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부창동 성당 연산 공소
충청남도 논산시 선비로 275번길 17-4(연산면 청동일 581-4)
+마르코 복음 14,12-16.22-26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 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 다 차려라."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
<말씀의 향기>
"받아라.이는 내 몸이다." -이은기 미카엘 청소년국 차장
우리들은 매 미사 때에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성찬례를 거행합니다. 성령께 대한 사제의 청원으로 미사 때에 납작한 밀가루 빵과 포도주는 지극히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믿어 고백하며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라고 하셨을까요?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해던 것일까요?
예수님 시대에 인간의 '몸'은 외적인 활동의 그릇을, '피'는 생명과 영혼을 상징했습니다. 그렇기에 몸과 피는 인간의 전존재, 곧 모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다는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겠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들은 매 미사 때에 영성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마저 내어 주려고 하듯,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내어 주시려고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통해 말을 건네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서 나를 따라 살아가면서 좋은 일도 있고, 분명 힘들고 아픈 일들도 생기겠지만 그 힘들고 어려울 때에 나는 너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통해 당신의 전존재를 내어 주십니다. 그럼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에 이것만 기억하면 될까요?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저녁식사 준비는 예수님께서 직접하지 않고, 제자들이 마련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수난 전 마지막 식사이기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몸소 준비해 주실 수도 있을 텐데요. 예수님께선 이 구원의 식탁에 우리의 역할, 움직임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역할은 단순히 미사 전에 제병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직접 살아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사랑을 했던 사람은 예수님이 내어 주시는 사랑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이를 향한 희생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고뇌와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과 희생의 시간 안에서 우린 성체 안에 담긴 예수님의 존재를 더 깊이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이 동반될 때, 우리는 성체 안에 담긴 그분의 사랑을 더욱 깊이 마주하며 그분의 더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번 내 삶으로 예수님께서 오실 구원의 식탁을 마련해 봅시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그린어스 greenus
가장 푸르고 싱그러워야 할 5월인데 잿빛 하늘을 더 자주 보게 된다. 미세먼지와 잦은 비로 쾌청한 하늘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다. 5월 관측 사상 최고로 더운 날씨를 기록하더니 밤에는 영하에 가까운 기온이 작물들에게 냉해를 입히고 있다. 추운 날씨와 잦은 비에 꽃은 제대로 피지 못하거나 벌들의 활동이 위축되어 과일나무는 수정이 잘 되질 않았고, 고추, 토마토 등의 밭작물들도 제대로 자라나지를 못하고 있다.
작년 봄의 기나긴 54일 동안의 장마로 말미암아 나무들이 해를 보지 못해 광합성에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실뿌리들이 녹아내리는 일을 겪었다. 그리하여 그해 가을의 과일이 크기도 작고 맛도 영 싱거웠었다. 작년의 험한 세월을 몸에 새긴 나무들이 용케 지난 겨울의 혹한을 견뎌냈다고 해도 부실해진 뿌리와 몸집으로 또 이 봄의 이상기후를 만나 잔인한 5월을 건너가고 있다.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 기후변화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도시민으로 살면서 겪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식과 같이 귀한 작물들이 녹아나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농민들에게 잿빛 하늘은 '기후위기'이며 기나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재난'이라고 불러야 맞는 것이다.
재난이 일상이 되어 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학자들은 코로나가 지나가더라도 그 이후에는 기후 변화로 말미암아 인류가 감당해 낼 수 없는 재난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백신을 맞고 자유로워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지구에 부담이 되는 생활로 되돌아갈 일이 아니라 이제는 회개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역량을 지구의 온도를 낮추는 데 집중하여야 한다.
한국천주교회는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효과적인 농사를 짓고 있는 유기 농부들을 보호하는 사목을 하고 있으니, 바로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이다. '우리 농'에서 대흥동 가톨릭 문화회관 1층에 유기 농부들을 지원하고자 '그린어스(greenus)'라는 카페를 열었다. 부디 이 자리가 생태적 회개의 바람이 일어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강승수 요셉 신부 대전가톨릭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
'교회와 나'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4. 교회(하느님의 백성)의 직무와 과제 ① - 하느님의 백성은 무슨 일을 하는가?
모세는 (부르심을 받기 전)양을 치고 있었고, 다윗도 그랬고, 베드로는 어부였고 마태오는 세리였다. 목자, 어부, 세리, 농부, 교사, 간호사... 등은 직업명이다. 그것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교회, 곧 '하느님의 백성'은 무슨 일을 하는가? 어떤 일로 '하느님의 백성'인 것을 드러내는가? 바로 그것을 이제 살펴보기로 하자.
'하느님의 백성'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대한 모든 진술을 해석하는 기본원리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앞서 함께 보았다. 그런데 이 기본원리가 특히 교회(하느님의 백성)의 '직무'가 무엇인가를 진술하는 것에 적용된다. 이 직무론을 통해 공의화는 교회에 대한 총체적 숙고에서 관점의 변화를 이뤄냈고, 바로 이 관점의 변화가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게 되는 핵심적 요인이 된다. 그것은 곧 교계제도적 직무에 기초한 전래적인 신분적 사고를 극복하고,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교회 자체가 되기 위해 메시아적, 사제적, 예언적 과제를 실현하는 것에로 불리었다는 새로운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이 공의회 이전까지 종종 자행되었고 그리하여 모든 해결을 방해하는 한 오류는 교계제도적 직무와 교회의 직무를 동등시하는 것이다. 곧 트리엔트 공의화 이후의 전통은 두-직무론을 옹호했는데, 두 직무란 재치권(裁治權: 관할권의 의미로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 교도권 및 성품권과 구별해 협의의 사목권이라고도 불림)과 성품권(성사권: 하느님 나라 일에 봉직하는 직무를 성직이라 하고 이 성직에 서임되는 것을 성품이라 함)을 말한다. 이 두 직무는 이미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교계제도에 국한되어 있는 직무로,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라 교도권(교황을 비롯한 주교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나 가르치는 권한을 가리킴)의 행위는 판결(재판)의 임무이고 그리하여 자연히 신자들을 다스리고 지도하는 역할을 하면서 그것을 교회의 역할로 여겨왔다.
