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1년 주보

연중 제23주일 2021년 9월 5일(나해)

모든 2 2021. 9. 5. 10:35

당진성당 초락도공소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초락1로 143(초락도리 463-5)

 

+ 마르코복음 31-37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 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말씀의 향기>

 

마음의 문을 열고(에파타!) - 지경준 시몬 부여 주임

 

  보고 듣고 말하는 것,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 필요한 것만 보고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결국 안 보고, 안 듣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자세로 듣느냐에 따라 같은 소리라도 다르게 들립니다. 아이들을 좋아하느냐 싫어 하는냐에 따라 시끄러운 소리가 달리 들리게 됩니다.

 

  "강론, 사목자는 강론을 하기가 힘들고, 신자들은 그 강론을 듣기가 힘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듣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소리나 말의 품질은 달라집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귀머거리요 조금씩은 벙어리가 아닐까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듣고 말하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데려왔습니다. 못 듣고 제대로 말 못하니 얼마나 야속한 운명이겠습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한눈에 그의 애절한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치유해 주시는 태도도 남다릅니다.

 

  손가락을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십니다. 그를 낫게 하시려면 굳이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얼마든지 낫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위해 감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보시고 감탄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귀를 열고 혀를 풀어 주신 것은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니 좋았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진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일그러진 창조의 모습을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치유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창조행위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그가 누구였는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알 수 없는 그를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우리는 건강한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에 얼마만큼 민감한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시는데,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혹시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면 이제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에타파!"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라는 뜻이 아닐까요.

 

  주님을 향해 귀를 열고 입을 여는 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창조 시기(Season of Creation)

 

 

 

  가톨릭 교회는 9월 1일부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 4일)까지 다섯 주간을 '창조 시기'(Season lf Creation)로 정하고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를 바치며, 기후 위기에 직면한 인류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체적 행동을 알리고 실천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 시기의 대부분을 순교자 성월과 더불어 지낸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박해자들의 칼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받아 들였던 분들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쁨이 육신의 고난을 압도한 것이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녹색 순교자'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피흘려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자들이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보호해야 한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피조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을 길어올리는 녹새 순교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찬미받으소서」 221항 참조)

 

  기후변화로 인해 사상 초유의 재난들이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에 작년에는 54일간의 기나긴 장마가 있었고, 올해는 폭염으로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자연의 징표 앞에 우리는 지금 당장 생태적인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종의 요청에 따라 대전환을 이루어 가고자 하는 곳에서는 다양한 저항에 맞닥뜨리게 된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생명농사를 실천하기 위해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기를 고집하는 농부들이 계신다. 경제적인 이윤에 앞서 건강한 생명체들을 키우고 나누는 기쁨을 누리는 이분들이 바로 '녹색 순교자'들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경제성장을 외치고 있는 이때, '세상을 구하는 것은 무한성장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것이다.!''지속 가능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려면 피조물과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고 외치며 실천하는 분들이 계신다. 이분들이 이 세대를 구원으로 이끌어 갈 '녹색 순교자'들이다. 소비주의를 거스르고, 버리는 문화를 멀리하며, 생명을 살리는 즐거운 불편을 선택하는 이들이 /녹색 순교자'들이다. 이들의 순교(증거)를 보시고 주님과 천상의 순교성인들께서 기뻐하고 계시리라.

 

-강승수 요셉 신부 대전가톨릭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본부-

 

'교회와 나' 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이해 1 ① -평신도의 개념과 역사적 발전

 

