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을 위한 기도
주 하느님,
주님의 종 베네딕토를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 뽑으시어
모든 양 떼의 목자로 싸우셨으니
간절히 기도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저희 교황이
형제들의 힘이 되게 하시고
온 교회가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유대로
그와 함께 친교를 이루어
모든 사람이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에게서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얻게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루카복음 9,51-6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은 꾸짖어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말씀의 향기>
어느 화분에 물을 주려 하는가? -김인화 루카 삼성동 주임
오늘 복음의 전반부(루카 9,51-56)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길을 방해하는 사마리아들이 소개된다. 이어 후반부(루카 9,57-62)에서는 예수님의 일행이 길을 갈 때 "예수님을 따르겠다" 나서는 어떤 사람이 소개된다. "방해하는 이"와 "추종하는 이"
세상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 같다. 이로 인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방해가 예수님의 여정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듯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이 누군가의 방해에 의해서 완전히 불가능해지지는 않는다. 조금 멀게 '다른 마을'로(루카 9,56) 돌아서 갈 뿐이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에서 존재하는 이러한 방해와 갈등은 외부에서만 그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하느님을 따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 선택 앞에서 "뒤를 돌아보게 하는 마음"도 존재한다.
사도 바오로는 제 1독서에서 이 갈등을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삶"과 "육의 욕망을 채우는 삶'으로 소개한다. 사도 바오로는 가 갈등 속에서 때로는 성령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육의 욕망에 의해서 자유롭지 못하게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육의 욕망이 우위권을 차지함으로써 분열이 생겨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인간이 느끼는 이러한 갈등은 모두가 체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갈등을 느끼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뜻과 내 뜻 앞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과 육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 안에서 갈등하는가?"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갈등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방해 앞에서 꿋꿋이 당신의 길을 가신다. 불을 내려 그 방해를 태워버리며 당신 길을 가지 않으시고 방해를 지닌 채 다른 마을로 멀리 돌아서 가신다.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두 마음은 두 개의 화분에 비유된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뜻과 성령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에 물을 주는가, 아니면 내 뜻과 육의 욕망이라는 화분에 물을 주는가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공동체의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오늘 하루 어느 화분에 물을 주려 하는가?
<시니어 칼럼>
신앙과 노년기의 삶의 질 - 한동성 칼리스토. 노인사목부 전달 신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8년 12월 30 성가정 축일에 발표하신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노년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며(지혜 25,4-6), 신앙의 전통에 대한 증인이며 (시편 43,2 탈출 12,26-27).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되어 주고(집회 6,38) 사랑의 장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농경문화가 경제구조적으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남과 동시에 노년이 지혜의 원천인 시기는 지나갔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후기 산업사회의 노년들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기에 그 숫자와 실질적인 공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고(Blas,1999) 또한 젊은만이 높은 가치의 대명사가 되었고, 노년을 피해야 할 질병처럼 간주되기에 그들이 해야할 정당한 역할 수행이 거부되고 있다.(Tournier,1989), 이러한 부적절한 평가는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노년들에게 실질을 통한 재정적 어려움과 건강 악화로 인한 의료문제는 다양한 문제들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노년들이 당면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Koening 1995)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노년이 그렇지 않은 노년보다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고 더 바람직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술과 담배를 적게하며, 친구 관계나 가족 관계가 돈독하고, 우울증이 적기에 삶의 질이 훨씬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현재의 삶에 만족, 지나온 일생에 대한 긍정적 수용, 지혜로운 삶, 죽음에 대한 수용과 같은 자아통합감의 하위영역에 모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며, 정기적인 신앙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심리적 복지 감이 높고 이타성이 발달하며 죽음에 대한 불안이 감소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전 국민의 반이 넘은 53.5%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보다 남성의 종교 인구 증가율이 조금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왜 종교를 거지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67.9%가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라고 대답했으며, "복을 많이 받기 위해"(15.6%), "죽은 다음 영원한 생명을 위해"(7.8%),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7.0%)의 순서로 나타났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하는 노력은 과거에 비해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
서구보다 빠른 고령화 사회를 맞고 있는 우리나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관심사이다. 특히 퇴직 후 무료함과 고독, 소외감을 해소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주요한 과제가 된다. 노년들이 노후를 효율적으로 보내는 방법으로 재취업, 여가생활, 자원봉사, 노인대학, 종교활동을 포함한 사회활동 등을 들고 있다.
