그저 감사했다.
3주째는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영화 감상의 시간이었는데 조금 늦게 성당에 도착하여 보니 영화는 이미 시작하였다. 80년대쯤에 제작했음직한 영화로 소리도 울려서 정확하게 들리지 않고 출연 배우들도 지금은 나이가 들었거나 이 세상에 없는 배우가 나오는, 말하자면 구닥다리 영화였다. 뭐야 하면서 웃음이 나왔음에도 앉아서 진지하게들 보고 있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의 공동체 중심의 삶의 모습과 사제가 없는 이 땅에 신부들 영입해오기 위해 박해를 받으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까지 내어 던지는 순교자들의 역동적인 살을 그린 영화였다. 정하상바오로 성인과 동생,최양업 신부님의 부모님과 동생들의 박해,주님을 모른다고 한다미만 하면 동생들의 박해,주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끝까지 주님께 감사하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장엄했다. "장하다 순교자~" 성가가 절로 맨돌았다. 인간의 힘으로 견디어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 구닥다리 영화는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는 훌륭하고 근사한 초대장인 생각을 하니 처음에 웃었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죄스러워졌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이시대에 나를 박해하는 이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한다. 무관심, 탐욕, 나태함 등 유혹을 극복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순교라고 강사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순간 순간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입으로만 외우던 103위 순교성인 호칭기도도 이제부터는 정성껏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주에 있는 도보 성지순례에서는 순교성인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함께하고 싶다.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성을 위해서라도 기도해야겠다.
성령이여 저를 새로나게 하시어 더 굳세어지게 하시고 순교성인들께서 마련하신 은총을 받아 누리고 제 마음에 그 분들의 열정과 감사할 줄 하는 마음을 허락해주소서.
또한 저희 대화동 공동체 모두가 각자의 자리를 충실하게 지키어 본당에서 마련하는 여러 교육, 행사를 통해 천국으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여 순교의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말씀으로 힘을 얻고 말씀을 통해 위로 받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가을의 풍경처럼 아름다운 하모니로 주님을 찬미하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아멘!
길섶
한 옆으로 떨어진
낙엽을
기어가는
내 영혼의 달팽이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
파란 하늘에 일기 쓰고 싶습니다. 투명한 영혼을 위해...
파란 일기장
얼마 전이었던가요? '빨간 일기장'이라는 것이 한때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온통 빨간색 바탕에 피가 흐르는 것 같은 그래픽으로 처리된 섬뜩한 표지 글씨,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하며 이용하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는 이 일기장이 없어서 못 파는 인기상품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일본 영화 '데쓰 노트'(Death Note)를 패러디해 만들어진 이 일기장은 일종의 '저주 상품'인 셈입니다. 노트에 이름을 적으면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죽는다는 영화 내용처럼, 이 일기장에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에게 결국 끔찍한 고통의 형벌이 내려질 것이라는 기대가 이 일기장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려놓은 셈이죠.
그런데, 영화에서처럼 단순히 이름만 적으면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기장에는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내릴 다양한 방법들이 일종의 게임처럼 소개되고 있었던 거죠. 사람 모습의 그림에 빨간 점으로 찌르고 싶은 부위를 표시하도록 하고,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변심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심지어 나를 꾸짖은 선생님을 향해 온갖 증오감을 마음껏 강하게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갖가지 아이템들이 마련되어 있어 정말 섬뜩합니다.
자기반성의 기록이었던 일기가 어쩌다 저주의 기록장이 되었을까요? 복수와 분노의 날카로운 칼날이 용서와 사랑의 햇살보다 더 효율적인 무기라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 빨간 일기장, 상대를 사랑하기보다 쓰러뜨리는 법을 먼저 체득해가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오늘 우리 어른들의 자화상을 발견합니다.
순수한 동심을 증오와 파괴의 붉은 책으로 온통 물들이는 빨간 일기장이 파란 일기장으로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반성과 용서라는 기록으로 가득 찬 맑고 투명한 가을 하늘을 닮은 그런 아름다운 일기장으로 말입니다.
-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10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주간) 2010년 11월 21일(다해) (0) | 2021.09.14 |
---|---|
연중 제33주일 (평신도 주일) 2010년 11월 14일(다해) (0) | 2021.09.13 |
연중 제31주일 2010년 10월 31일(다해) (0) | 2021.09.13 |
연중 제30주일(전교주일) 2010년 10월 24일(다해) (0) | 2021.09.13 |
연중 제29주일 2010년 10월 17일(나해) (0) | 2021.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