  평신도는 누구 인가? 그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다. 이것이 평신도의 가장 큰 영예이자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본질적인 말일 것이다. 공의회는 바로 이 평신도에 대한 이해에서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근본적인 진전을 이뤄냈다. 이제 평신도가 누구인지 그 달라진 평신도 이해와 함께 평신도의 본질과 사명을  두 장에 걸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어떠한 역사적 변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말 '평신도'는 그리스어 '라오스(λαός)’ 에서 번역된 것이다. 라오스는 그리스의 세속 역사에서 무리, 민중, 백성을 뜻하며, 신약에서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면서 이스라엘이나 하느님 백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일컬었다. 라오스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과 구분되는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구분을 위하여 사용된 개념이었다. 곧 라오스는 전체 그리스도인과 함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일컫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지금 통용되고 있는 ‘평신도’는 비록 성경의 라오스를 번역한 것이긴 하지만, 성경의 라오스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예컨대 구약에서 사제 및 예언자와 구별하여 일반 백성에게 이 개념이 사용된 적이 가끔 있으나(<칠십 인 역>: 이사 24,2; 호세 4,9), 신약에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 곧 ‘라오스’로 불린다면, 이는 본래 모든 신앙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기록에 직무자와 구분된 오늘날의 평신도 개념이 처음 나타난 것은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96년경)인데, 유다의 예배 질서와 관련해서다. 곧 유다교 공동체가 대사제, 사제, 레위, 백성으로 각각의 임무를 구분한 것을 빌려 “사제의 질서”  (Ordosacerdotalis)의 직무자와 “교회의 질서”(Ordo ecclesiae)로서의 평신도를 구분한 것이다. 이후, 라오스가 직무자에 대하여 평범한 신도를 구분하는 단어로 사용되면서 평-신도만을 가리키는 단어로 고착되었다. 그러나 초기교회에서는 직무를 강조한 것이었을 뿐 직무에서 제외된 평신도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곧 평신도들은 직무자와 함께 교회에 대해 공동책임을 지는 교회의 주체였다.


  중세에 이르러 성직자의 직무가 강조되면서 평신도는 점차 자기들의 권한과 기능을 잃게 된다. 복음정신과는 거리가 먼 성직자 우월주의와 평신도의 무능화경향이 교회사 초기에도 나타나지만, 이에 반해 하느님의 백성을 복음정신 아래 이해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특기할 만하다: “여러분을 위하여 내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두렵게 하지만,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나를 위로해 줍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직무의 이름이고 후자는 은총의 이름입니다. 전자는 위험한 이름이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이름입니다”(교회헌장 32항 참조). 

 

  이렇게 성직자와 평신도의 대립관계는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때 절정에 이르기까지 강화되다가, 계몽주의와 그로 인한 교회의 세속화 영향 아래 평신도의 역할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곧 교역자들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한계를 느끼면서 평신도가 ‘세상에 대한 봉사’를 떠맡아 주기를 희망하게 된 것이다.것이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 교구내 공소

당진성당 초락도공소




  초락도에 전교가 된 계기는 1956년 12월 홍순교 막달레자가 멀리 당진성당에서 나가 영세입교 하면서부터다. 초기에는 동광 마을의 김순례 모니카 가족과 함께 삼공공소로 다녔다. 이후 1986년초 고향에 돌아온 홍 막달레나와 홍성직 바오로 회장을 중심으로 공소공동체를 형성해 나갔고, 같은 해 성탄대축일에 장영식 신부로부터 공소설립인가를 받았다. 초기에는 회장집에서 9세대 24명(성인 16명)이 모여 공소예절을 하였다. 첫 공소건물로 마을 공동작업장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매입. 수리하여 1986년 9월 7일 봉헌예식을 가졌다. 새로운 공소건물은 2003년 대지 500평 위에 경량철골조(191.4㎡)로 건축되었다. 현재 46세대 35여 명이 정지적인 전례에 참례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15)>

 

노안 때문에 얻은 혜안(慧眼)

 

  노년의 낌새는 우리 신체 가운데 '눈'에서부터 가장 먼저 온다고 합니다. 출석부의 제자들 이름이 가물가물해 보이고, 휴대폰 글씨 크기가 자꾸만 더 크게 키우면서 노년이 내 곁에 바싹 다가와 있음을 눈치챘습니다.

 

  돋보기를 써야 하는 번거로움, 백내장, 수술에 대한 정보탐색, 눈에 좋다는 건강기능 식품에 대한 유혹.. 이런 낯선 경험들이 잦아지면서 아무리 아직은 아니라고 부인해도 이젠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있음을 실감합니다.

