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0년 주보

연중 제11주일 년 6월 13일(다해)

모든 2 2021. 8. 25. 10:01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바리사이파 시몬의 집에 함께 하신 예수」Pieter Pauwel Rubens,1618

 

 

+ 루카복음 7,36-8.3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에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말씀의 향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구자윤 비오 신탄진 주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주님께 감동을 드릴 만큼 진심어린 회개와 사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또 지금 무엇을 하고 사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회심의 눈물과 또 당신에게 보여드린 사랑과 정성을 보시고, 그녀가 지은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진심어린 회개와 극진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정성과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그에 맞갖은 은총을 주십니다. 과오 한번 저지르지 않고 순백의 인생을 살아 낸 성인은 없습니다. 또 주님의 사랑 앞에서 희망이 없는 죄인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거듭거듭 말씀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당신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이신 주님은 사람의 겉모습이나 살아 온 지난날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의 등장은,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참으로 큰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사랑이 부재하던 그 사회 안에서,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전혀 새로운 것이엇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바리사이나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너무도 파격적인 분, 또 충격적인 새로움이었기에 자신들의 고착된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유다인들이 벌레처럼 여기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나변환자,창녀, 세리,이방인들과 서슴없이 만나시고 친구가 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 역시, 죄 속에 살면서도 새로움이시고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의 생활입니다. 또 주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을 입에 달고 살지만, 주님을 감동시켜드릴 만큼의 회개와 정성을 드리지 못합니다.

 

  죄에 얼룩진 낡은 자신을 버리고 진심어린 회개와 사랑을 드리는 일만이 필요하니다. 자신을 벌레처럼 여기고 멸시하던 바리사이파 사라의 집으로 예수님를 찾아가는 그 여인의 용기와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각오와 실천이 바로 주님께 드릴 가장 큰 예물이고 선물입니다. 가장 귀한 것 또는 하기 힘들지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정성을 쏟을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언하였다."또는 "네 믿음이 네 가정과 이웃을 구원하였다."하고 주님께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니어칼럼>

 

고령자 교육 -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한동성 칼리스토 . 노인사목부 전담 신부

 

  고령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욕구 분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학계에 보고된 우리나라 고령자들이 받고 싶어하는 교육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개인생활의 활력증진,인간관계의 친밀성 증진,경제 생활의 활성화, 국가와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보람된 노년을 보내려는 자세 등이다.

 

 McClusky는 1981년 백악관 회의(White Horse Conference on Aging)에서 노인의 교육적 욕구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주장하였다.

 

  첫째, 환경적응 욕구에 관한 교육 - 이는 노화로 인해 감퇴된 기능을 회복하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에는 신체적 변화와 적음에 필요한 전략을 구성하는 것고 관련되 교육,배우자의 죽음이나 실명, 직업의 상실과 축소,이사로 인한 새로운 교제 등 사회적 변화에 대한 교육과 은퇴로 인한 경제적 변화에의 적응 위한 교육,기억과 지능의 변화에 대한 적응과 감각의 정확성 쇠퇴에 대한 적응,그리고 심리적 변화에 관련되 교육 등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표현적 욕구에 관련된 교육 -자신의 생각과 정서의 상태를 다양한 수단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욕구로써 글쓰기,음악, 미술,연극 등 여가 활동에 관한 교육과 대화 기법이나 갈등의 해소 등과 같은 대인관계에 관한 교육 등이 포함된다.

 

  셋째,공헌의 욕구에 관련된 교육-고령자들이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써, 그들이 지닌 자원을 동원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과 그들의 시간과 노력을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교육, 사회에 공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것으로써, 그들이 지닌 자원을 동원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과 그들의 시간과 노력을 가장 의미있게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교육,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교육들이 포함된다.

 

  넷째, 영향력의 욕구-교육을 통하여 자기생활을 통제하고 조정하는데 더 많은 힘을 가짐으로써 개인 생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지역 사회를 비롯한 전체 사회에 대해 자신이 지닌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회적 지지를 보내며 이를 확대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다섯째, 초월정 욕구-인생의 의미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한 요구로,여기에는 다른 연령이나 문화에 대하여 통찰을 가졌던 위인들이 인생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는 교육, 회상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의미를 제조명하도록 돕는 교육, 노화로 인한 신체적 제약들을 대처할 수 있는 기도나 학습을 조장하는 교육 등이 포함된다.

