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0년 주보

연중 제15주일 2010년 7월 11일(다해)

모든 2 2021. 8. 28. 13:39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착한 사마리아 사람」 G.Conti. 18세기

 

 

+ 루카 복음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말씀의 향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 김정수 바르나바 천안신부동 주임-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가장 큰 계명을 가르쳐주신 루카 복음의 진주라고 생각하는 "사랑"의 대목에 우리가 있습니다. 내용은 어떤 사람이 여행 중 노상강도를 만나 귀중품을 빼앗기고 옷이 벗겨져 초주검으로 길거리에 버려져 있습니다. 이때 사제와 레위는 이 사람을 보고 비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치료해주고 여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그 사람 뒤를 봐주도록 비용까지 주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삶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6)라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 사회에서 사제나 레위는 모두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길거리에 버려진 다 죽어가는 사람을 만지고 돕는다는 것을 불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루카 10,27)라고 예수님께 답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과 개종한 이방인들은 이웃으로 사랑을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다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웃이건 원수이건 누구든 "길거리에 강도를 맞아 가르치는 예수님의 교리는 참으로 놀라운 새로운 사랑의 변혁이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라고 되물으시며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원수인 사마리아인도 이웃이 될 수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새로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웃의 한계가 없어지게 됩니다. 원수 같은 죄인 같은 하류 사람을 입에 올리기 거북하여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뭉뚱그려 대답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답을 주십니다.

 

  마더데레사는 수녀로 삶을 살면서 캘커타 거리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죽어가는 것으로 알고 모셔다 치료해주고 보살펴 주신 이웃 사랑을 실천한 천사 수녀였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고 오늘도 명하십니다.

 

 

<시니어 칼럼>

 

노년기의 가족 관계 -부모 자녀 관계  -한성동 갈리스토 . 노인사목부 전담 신부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가족관계에서 부자관계를 가장 중요시하여 왔고, 자녀들을 양육, 교육하고 결혼. 독립시키는데 부모의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로 자녀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부모 자녀간의 관계에 있어서 학계의 연구 결과는 가족관계에 있어서 양적인 변인은 연구 결과는 가족관계에 있어서 양적인 변인은 질적인 변인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 자녀간의 주거의 근접성, 접촉의 빈도, 원조의 상호교환 등은 실제로 관계의 질적인 측면과 거의 관련이 없다. 따라서 부모 자녀 간의 관계에서 양적인 변인에 의해서 노년기의 심리적인 만족감이 영향을 받기보다는 질적인 변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최성재, 2008)

 

Quinn(1983)의 연구에 위하면 노년기의 심리적 만족감은 1) 건강상태 1) 가족 관계의 질 3) 가족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기대(filial expectation)4) 결혼 상태 5) 주거 환경 6) 가족원 외의 사람과의 접촉 7) 경제적 사정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된다. 가족 관계의 질은 애정, 가치나 관심사에 있어서의 일치성과 대화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 애정은 신뢰와 존경, 이해 , 공평성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는 오랜 시간 동안 발전되어 온 것이다. 지금 부모 자녀관계가 어떠했느냐가 현재의 부모 자녀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또한 가족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기대가 클 수록 노인의 심리적 만족도는 낮아진다는 것은 유의할 것이다. 가족의 외부적인 과계는 진정한 존경이나 애정이 결여된 관계이므로 이를 통한 심리적 만족도는 향상되기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노년기를 맞으신 부모님들에게 자녀 측에서 도리나 의무적으로(filial responsibility) 대하는 단계에서 자녀로서의 도리의 성숙성(filial maturity)으로 발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성숙성으로 발전된 도리와 의무를 노년들이 대하게 될 때, 노년기의 심리적 만족도는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 결과는 노부모의 (경제적, 신체적, 사회적, 심리적) 의존 정도가 높을수록 성인 자녀의 지원이 많을수록 부정적인 감정이 증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이동숙, 2006)

 

  일반적으로 한국 노년들의 가족에로의 통합은 1) 직업을 가지고 있는 노년일수록 2) 세대간의 교육 수준의 차이가 적을수록 3) 세대간의 가치 지향의 차이가 적을수록 4)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5) 건강 상채가 좋을수록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년들과 자녀들이 동거하느냐 별거하느냐는 노년의 가족에로의 사회적 통합에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특이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의 노년들에 대한 차가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가정 안에서의 노년의 가치와 의미를 중요시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년들에 대해 "가정 생활에서 적극적이고 책임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 과거의 증인이 되고 젊은이와 미래를 위해서 예지의 원천이 되는 중대한 사명을 이행하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한 후 "교회의 사목활동은 모든 이들을 도와가며 사회와 교회 공동체에서 특히 가정 안에서의 노인의 역할을 개발하고 잘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노인들은 흔히 세대 격차를 메우는 특은을 가집니다.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노인들의 눈과 말과 그 어루만짐에서 이해와 사랑을 발견하였던가!"(가정 공동체 27항)하며 노년들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마당>