 

  무슨 해결책이 없을까 해서 안과를 찾아 자문을 구해 봅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시력이 더 좋아질 순 없고, 단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아쉬운 답변만 돌아옵니다.

 

  아프면 치료받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에 익숙했던 날들이 지나고, 이제는 아프면 치료받고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날이 왔다는 것, 이것 또한 노년의 낌새였음을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노년의 길에 들어서면 묘한 해방감을 동시에 맛보게 됩니다. 당혹스러운 노안 체험이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는 혜안을 선물로 안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은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만큼 소중하다."

 

  지금껏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쫓기며 살아왔기에 현상유지는 곧 실패를 의미했고, 그래서 어제와 다른 바 없는 오늘을 맞이할 때마다 좌절감과 자책으로 힘든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초조하고 조급했던 날들과는 작별입니다. 비록 어제보다 더 나아지지 않은 오늘이 찾아와도 그것마저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현상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렵니다.

 

  부족함은 채워질 때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 맛이 더 깊고 진해짐을 깨닫는 노년의 길목 풍경이 오늘따라 참 아름답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어디쯤 왔을까

 

오늘도

힘을 다해

저어 가야지

 

이만큼 온 날들을

감사기도 드리는

오늘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진성님이 부른 보릿고개 노래 가사의 일부분입니다.

글쓴이는 청소일을 하는데 먹지도 않고 그대로 버리는 음식을 매번 마주하게 됩니다.

어떨 땐 쌀이.. 또 어떨 땐 김치가 김치통째 나오기도 하죠.

물가 인상이란 기사가 나와서 올려볼까 합니다.

 

8월 2.6% 상승..5개월째 2% 이상 올라 지난 4월부터 2% 이상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국내 소비자물가가 5개월째 고공행진 중이다.

  기획재정부는 8월 소비자물가가 지난해 8월 대비 2.6%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공급측 요인인 농, 축, 수산물과 석유류 가격 강세 영향이 지속되고, 외식물가 상승 등으로 7월의 오름폭(2.6%)이 유지되고 있다고 밝혔다.

 

  농. 축. 수산물은 7월까지 전월에 비해 5개월 연속 하락했으나 폭염 등 계절적 요인으로 상승세로 전환했고, 석유류는 델타 변이 확산세 등으로 7월 중순부터 국제유가가 완만하게 하락했으나 유가 반영 시차와 환율상승으로 오름폭이 확대됐다는 것이다.

 

  체감지표인 생활물가지수도 3.4% 상승해 7월과 같은 수준의 상승 폭을 유지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9월 소비자물가는 추석 전 성수품 공급 확대 등으로 인한 하방 요인과 명절 수요 및 국제유가 추가 상승 가능성 등 상방 요인이 병존한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추석 명절을 앞두고 서민 생활물가가 안정될 수 있도록 16대 성수품 일 평균 공급물량을 평시보다 1.4배 늘리는 등 농, 축, 수산물 수급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출처] 소비자물가 고공행진 지속 /작성자 밥상머리 뉴스

 

  점점 흔해지는 것, 버려도 되는 것, 버릴 수밖에 없는 것, 귀찮은 것 그 속에 믿음, 양심, 가치 있는 것도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농부의 땀과 어머님의 정성으로 만든 음식일지라도 말이죠.

 

  신앙은 그러질 않길 바란다면 욕심일지 모를 일입니다.

먹거리가 올랐다고 걱정, 기름값이 올랐다고 근심하기보다는 조리할 수 있을 만큼 알뜰히 요리하고 짧은 거리는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습관을 기르는 자세가 평생 중요하겠죠.

-글. 사회복음화 분과제공-

 

 

<1분 교리>

 

  1. 미사란 무슨 뜻인가요?

미사(Missa)는 라틴어로 '파견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Mittere'의 과거분사형 입니다. 천주교의 모든 예식 끝에 '가거라, 파견되었다.(lte, missa est)'라고 선언하던 전통에서 말씀과 성찬식으로 구성된 예식을 통틀어 '미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미사 중에 받은 은총을 세상에 나가 삶을 통해 전파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보내진다.'라는 의미에서도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교육분과 제공(김동규 신부님 예비자 교리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