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성당 은포리공소
충청남도 보령시 외평길 133-66(주교면 은포리 421)
+ 마르코 복음 8,27-35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말씀의 향기>
징징대는 삶과 당당한 삶 - 정호영 로베르토 궁동 주임
오늘 복음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라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본 베드로 사도는 놀라운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특별한 은총을 받은 분이지만 예수님을 영광의 메시아가 아닌 수난하는 메시아로는 상상하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의 신비를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예수님께 다가가는 데 걸림돌이 되어왔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매력적인 예수님이시지만, 동시에 십자가에 대한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집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내 삶에 수없이 밀려오는 힘든 일들과 어려운 난제들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일들은 내가 망설이든 말든 언제나 부닥치며 살아가야 하는 일들입니다. 이 일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즉 십자가를 회피할 것인가, 십자가를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감당해야 하는가 하면서 징징대는 삶을 살 수도 있고, 당당하게 그 짐을 짊어지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리를 다쳐서 입원한 사람이 한편으로는 먹고 살기도 바쁜데 다리까지 다쳐서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내가 너무 열심히 사는 모습에 하느님께서 쉬라고 하신 것이라면서 감사하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징징대면서 대하기도 하고, 반대로 당당한 태도를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당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자신의 인생살이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너무 부분적인, 바로 앞일만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누구나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비슷한 삶을 삽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젊은 시절 매우 투쟁적인 삶으로 고군분투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최고의 명예를 쟁취하는데, 그 말년을 보면 최고의 명예만큼이나 반대급부의 비난과 수모를 겪는 듯합니다. 힘든 일과 좋은 일이 서로 적당한 크기로 상쇄되는 모양새여서 내 인생만 특별히 모진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나날이 다가오는 어려움들에 대하여 "나한테 왜 이런 일이"라고 하며 귀찮아하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의 넘어야 할 고갯마루를 지나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가는 길이라 생각하는 태도라고 보여집니다. 내게 다가오는 십자가들을 하나하나 극복하다 보면 어느새 하느님의 길에 동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편견' VS '진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머리에 맺힌 단어들이 있었다. '오만과 편견'이다.
이 두 단어가 가진 의미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둘 중 하나의 모습을 가졌다고 한다면 아마 좋은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다. 물론 둘을 가진 사람은...
우리가 '오만'하게 살기는 힘들지만(?), '편견'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은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살기 힘든 '오만'함보다 '편견'의 삶을 생각해 보려 한다.
'편견'이라 함은,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를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만드는 요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요인을 두 가지로 살펴볼까 한다.
첫째, 자신의 기준으로 인해 생기는 경우이다. 자신이 가지게 되는 기준은, 살아가면서 직접 배우고 경험한 것에 의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배움과 경험은 자신이 처한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자기 뜻을 전할 때, 같은 환경과 조건, 입장을 가진 이들에게는 쉬울지 모르지만, 다른 환경과 조건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야 한다. 즉,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의 주장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강요가 아닌 동의를 구하는 다양한 방식을 택해야 한다. 나 자신도 일방적인 주장을 해온 경험이 있었기에,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방법을 선택하려 노력한다. 때론, 내 주장이 틀릴 수 있다는 것도 전제해야 할 것이다.
둘째, 타인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아는 이들에게 얻은 정보로 어떠한 사람이나 사건을 쉽게 판단하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 경우 전해지는 정보가 오염되었다면, 잘못된 시선을 갖게 되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아마 살면서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상한(?) 소문을 들어본 경우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오염된 정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나 역시 주변에서 "누가 그렇더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 정말 그래, 그렇구나."라고 금방 인정해 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하지 않으려 한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정말이야? 확인해 봤어? 직접 물어봤어?"라고 되묻는다. 왜 내가 그렇게 물을까? 바로 잘못된 정보로 괜한 사람을 오해하는 '편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말을 전할 때는 더욱 조심스러워져서 최대한 사실을 전제로 말을 하려 한다.
이러한 '편견'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게 한다. 나와 가족을, 나와 친구를, 나와 이웃을 가른다. 이런 갈림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말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편견'을 만들어가는 요인들을 멀리하고 언제나 '진실'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주변의 이들과 화해와 일치를 이뤄나가야 하겠다.
-권지훈 베드로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교회와 나' 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1>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이해 1. ① -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관점
지난 회에 평신도의 개념과 역사적 발전을 살피면서 중세에 절정에 달했던 성직자와 평신도의 대립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을 보았다. 바로 그 바탕 위에서 이 공의회가 개최된 걸 생각하면, 교회의 변화는 분명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뤄내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종전까지의 평신도의 무능화, 무력화(無力化)를 비판하고, 무엇보다 평신도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평신도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들었다. 곧, 이 그리스도와의 결합에 근거하여 평신도의 본질과 사명을 체계적으로 재평가한 것이다.