 

  1998년 10월 1일 '노인의 날'을 맞이하여 교황청 평신도 평의회는 「교회와 세상 안에서 노인의 존엄과 사명」에서 "노인들과 함께 걸어가고, 그들에게 다가가며,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하여야 할 일이다. 이제부터는 노인들에 대한 태도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인간 공동체안에 그들이 올바른 자리를 되찾아 주기 위하여 일할 시간이다."라고 우리의 사명을 천명하였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 마당>

 

안젤라 대녀님! 사랑해요! - 김순자 힐데가르디 .대전성모병원 기도 봉사자

 

  대전성모병원에서 봉사하면서 만난 잊지 못할 자매가 있다. 13~14년 전, 하루는 수녀님께서 조용히 부르시더니 교리를 받는 자매가 곧 세례를 받는데 대모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며 그 자매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20년 전 일본인과 결혼하여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생활했던 자매님은 고국이 그리워 마음 고생을 하다 결국 이혼을 했고 딸아이를 그 곳에 남겨둔 채 대전 친정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친정어머니와 동생들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이웃에 월세 방 한 칸을 얻어 어렵게 혼자 생활하다가 잠을 자던 중 쓰러진 석유난로로 인해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완전히 타버린 두 다리가 점점 썩어 들어가 결국 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최근에 받았다는 것이다.

 

  수녀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매님의 병실을 곧바로 방문했다. 두 다리의 무릎 아래쪽은 수술로 절단되었고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물지 않은 상처부위에서는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녀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온 나는 자매냄의 상처가 측은한 생각이 밀려와 무릎 주위를 조심스럽게 어루마지며 웃는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고, 주님 안에서 더욱 친하게 지내자고 손을 내밀었다. 무릎의 수술 부위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던 자매님은 병실을 방문해 주어 고맙다며 환한 얼굴로  손을 잡아주었다.

 

  수녀님의 소개로 이어진 이 특별한 만남은 그후로도 계속되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소중하고 가치있는 자녀라는 것, 인생의 여정에서 십자가인 질병과 고통의 의미,병상에서의 생활이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라는 말씀ㄹ 드리며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어 영육 간에 치유의 은총과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함께 드리곤 했다.

 

  세례를 받은 자매님은 하느님의 자녀 안젤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나는 종종 간식을 챙겨 자매님을 방문하곤 했는데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는 그분의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처가 잘 아물고 치료도 잘 되어 친정 식구들 품으로 돌아가게 된 자매님은 앞날의 삶 전체를 주님께 맡기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였고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자매님의 어머니도 세례를 받아 딸과 함께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일 먼저 대녀 안젤라를 떠올리며 영육 간에 아픔과 고독함으로 힘들어할 때 당신 사랑으 보살핌으로 외롭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정성을 다해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린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철하며 성모님의 모습으로 형편이 어렵고 소외된 환우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던 수녀님도 기도 중에 잊지 않는다.

 

  주님! 성모병원에서 기도로 봉사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내 일을

사랑하듯이

당신의 일들도

존경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한꺼번에 세 가지 고마움을 안겨준 아이

 

  아파트에서 살다보면 로비에서 간발의 차로 엘리베이터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바쁜 상황이든 아니든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순간 엘리베니터가 올라가 버리면 참 얄밉고 약이 오르기도 합니다. 그게 위층에서 불러올린 경우가 아니고 로비에서 누군가 타고 올라가는 경우라면 누군지 모를 그가 괜히 미워지기도 하지요.

 

  한번은 로비 안으로 들어선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버려서 "아이쿠!" 소리를 하며 또 한번 '간발의 차'를 실감할 순간 다시 문이 열리더군요.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사내아이가 버턴을 누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맙다, 야,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니?" 내가 이렇게 감사를 표하자 10층에서 사는 초등학교 5학년인 그 아이가 어깨에 멘  책가방을 추스르며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오시느 걸 보구 기다리다가 잠깐 손을 놓았더니 문이 닫혀서 얼른 다시 눌렀어요."

 

  아저씨? '아저씨'라는 호칭에 나는 이상하게 힘이 솟는 것 같았습니다. "이야,초등학생인 네가 어른도 지니기 어려운 소견을 지녔구나, 참 기특하다." "저번에 아저씨가 가르쳐 주셨잖아요?" "내가?" "네,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같이 탈 사람이 없나, 한번 뒤를 돌아보고 타야 한다구요."

 

  "아,내가 그랬구나, 생각난다. 야,그런데 네가 그걸 다 기억하고 그렇게 실행까지 하니 고맙다," 하며 녀석의 어깨를 두르려주니 녀석은 기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8층에서 먼저 내리자 녀석은 깍듯이 인사를 했습니다.

 

  이틀 후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또 녀석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엊그제는 네가 참 고마웠다. 날 아저씨라고 불러준 것도 고맙고, 또 나로 하여금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해준 것도 고맙고.." 그러자 녀석은 "감사합니다."하며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롤러스케이트를 굴려 먼저 로비를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녀석에게 "엘리베이터를 탈 때 현관 밖을 한번 둘러보는 것은 남에 대한 배려도 되고, 마음의 여유를 길러주는 것도 되고, 또 전력 낭비를 줄이는 일도 되니 바로 일석삼조가 된단다."라고 했던 내 말을 상기하며,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그 아이를 '본받기로'다짐하였습니다.

 

-지요하(소설가.태안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