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1년 주보

연중 제11주일 2021년 6월 13일(나해)

모든 2 2021. 6. 14. 05:14

당진성당 구룡리 공소

충청남도 당진시 도동길 44-9(구룡동 287)

 

 

+ 마르코 복음 4,26-34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뿔 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도.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말씀의 향기>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 양명식 대건안드레아 사무처 차장

 

 

  어린 시절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 봉선화 씨앗을 사서 집 앞 화단 가운데에 심었던 적이 있습니다. 봉선화가 다 자라나면 꽃을 따서 봉선화 물을 들이려고 했지요. 되도록 빨리 손톱을 물들이고 싶어서, 화단 앞을 지나갈 때마다 봉선화가 얼마만큼 자랐는지 확인했던 기억이 납니다. 화단에 심었던 자그마한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운 다음, 꽃을 피우는 그 일련의 시간이 저에게는 너무다 길게 느껴졌습니다. 햇볕이 너무 뜨겁게 내리쬘 때는 잎이 타들어 갈까 노심초사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그 줄기가 꺾어버릴까 애가 달았습니다. 며칠 밤만 자고 일어나면 꽃을 '짠!'하고 피워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요. 매일같이 들여다보아도 아주 조금씩밖에 자라나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하였지만, 세 달여의 시간이 지나가니 어느새 봉선화는 아름다움 꽃을 피워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도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가운데 그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싹이 터서, 줄기를 세우고, 뿌리를 깊게 내리면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꽃을 피웠으면 좋겠는데, 당장은 아무런 변화도 없고,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몰아치는 비바람과 같은 시련과 짙은 어둠이 우리를 찾아올 때, 하느님 나라는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 그분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으며,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생명을 온전히 맛 볼 수 있도록  어제도, 오늘도 자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씨앗이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는   내적인 확실성, 바로 하느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어려움과 어둠이 있어도 활동하신다는 굳은 확신이 필요합니다."(복음의 기쁨, 279항). 정녕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당신의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당신 사랑에 꼭 안길 수 있도록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어릴 적에는 화단에 심겨진 봉선화 씨앗이 얼른 자라나서 제 손톱이 봉선화로 물드는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하늘나라가 우리 가운데 더욱 풍성히 자라나서, 모든 이가 그분의 사랑과 생명으로 물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그날을 희망하며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북을 희망하며...

 

 

  얼마 전 대전교구장 주교님이신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께서 교황님을 알현하고 오시면서 다시금 교황님의 방북에 관한 이야기가 수면에 떠 올랐다.

 

  이미 지난 2018년 10월 18일 교황님께서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공식적으로 초청장을 보내주면 방북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사실상 방북요청을 수락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과는 달리 2019년 2월 28일 트럼프와 김정은의 하노이 회담을 계기로 북한의 담은 더욱 높아지고 말았다. 아마도 하노이 회담의 분위기만 잘 이루어졌더라면 2019년 교황님과 김정은의 만남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측한 이들도 있었다. 그 이유로 2019년 2월 10일 가톨릭 자선단체인 '산테 지디오'(Sant 'Egidio) 창립 51주년 기념식에 주 이탈리아 북한 대사관의 고위외교관 2명(김천 대사 대리와 서기관)이 참석했다. 이 참석은 평양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교황청의 움직임도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2019년 1월 아미 교황청 내부 토론회에서 방북방침을 직접 밝혔었다. 또한, 이미 중국 관련 업무를 맡고 있던 교황청팀에 평양과의 교황 방북 실무협상을 준비하도록 했다. 바티칸과 평양이 직접 협상을 한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서다.

 

  이러한 바티칸의 움직임과 더불어 한국 정부도 드러나지 않지만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하려 했었다. 2차 북미 정상회담(하노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전망하고, 이어 남북정상회담에서 교황님의 방북을 전격 논의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하노이 회담 실패로 인해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가 전환되었다고 본다. 미국은 트럼프 체제에서 교황님과 친밀한 관계로 알려진 바이든 체제로 바뀌었고, 현 정부도 기존에 준비했던 교황님의 방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2021년 10월 있을 로마 G20 정상회의 중에 교황님께서 바이든 대통령과 독대하며 대북관련 인도주의적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까 예측해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교황님의 방북은 '평화의 사도'의 행보로 바라볼 수 있다. 방북을 계기로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이고, 북한의 비핵화, 북미 관계의 개선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노력이 제대로 공조되다면 한반도 평화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권지훈 베드로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교회와 나'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4. 교회(하느님의 백성)의 직무와 과제 ②-하느님의 백성의 삼중직무(상)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이 물음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하며 김대건 신부님은 자신의 신앙을 목숨으로 증거한다. 바로 이 말, "나는 천주교인", 곧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안에 실로 우리 신앙의 핵심이 들어 있다. 이 말 한마디로 동. 서양을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는다! '나는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증거하는 사람,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모인 하느님 백성의 직무는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모인 하느님 백성의 직무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직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왕직, 사제직, 예언 직임을 지난 회에 보았다면, 이제 이 삼중직무의 의미와 그것의 실행에 대해 살필 차례다. 이 삼중직무의 실행이 교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에게 다 같이 해당됨을 염두에 두면서, 이 직무를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와 관련시켜 이해해보도록 하자.