이에 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직무론을 옹호한다. 그것은 왕적, 사제적, 예언적 직무이며, 이 세 가지가 총체적으로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의 직무들이다. 그런데 이 세 직무가 어디에서 연원하고 있는지, 곧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지난 회에 얼핏 보았듯, 이 직무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바로 그분의 직무가 곧 그 백성들의 직무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백성(교회)은 교계제도나 평신도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을 함께 불러 예언자로 가르치시고 왕으로 이끄시며 사제로 성화시키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며, 그런 까닭에 이 공동체의 생성과 발전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직무이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 사제직, 예언직이 바로 하느님 백성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직무이며, 이것이 곧 하느님의 백성이 하는 일이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교구내 공소 논산 부창동 성당 연산공소 1954년경 논산본당 생제 신부 재임 시기에 연산리 시장 내 가옥을 매입하고 그곳에서 공소를 시작하였다. 2km 떨어진 점촌공소 교우들이 공소 전례에 참례하는 등 초대 정덕모 아릭스 회장의 전교에 힘입어 신자수는 200명이 넘었다. 1982년 청동리 소재 전매소 창고를 임대하여 공소로 사용하다가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재의 건물(시멘트벽돌조,142.26㎡)은 1986년 3월에 착공하여 6월 22일 준공했다. 1992년 성모상을 설치하였고,2011년 대수리를 실시하여 정면에 출입구 홀을 설치하고 정면 외벽에 드라이비트를 시공하였다. 현재 30여 가구에 25여 명의 교우가 정지적인 공소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8)>
희생은 회생이다
본인이 직접 운동하는 것보다 남이 하는 운동경기 보는 걸 더 즐기는 게 문제라며 주치의 선 생님은 제발 운동 좀 하라고 제게 건강 조언을 해 주십니다.
머리로는 충분히 납득되는 이 조언을 두 발로 성실하게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의 게으름 탓도 있겠지만, 운동경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짜릿함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저는 특히 야구경기를 좋아합니다. 모든 운동경기가 저마다 고유한 매력을 지니지만, 야구에는 다른 종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야구만의 독특한 경기 방식이 있어 참 좋습니다.
'희생번트'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투수가 던진 공에 야구 방망이를 살짝 대는 것이 전부인 번트는 타자 입장에서는 매우 굴욕적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번트가 매우 결정적인 순간에 팀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다면 선수들은 아낌없이 멋지고 힘찬 타격을 포기하고 자신의 희생을 선택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 점수를 인정하는 야구만의 이 독특한 규칙은,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마저도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희생'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걸 우리는 희생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나를 위한 인내의 행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내가 아니라, 내 이웃의 '회생'을 위해 고통을 견뎌낼 때만 쓸 수 있는 고귀한 단어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줌으로써 우리 모두를 회생기켜 주는 기적을 보여 주신 예수님..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 놀랍고 눈물겨운 희생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벗어나 비로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순국선열의 희생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날입니다. 그분들의 소중한 희생으로 이 땅에서 사라질 뻔했던 평화가 회생되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들처럼 우리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평화를 회생기켜 주신 순국선열님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평한하시길 온 마음을 담아 기도드립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지극히 거룩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그 사랑과 희생을
그 평화를
기억하고 실행하여야 하는
우리는
"천주교인입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핵기술과 교회의 가르침
◎ 핵무기와 핵발전, 곧 핵기술은 생명체 자체는 물론 생태계 전체를 교란시키고, 회복 불능의 상태로 내몰아,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 무생물, 미래의 모든 생명체의 삶의 환경권을 침해한다. 비록 관학 지상주의와 결합한 실용적 공리주의의 위세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그래서 핵기술이 갖는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장담하더라도, 인류는 그것이 오만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 핵사고는 다른 사고와 달리 생태계에 회복 불능의 훼손을 영구적으로 남긴다. 다른 모든 기술과는 달리 핵시술에는 '오염자 부담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용시킬 수도 없다. 그만큼 핵기술은 환경의 권리와 양립할 수 없다.(핵기술과 교회의 가르침 121.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 얼마 전 경주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고 변형되어 뉴스에서 몇 일간 사고내용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담벼락이 무너지고, 거리에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뉴스의 장면들이 기억이 납니다. 사실 문화재야 다시 북구하고 수리해서 옛것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경주 인근에 있는 울진 원자력 발전소(6기)나 부산 고리 원자력발전소(8기)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방류문제와 체르노빌 원전서 새로운 핵분열 반응 조짐은 지금 이 시대,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21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중 제12주일 2021년 6월 20일(나해) (0) | 2021.06.21 |
---|---|
연중 제11주일 2021년 6월 13일(나해) (0) | 2021.06.14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2021년 5월 30일(나해) (0) | 2021.05.30 |
성령 강림 대축일 2021년 5월 23일(나해) (0) | 2021.05.24 |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2021년 5월 16일(나해) (0) | 2021.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