공의회에서는 구체적으로 '평신도'개념이 반(反) 성직자 개념으로 들린다는 이유로 '신자'로 대체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품 받은 직무자나 축성된 수도자가 아닌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에게 비성직자로 구분되는 평-신도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평-신도든 주교와 교황을 포함한 성직자든 모든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 한 '신앙인', 신자라는 것이다. 신앙인 안에 성직자 아닌 신자를 새로운 신분으로, 곧 '평신도'로 구분하여 계급의식을 심는 것은 하느님 백성 개념에 맞지 않다. 더구나 이때 평신도를 위해 사용된 라오스는 본래 성직자까지를 다 포함한 단어였음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가 아니 '신자'개념의 보편화가 교회 안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이제민)
공의회 이후에도 한동안-지금도 -평신도와 직무자(성직자)를 신학적으로 구분하고, 각자의 그리스도교 사명을 나누어 생가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공의회의 근본정신에서 볼 때 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회와 함께 교계제도와 평신도, 교회의 안과 밖,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적 구분은 근원적으로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와 견진을 통해 똑같이 하느님 백성인 교회와 교회 사명의 주체가 되었다고 강조한다.(교회헌장 33항) 그러므로 평신도는 교회와 구분되는 세속적인 삶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들의 소명을 완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처럼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한 직무'에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환기하면서 이 소명이 특히 사회적 직업(일)을 가지고 일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수행된다고 주장함으로써 평신도의 소명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소명을 교회 안의 어떤 특수 직분의 일로 보는 것은 재고해야 할 일이다. 곧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근본적인 평등성이 교회의 일반적 의식으로 일깨워지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형제자매적 사랑의 관계가 실제로, 실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교회 안의 평신도 문제는 더 이상 신분 문제가 아니라, 교회론적 중심(핵심) 문제이며, 엄청난 교의(학)적, 사목적 그리고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교회 자체의 존재냐 아니면 비-존재냐의 문제, 곧 교회의 실존의 문제인 것이다(E.Klinger).
-서명옥 로사(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 교구내 공소 대천성당 은포리공소 은포리의 첫 신자는 김영진안드레아,심신민 베로니카 부부로 1944년 대천읍내에서 은포리로 이사하면서 전교가 시작되었다. 공소 설립은 교세통계표에 의하면 1955년 경으로 파악되며 김 안드레아 회장집에서 공소예절을 가졌다. 이때 31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 후 1961년 강당과 부속실 (방2개)이 있는 한식목구조(17평)공소를 건축하였다. 현재의 공소건물은 김동수 방지거 회장 재임시기인 1994년 착공,준공하여 11월 27일 경 요셉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 봉헌되었다. 건축공사비는 건축과 내부비품을 합하여 7천만원이 소요되었으며 공소, 본당,서울 모본당에서 모금되었다. 2006년에 부속실을 증축하였고, 현재 25세대 35여명이 정기적인 전례에 참례하고 있다. |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16)>
가을은 청소의 계절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잘 몰랐던 것에 대해 새롭게 알아간다는 일만큼 언제나 사람을 활기차게 만드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 나온 책 몇 권을 주문하면서 벌써 마음에 생기가 돕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이내 찜찜함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책상 위에 책을 쌓아 두고 며칠을 바쁘게 보내고 나니, 구입해 놓고 아직 손도 못 댄 책도 많은데 괜히 욕심만 잔뜩 부린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이럴 때 제게 힘이 되어 주는 말 하나가 떠오릅니다. 'unlearn'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90이 넘는 나이까지도 격정적인 열정으로 삶을 살다 간 천재 화가 피카소에 의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걸 배우면서 세상을 더 많이 알아 간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편견이 그만큼 더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음을 피카소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실 인생을 더 잘 이해해보고 싶은 막연한 생각으로 책을 주문했던 것 같습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 새로운 지식들이 제게 세상을 더 분명하게 보여 줄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식들을 쌓기만 하고, 그것들을 비워내지 않는다면 지혜보다 오히려 편견만 키워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책을 사두고 읽지 않은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읽었던 책들을 통해서만 세상을 판단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째서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강조하시고,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진정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이제야 그 뜻이 헤아려지는 가을밤입니다.
말은 살찔 수 있어도 알량한 지식으로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는 오만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묵상 속에서 그동안 내 마음의 공간을 켜켜이 차지하고 있었을 편견들을 차분하게 비워내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이 계절
한번쯤
꼭 하고 싶은 것
있으면
해 보세요.
그리고 그 일이
꼭 마음에 들었으면 해요.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코로나19 시대, 이웃과 함께 하는 갈마동 성당!!
9월에 들어서 그동안 방역 4단계로 가족 모임조차 어려웠던 거리두기가 3단계로 하향되었지만, 여전히 코로나19의 위험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언제 어떻게 감염될지 모르는 두려움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 갈마동 본당은 "나는 천주교인이요!" 하고 이웃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말씀을 따라 천주교 신자임을 이웃에 알리고 갈마동 주민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해 대형 현수막을 걸고 기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9월 사목회에서 이번에 코로나19 관련하여 국가에서 지급해주는 25만 원의 국민 지원금을 어려움을 겪는 갈마동 주민(신자, 비신자 포함)들에게 물질적인 도움도 같이 하고자 신부님을 포함한 사목 회원들이 코로나 지원금을 기부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신부님은 전액을 희사하기로 발표하셨습니다.
사목 위원들도 이에 동의하였고, 모든 신자에게 알리고 취지에 동감하는 사람들은 형편에 맞게 전액, 혹은 반액 혹은 일부라고 성의껏 동참할 수 있도록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에 갈마동 본당 형제, 자매님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드리며 여러분의 소중한 참여로 어려우을 겪는 갈마동 주민들이 위안을 얻고 물질적으로도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글, 홍보분과 제공-
<1분 교리>
1) 교우란 무엇인가요?
교무금이란 매월 일정액을 성당에 봉헌하는 예물을 말합니다. 주일 미사 때 바치는 헌금이 본래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다시 돌려 드린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반면, 교무금은 교회의 유지와 관리 운영에 필요한 비용으로 선교 활동비, 교육비, 가난한 이들과 사회정의를 위해서도 쓰여집니다. 이는 구약의 십일조 전통에서 유래합니다.
-교육분과 제공 (김동규 신부님 예비자 교리서)에서 발췌-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21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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