 

장가계에서 뵌 하느님  - 신인식 안셀모. 둔산동 성당

 

  중학교 동기동창 11명과 중국의 장가계를 관광하면서 많은 것들을 느꼈다. 짧은 3박 5일이지만 「매일미사」와 「야곱의 우물」그리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책도 가지고 가서 읽으면서 즐겁고 의미있는 관광을 했다. 우리 일행 중에서도 신자분들이 있어 함께하는 기쁨이 더했다. 게다가 중국 현지 가이드는 신자가 아니지만 열심히 기도하면, 쾌적한 관광을 위한 날짜가 주어진다고 기도를 강조했고, 기도 덕분인지 날씨가 좋아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억만년의 침수와 자연 붕괴 등으로 형성된 협곡과 기묘한 봉우리, 맑은 물과 공기, 그리고 특대형 동굴들을 밟고 바라보면서 웅장한 자연 앞에서 옷을 여미고 엄숙하게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느꼈다.

 

  가지고 간 책에서 마더데레사 수녀님의 '우리는 하느님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소란하고 들뜬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침묵의 벗입니다. 나무와 꽃, 풀과 같은 자연을 살펴보십시오. 침묵 중에 자라고 있습니다. 태양과 달, 하늘과 별들을 보십시오. 역시 잠잠히 침묵 중에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역만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뵙고 있는 것임을 생각했다.

 

  그리고 위험천만한 낭떠러지 길을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하느님께 의지하며 몇번인가 기도를 바쳤다. 물론 너무나 일방적인 기도이기에 반성을 하면서도, 너그러운 눈길로 받아주실 것임을 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말만 하고 일어서는 우(愚)를 되풀이 하지 않고, 진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새겨보며, 실천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역시 여행은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게 한다.

 

 특히, 신앙인들은 여행을 계기로 모든 곳 모든 순간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짧은 일정이지만 장가계에서 만나 뵌 하느님은 참으로 인자하시고 크신 힘을 지니셨다고 생각하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도록 보살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린다.

 

 

 

분명

이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을 텐데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지요하와 함께하는 이야기 풍경>

 

그리운 용어들

 

얼마 전 태안군청 종합민원실에서 서울에서 오신 한 교우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내 손에 들려져 있는 묵주 덕분에 그 분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 분의 세례명이 노렌조(라우레시오)라는 말에 내 입에서 대뜸 "아, 구교우시군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구교우? 그 말을 해놓고 보니 갑자기 정다운 느낌이 피어올랐습니다.

 

  이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많은 교회 용어들 중에 '파공(罷工)'이라는 말과 '주일과 의무축일에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파공이라는 말에 '첨례(瞻禮)'라는 말이 붙어서 '파공첨례'라는 말이 많이 쓰였지요. 요즘에 파공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은 그것의 현실성이 희박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또 찰고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는 것도 교리 공부는 있어도 교리 시험은 없는(있더라도 철저하지 않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사 1시간 전부터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공복재(空腹齋)라고 하는데, 옛날에는'공심재(空心齋)'라고 했고, 미사 3시간 전부터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비워야 했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공심재라는 말은 물론이고 공복재라는 말도 잘 쓰이지 않는데, 그것 역시 편리주의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요즘에는 잘 쓰이지 않거나 거의 사라져가는 교회 용어들을 그리워하고, 또 그 용어들의 뜻과 그 말들이 쓰이지 않는 배경들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옛날 세례명들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요왕,도마,다두,말구,스더왕,노렌조,아오스딩,안당,분도, 분다,도민고,방지거, 알퐁소,말따,가별 등등...  그 옛날식 세례명을 가진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조만간 그 옛날식 세례명들은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 모두 사라지게 되겠지요. 그것을 생각하면 묘한 아쉬움 속에서 그 옛날식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좀 더 애정의 눈으로 보데 됩니다.

 

  그런데 나는 왜 우리 한국 교회의 옛날 용어들을 그리워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 용어들이 내포하고 있는, 옛날 신자들이 생활화했던 철두철미함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쩌면 오늘의 내 신앙생활을 늘 점검하고자 하는 뜻일 수도 있겠고.. 역시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인 '궐(闕)하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내 신앙생활 중에 스스로 궐하는(깜빡 빠뜨리거나 부러 빼먹는)것은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피며....

 

-지요하(소설가. 태안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