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0년 주보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10년 6월 6일(다해)

모든 2 2021. 8. 24. 20:09

 

+ 루카복음 9,11-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사실 장정만도 오천명 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은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말씀의 향기>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

-고영환 타대오 갈마동 주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함께 머물고 싶은 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라에게 선물을 준다. 사랑하는 마음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가치가 있는 선물을 고르게 되는데, 그 가치라는 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정해지는 객관적 가치 말고도 주관적인 기준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에 선물을 고를 때에는 고심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제일 좋은 선물은 객관적인 가치와 주관적인 바람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그런 선물이 있을까? 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 -바로 성체와 성혈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에서부터 많은 예표를 통하여(창세 14,18:탈출 16장 참조) 성체성사의 신비를 준비해 오셨다.

  누가 그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아니 하느님만이 그런 선물을 마련해 주실 능력이 있으시다.

  우리의 지능이 부족하여 이해를 하지 못한다 해서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왜곡, 축소시키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하느님의 전능을 부정할 자격과 능력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다.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확고하여 달리 해석할 여지도 없다. "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살아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셨으며, 유대인들 가운데 논쟁이 벌어지고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조차 투덜거리며 떠나갈 때에도 달리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왜일까? 진실이었기 때문이다.(요한 6장 참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작별의 시간(최후 만찬)에 이를 이루어 증명해 주셨다.(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카 22,19-20:1 코린 11,23-25 참조)

 

  성체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증표이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희생제사의 연속이요, 생명의 은총을 부어 주시는 성화의 근본이다. 그래서 성체를 '유카리스띠아'(감사의 성사)라 하지 않았던가? 성체성사를 제외한 성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만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서, 유혹을 느낄 때에 혹은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에 성체를 통하여 지혜를 얻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던가?

 

  문제는 성체를 자주, 그리고 몇 십 년씩이나 영해왔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며,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불신이 아닐까?

 

 

<시니어 칼럼>

 

교회가 고령자 교육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한동성 칼리스토 . 노인사목부 전달 신부

 

  코피 아난 전 국제연합 사무총장은 1998년 세계 노인의 날 담화에서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란, 노인을 은퇴하여 아무 힘도 없는 사람으로 풍자하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발전의 주체이며 수혜자로 보는 사회이다."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다시말해 노인이 지니고 있는 큰 잠재력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내용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도 2005년 사순 시기 담화를 통해 "노인층에게 더욱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노인들이 그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여 공동체 전체에 이바지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급증하는 고령자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대목이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노인 교육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하느님 말씀의 실천이다. 성경 안에서 노인들에 대한 공경을 하느님의 법이며 계명이 된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들을 존경해야 한다."(레위 19,32)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신자 개개인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교회공동체가 지켜야 할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둘째, 교회는 복지를 실천하는 사회 단체이다. 교회는 지역 사회 주민들로 구성된 단체로 주민복지를 생각하는 대표 단체이다. 지역 사회 역시 교회가 복지단체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고 국가로부터도 비영리 법인으로 인정 받고 있다.

 

  셋째, 교회의 노인에 대한 관심 : 지역 사회 여러 단체보다 교회가 가장 연령 통합적 단체이지만, 많은 경우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교회 내에서 평신도 노인들은 상당히 소외되거나 관심에서 멀어지고 세대간의 연령 분리적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노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다 집중시켜 노인 교육을 통해 노인이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다음세대인 젊은이들을 위해 지원하고 봉사하는 기회를 가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넷째, 국가 정책보완 : 교회가 국가나 사회의 노인 복지 서비스 관심 부족에 대한 보완책으로 노인 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민간단체로서 바람직하다. 교회도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지역 사회 구성기관이기 때문에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교회의 사회복지 참여 특히 노인 참여는 바람직하다.

 

  다섯째, 지역 사회에 대한 교환적 보상 : 사회교환론적 관점( social exchange theory)에서 보면 교회는 지역 사회로부터 신자들을 제공 받기 때문에 교회는 지역 사회에 대한 보상으로 복지 프로그램 특히 노인 복지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섯째, 지역 사회의 효과적 선교 전략 : 교회가 자체 신자는 물론  지역 사회인을 위한 노인 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선교적 전략으로써 바람직하다고 본다. 노인은 가장 접근이 쉬울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접근이 가능한 선교 대상이다. 더 나아가 노인을 통하여 가족의 선교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선교적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 마당>

 

 

주일만 신자(?)  - 문정실 안나. 봉산동 성당

 

  아카시아 향기가 봄바람에 흩날리며 주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사드리게 되는 계절입니다.