 

  첫째, 교회의 왕직이다. 이는 사목적으로 바꿔 쓸 수 있는 직무로, 예수께서 당신을 '길'로 제시하신 것과 관련하여 '길 공동체'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왕직의 핵심은 세상 임금들의 백성 위에 군립하고 세도를 부리는 것과 달리 백성을 섬긴다는 것에 있다.(마르 10,42-45 참조) 바로 그 점에서 예수님은 길이시며, 또한 길 안내자로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신다. 여기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는 말씀은 왕직(사목직)을 이해하는 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 당신 생명을 양들을 우해 바침으로써 (요한 10,11 참조) 참 목자가 되셨다면, 일생을 남을 위한 헌신으로 섬기는 것이 곧 다스리는 것임을 보여주셨다면, 하느님의 백성 또한 길이신 그분을 따라 타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분이 보여주신 왕다운 본질적으로 봉사직이다. 권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섬기는 사랑으로 공동체와 이웃에게 봉사하며 실행해 나가야 할 직무이다.

 

  둘째, 교회의 예언(자) 직이다. 예언직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직무로, 예수님 스스로 진리의 전달자이시며 동시에 진리이신 것에 따라 '진리 공동체'의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님 자신이 핵심 내용이며 완성이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어떤 다른 요소를 가감할 수 없고, 다만 이 계시 내용을 만민에게 설명하며 전파할 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파견되신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 또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파견된다. 이 예언직은 여러 가지 형태로 수행할 수 있는데, 말과 글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는 방법이 있고, 생활한 실천으로써 타인에게 믿는 내용을 증거하는 방법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가르침'은 오직 그리스도 사건을 둘러싸고 있을 때만 가치가 있고, 따라서 그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언직은 교회의 기초로써(에페 2,20 참조), 공동체 건설에 기여한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 교구내 공소

당진성당 구룡리공소


  박해 이후 합덕성당 관할인 구룡리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1901년경 사근절,대화(大化),사기소리(새터)에 공소가 있었다. 대화공소에 교우가 증가하면서 구룡리를 대표하는 공소가 되었다. 1899년 뮈텔 주교가 공소방문을 했던 유서깊은 공소로,초대 심 회장에 이어 1909년 2대 전치삼(바오로)회장도 구룡리에 옹기점을 운영하였다. 옹기업 종사자들을 포함한 교우수가 300명이 되었다. 1926년 13칸반 규모의 강당을 건립하였고, 1939년 대화리공소(구룡리)는 당진본당으로 이관되었다. 현재의 공소는 1947년 한옥목조(건축면적 82.75㎡)로 건축되었다. 현재 7가구에 10여명의 교우가 판공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9)>

 

"새우는 바다의 과일 같은 거야. 바비큐 해 먹어도 되고, 끓이기, 굽기, 볶기 다 돼. 새우 산적, 새우 수프, 새우 스튜, 새우 샐러드, 새우 버거, 새우 샌드위치, 파인애플 얹은 새우, 레몬 얹은 새우, 코코넛 얹은 새우, 고추 얹은 새우.."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새우 타령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포레스트 검프의 가장 친한 군대 동기 '버바'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병영생활 중 버바는 입만 열면 검프에게 새우에 대해 쉴 새 없이 계속 이야기합니다. 조상 대대로 새우에 관련된 일을 해왔고, 본인도 9살 때부터 새우잡이 배를  탔으니 새우에 관해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버바에겐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포레스트 검프>를 다시 보게 되면서, 예전에는 그냥 가볍게 스쳐 지나쳤던 버바의 장황한 새우타령이 이 영화의 가장 멋진 명대사로 제 귀에 들리기 시작한 건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불편한 다리와 남들에 비해 2% 부족한 지능을 갖고 세상을 살아갈 포레스트 검프 옆에서 새우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계속 들려주는 버바가 제겐 주님의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버바의 새우타령은 그저 새우에 대한 흥미로운 수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다양한 쓰임새를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예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새우마저도 그렇게 다양한 쓰임새를 지녔는데, 하물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떨까요? 새우가 바다의 과일이라면, 우리 또한 인생이란 숲의 과일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포레스트 검프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달리다 보니 그는 미식축구 선구가 되고, 군대에서 훈장을 받고, 새우잡이로 사업에 성공하고, 그리고 결국 한 아이의 다정한 아빠가 됩니다.

 

  버바의 예언이 맞았습니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있기엔 나무도 아까운 하루였습니다. 나도 밖에 나가 한참을 달려 봐야겠습니다. 내가 또 어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살아갈지 상상하며 달리다 보면, 코에 와 닿는 공기 속에서 오늘은 왠지 새우 향기가  한가득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구걸하다'와

'베풀다'.

 

사랑에 대한

형용사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실 런지요.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미얀마 민주화투쟁지지 목소리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페 6,15)을 선포하고, 이 위대한 보편선을 수호하는 데에 모든 국가 권위와 국제 권위와 협력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평화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호하면서(에페 2,14), 세례 받은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일꾼이 되고 화해를 이룬 삶의 믿을 만한 증인이 되라고 촉구합니다.

---복음의 기쁨 중에서---

 

  미얀마에서 지난 2월 1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미얀마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한국에서 전두환 군부에 의한 광주학살사건이 있었습니다. 2021년 2월, 미얀마 시민들이 그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들고 있는 박스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Just "700" Peopld killed in "700"Days.

(70일 동안 단지 700명이 죽었다.)

Take your time UN

(유엔, 천천히 해라)

WE STILL, GOT "Millions" Left.

(아직 (죽을 사람이) 수백만 명이 남아있다.)

 

 사진이 한 장 더 떠오릅니다. 연세드신 수녀님 한분이 총을 든 군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만 멈추라는 듯 군부를 향해 애원하시는... 인간 중심의 생태를 꿈꾸는 그리스도 인들이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으로 얼룩진 시간들 속에 자신이 있기를 거부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