동서양 사회에서의 연구(윤혜진 2001.Koening 1996)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포함한 노후 생활에 신앙생활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노년은 그렇지 않은 노년보다 죽음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신앙생활을 활발히 할수록 사망률과 유병률이 낮으며, 신앙 생황를 하는 노년이 하지 않는 노년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건강함이 밝혀졌다. 신앙 생활을 할수록 노년의 삶의 질은 좋아진다는 것이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 마당>
영혼의 쾌변(快辯) -홍정희 베로니카. 송촌동 성당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더니 속이 더부룩했다. 얼마 안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노선표를 보니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집에서 편히 쉴 때는 신호가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하필 버스 탔을 때 신호가 올 게 뭐람!" 그날따라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맑은 햇살이 도로를 내리쬐고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좋은 봄날을 즐길 수 없었다. 오직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눈은 앞 자동차 꽁무니만을 좇고 손은 아랫배만을 움켜쥐고 있었다.
'역시 화장실을 제 때 가야 몸이 편안하구나' 그 순간이었다.
'그럼 영혼은?'
마음 속에서 되묻는, 다소 엉뚱한 질문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영혼은 편안한가?
몸이 건강한 사람은 주기적으로 화장실을 간다고 한다. 하지만 위나 장이 좋지 않은 사람은 화장실을 가는 것이 고역이다. 변비는 변비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변비로 인하여 얻는 병의 종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의 몸은 비워야 할 때 비우지 못하면 이상이 생기는 것이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고해성사를 제때에 보고, 그에 따른 보속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의 영혼은 건강하다. 하지만 죄가 쌓이는 것을 외면하고 방치하는 사람의 영혼엔 근심이 깃들게 된다. 나아가 죄로 인한 많은 생각과 걱정들은 그 자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나 또한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묵혀두었더 죄 때문에, 한동안 아파하고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다. 죄를 버리지 못하고 방치하는 데에는 온 고통이었다. 숙변을 만들어 무엇에 쓰랴!
죄로 인한 우리들이 불안과 고통을 하느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고해성사는 삶의 큰 은총이다. 하느님은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 다시는 묻지 않으신다. 변은, 배출하는 순간부터 몸이 시원해진다. 죄를 고백하는 순간부터 영혼이 평화롭다.
내 영혼은 편안했다. 화장실을 제때 갈 수만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를 통하여 당연한 것을 깨우치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시간 끝에 다행히 나는 쾌변(快辯)할 수 있었다.
거기에 계시면
언제든지 가겠습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암을 이기신 87세 노친
올해 87세이신 노친이 지난해 6월 서울성모병원에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임파선에도 암이 있고, 여생은 6개월 정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종양내과를 피하고 완화의학과를 선택하여 호스피스 병동에 열흘 정도 있다가 퇴원한 후부터 우리 부부는 식이요법을 시행하였습니다. 말이 쉬워 대체의학이고 식이요법이지, 그것은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온 가족의 큰 노고와 정성의 집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친은 9월 23일 폐가 깨끗해졌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노친께 확실한 병명을 말씀 드렸지요. 나날이 좋아지시는 노친을 보며 우리 부부는 자못 의기양양해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11월 1일 갑자기 노친께 일어서지도 못하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다시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신 다음 정밀검사를 시행했는데 노친은 너무 지친 탓인지 돌아가실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간호수녀님이 임종이 임박한 환자 보호자들에게 실시하는 교육에 나도 참석하면서 지레 눈물을 흘려야 했지요. 그러나 희망을 놓지 않고 노친께 응답과 흑마을 엑기스를 집중적으로 복용시킨 다음 관장을 하게 해서, 변비 현상으로 일주일 이상 보지 못했던 숙변을 모두 배설케 하니 회생의 기미가 보이게 되었습니다.
최종 진단은 암세포의 '골반 전이 및 골절'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져서 11월 31일 태안의 서해안 요양병원으로 옮겨올 때는 여생이 2개월 정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양병원에서도 회복보다는 고통을 감소시켜서 비교적 편안히 여생을 마치시게 해드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을 들었지요.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다니며 노친을 보살폈습니다. 노친께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게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 암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켜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병원에 가고 올 적마다 운전을 하면서도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골절이 아니라 엉덩이뼈에 붙은 암세포 때문에, 바로 그 암세포 부위가 골절되었으니 87세 노인이 다신 걷는다는 것은 의학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터였습니다. 그런데 노친은 다시 걷게 되었습니다. 3월 말 화장실에 모시고 가느라 휠체어에 태울 때 내 두 팔의 힘이 덜 드는 것을 느낀 순간의 기쁨, 그 후 4월 초 보조기를 잡고 다시 걷는 모습을 처음 보던 날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제 노친은 외출도 하시고, 지난 '6월 2일 지방선거' 때는 투표도 하셨습니다. 나는 병원 가는 일을 하루 두 번으로 줄였고, 가끔 점심때 노친을 모시고 나와 외식도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곤 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지요하(소설가. 태안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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