  결혼 전에는 주일학교 교사와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성당 일에 열심이었지만 결혼과 동시에 자녀양육, 집안일, 건강 등을 핑계 삼아 주일미사만 겨우 참례하고 봉당 일에는 비협조적으로 지냈습니다.

 

  그렇게 '주일만 신자(?)'로 보내던 작년 가을성당 일에 솔선수범하시고 모범적인 수산나 반장님께서 뜬금없이 "안나, 반장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하시는 겁니다. 저는 반장님이 너무 잘 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 저도 때가 되면 해야겠지요."라고 가볍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후에 반장님께서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가시게 되면서 저보고 반장을 권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우리 반에는 주일학교 어머니 교사가 3명, 할머니 한 분, 애기엄마,직장인과 저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제가 반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가 되면 하겠지요.'라고 했던 '그때'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 누가 알았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수산나 반장님께서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시지요. 또한 관평동, 봉산동에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많은 분들이 전출을 가셔서 저의 남편도 본의 아니게 구역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남편은 '주일만 신자(?)'도 못되는 무의만 신자라고 할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고 겨우 저를 따라 미사만 참례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장과 구역장을 각각 맡게 되었으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본당공동체의 선교에 아주 열성적이셔서 자연히 여러 행사가 많다보니 평일 미사 참례, 영성교육, 회의 , 행상 등으로 평일에도 성당에서 보내던 시간이 많아지고 집에 돌아오면 힘은 들지만 성당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다보니 저희 부부는 그 동안 단조로웠던 대화가 풍성해지고 부부사이도 더욱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레지오에 입단하면서 우리부부의 주례 신부님과의 레지오 입단 약속도 13년 만에 지키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우리 구역의 친절하신 할아버지께서 안타깝게 임종하셔서 연도, 입관예절, 장례미사를 참석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일미사만 참례하고 주님께 청원기도만 드리는 이기적인 '주일만 신자'였다가 새로워진 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카시아 향기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으며 성모님께 사랑받는 안나가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새로나게 하소서."

 

 

 

일테면 / 그러니까

글쎄 / 또는 / 그리고

그래도 / 지금처럼

 

주님을 사랑해야지

 

그래서 /

그렇지 / 그럼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이충무의 행복나침반>

 

진실로 꽉 채운 말 한마디, 마음을 살아 있게 합니다.!

 

 

명대사의 비밀

 

 

  연극이나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을 보고 있다 보면 무릎을 탁 치는 순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극 중 인물들이 던지는 대사들이 너무도 멋질 때 말입니다. 혹시 이 대사 기억나세요?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한 동안 이 대사 한 마디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드라마 '다모'의 폐인이 되었습니까? 한 여인의 마음의 고통이 한 사내의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었음을 이보다 더 분명하고 감동적으로 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이 아름다운 명대사를 살짝 비틀어 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일단 이런 대사를 했다고 상상해 볼까요? "아프냐? 너만 아프냐?" 이런 대답이라면 두 사람 관계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겠죠? 아마도 두 사람은 서로 내가 더 아플고 내가 더 손해 보고 억울하다며 밤새도록 결곤 없는 무모한 논쟁을 벌일 테니까요. 한 사람의 마음 아픔보다 내 아픔이 더 커 보여 오히려 상대방은 더 아프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이기적 착시현상 때문에 사람들 관계는 더욱 더 멀어져 갑니다.

 

  이보다 더 한 상황도 있습니다. 이런 대사를 했다고 상상해 볼까요? "아프냐? 그러냐?"

  아예 아팠는지도, 아픈 것을 알았음에도, 그냥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느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있을 겁니다. 네 아픔이건 내 아픔이건 그게 우리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냐는 말에는 치명적인 이기적 칼날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 단순한 대사는 단지 말이 멋있어서 명대사로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명대사는 미사여구의 현란한 수하학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명대사의 진짜 비밀은 그 말이 튀어나오는 상황이 얼마나 진실한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한 사람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을 만한 명대사 하나쯤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먼저 내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정직하게 들여다 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