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5년 주보

대림 제4주일 2015년 12월 20일(다해)

모든 2 2015. 12. 20. 21:30

신리성지성당(당진지구)

본당 설립:2009.1.14/주보성인:성 다블뤼 안토니오 성 손자선 토마스

 

+ 루카복음.1,39-4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말씀의 향기>

 

주님을 알아본 여인 - 정호영 로베르토 논산 내동 주임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천주강생의 신비를 준비하는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기쁨에 넘친 외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었고 나이도 많았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소모와 부끄러움의 대상이었기에 좌절 속에 기가 죽어 살아가는 딱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 즈가리야가 천사의 전갈을 받게 되었고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받은 치욕을 씻고 주님의 보살핌을 느끼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처녀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엘리사벳은 이 모든 기쁨의 원천이 마리아 태중의 아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엄청난 신비와 마주친 것입니다. 그 즉시 깨닫는 엄청난 신비와 마주친 것입니다. 그 즉시 이 아기가 주님이시고, 이 여인이 주님의 어머니임을 일목요연하게 알아본 것입니다. 이 평생 동안 받은 수치를 벗게 된 근본 원천이 이 아기임을 알아본 것은 아무나 맞이할 수 없는 신비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기쁨은 그 근본 원천이 주님이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매일의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외적 모습에만 연연해 살아간다면, 그 근원을 흐르는 내면의 삶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원천적인 것, 근원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외적인 면만 본다면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어느 조그만 산골에 살면서 평생 아이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무시당해 온 한 여인에게 늘그막에 아들을 얻는 복을 받았다는 별것 아닌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주님을 만난 체험은 엄청난 삶의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삶의 변화가 이 여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내가 조금 더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린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어찌 보면 외적인 삶이 보잘것없어 보일 때 오히려 내적인 삶의 풍요와 여유가 가능한 듯 보입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워지기 위해서 각자의 큰 주머니를 만들고 그곳에 세상 모든 것을 다 집어넣어 보려고 하지만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이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에 주님께 봉헌할 나의 내면적인 삶은 무엇인지 준비해 보면 좋겠습니다.

 

 

'자비의 희년' 안내(하)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모토와 로고 설명

  자비의 특별 희년 모토와 로고는 이번 희년의 의미와 이상,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희년을 지내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6장 36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를 참조한 모토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Misericordes sicut Pater)는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자비-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넘치게 사랑하고 용서하라.(루가 6,35.37-38 참조)-의 본보기를 따르라는 초대입니다.

 

  희년의 로고는 루프니크 신부(Fr.Marko I.Rupnik)의 작품으로 자비라는 주제를 명확하고 종합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강생의 신비를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인류를 향한 사랑을 묘사하고 있는 이 로고는, 착한 목자께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사랑으로 인간의 육신을 깊이 어루만져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로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착한 목자께서 당신의 크신 자비를 드러내시며 인류를 상징하는 아담을 어깨에 짊어지시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눈과 아담의 눈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눈으로 보시고, 아담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아담, 각자의 인성, 다가올 미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상징하는 아담을 짊어지고 있는 형상은 고대로부터 성상(聖像)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요소인 만돌라(Manorla, 편도[扁桃] 형상) 안에 그려져,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현존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타원형은 작은 원에서 더 큰 원으로 나아갈수록 그 색깔이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역동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대로 안을 향해서 그 색깔이 점점 짙어지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비의 선교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칙서「자비의 얼굴」 18항에서 '자비의 선교사'파견을 언급하십니다. 이들은 하느님 배경을 보살피는 교회의 어머니다운 배려의 표지가 되어 자비의 신비가 지닌 부요함에 하느님 백성이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희년 기간 동안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교황님은 자비의 선교사들에게 사도좌에만 유보되어 있는 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한시적으로 허락하시며, 이들이 참으로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 해방의 원천이 되고 장애를 극복하며 세례의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도록 돕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실 것입니다.

 

  자비의 선교사들은 교구장 주교님의 추천을 통해 선정되며 돌아오는 재의 수요일 성 베드로 대성전의 예식에서 파견될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서는 네 분의 신부님을 자비의 선교사 후보로 교황청에 승인 요청을 드렸으며, 선발된 교구 자비의 선교사 신부님들은 희년 기간 동안 우리 교구 내에서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의현 신부/성소국장 겸 교구 자비의 희년 담당-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90)>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소유의 허망, 공유의 기쁨

 

 작가를 꿈꾸며 틈만 나면 시와 소설을 읽곤 했던 문학 소년 시절...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제일 먼저 읽었던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이 오는 숲가에 서서"라는 시였습니다.

 

   처음 이 시에 눈길이 가게 된 것은 유혹적인 시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매서운 추위로 밖에 나간다는 건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겨울밤..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눈 오는 날 저녁 숲가에 서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충분히 설렜었습니다.

 

   제목만큼이나 시 내용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조랑말을 타고 길을 가던 나그네가 눈 내리는 겨울 저녁 한적한 숲 앞에 멈춰 황홀한 설경에 마음을 빼앗겼으나, 가야 할 길이 아쉽지만 발길을 옮기는 모습은 마치 멋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듯 아름다웠으니까요.

 

   하지만 제게 있어 이 시의 최고의 매력은 엉뚱하게도 시 속에 잠깐 등장하는 숲의 주인에 대한 묘사에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말합니다. 숲의 주인은 그의 집이 마을에 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소유한 이 숲의 멋진 풍경을 나처럼 볼 수 없으리라고.

 

   소유한다고 그것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님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숲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지 숲을 팔 수 있는 재산으로 갖고 있는 것일 뿐, 그 숲의 봄, 여름, 가을, 겨울마저 모두 소유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숲의 주인은 분명 숲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을겁니다. 숲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숲을 잘 알아야 했을 테니까요. 숲의 위치, 숲의 면적, 숲에 있는 나무들의 가치 등 그는 정말 숲에 대해 많은 걸 조사하고 계산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일 년 중 숲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어느 때인지, 아침에 보는 숲과 저녁에 보는 숲은 어떻게 다른지, 숲으로 난 길들이 얼마나 멋지게 굽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을까요? 그런 것들을 모른 채 숲이 나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것의 전부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일부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에 살며 숲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족은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소유의 부질없음과 공유의 아름다움을 일깨우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하며 성당을 향해 발길을 옮겨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시는 분께

기쁘게 노래하며

몸과 마음으로

영광을 올립니다.

 

Agnus Dei!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매일 아침 일찍 우리 집에 오는 요양보호사가 출근 체크와 함께 '지팡이가 안 보이네요?'라며 마치 지팡이 주인처럼 정이 궁금해했다. 보호사는 전날 마리아와 함께 복지관 목욕을 다녀왔었다. 차에 두고 깜빡했다는 말에 활짝 웃음을 지으며 '오늘 서울에서 내려오는 친구들과 만날 장소엔 어떻게 가느냐?'라고 자신의 일처럼 또 걱정했다.

 

  요양보호사는 마리아가 5년 전 건강보험공단의 재가 장기요양보호자로서 지정된 후부터 매주 5일 요양수급을 해 온 터.그런데 마리아의 요양기간이 10월로써 끝나게 되며 요양수급은 물론 75세가 넘는 우리 부부만의 일상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가 큰 어려움으로 떠오른 것이다.

 

  요양보호사에게는 장기요양보호로 인증된 65세 이상 노인에게만 요양수급을 다닐 수 있는 것이라 그간 수급을 받아온 정만 내세워 와 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가사도우미 대우를 하며 부를 수도 없는 만만찮은 인건비가 고개를 드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처지를 잘 하는 요양보호사는 그렇다고 선뜻 가사도우미의 인건비를 요구하며 온다고 할 수 없어 고민해 왔다는 것. 아내의 이런 고민을 들은 그녀의 남편이 '내가 한탕 더 뛸 터이니 정든 집에 종전처럼 그대로 다니라'고 밀어주어 '그대로 오기로 했다'고 밝힌 뒤 처음 온 요양보호사의 첫 걱정은 지팡이였다.

 

  새벽부터 기도를 봉헌해 주님의 응답이란 은총을 받은 마리아와 요양보호사에게 감사하며 유성성당 설립 50주년 감사미사 주례를 맡아주셨던 유 라자로 주교님께서 성경필사에 주신 축복장과 묵주 앞에 서서 감사 드리며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힘쓸 것을 다짐하는 값진 계기로 삼았다.

 

 -박천규 대건 안드레아/유성 성당-

 

 

 

김수환 추기경님이 천국에서 보내주신 편지

 

사랑하고 사랑하는 신부님... 수녀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베푼 보잘것없는 사랑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선택된 자로 살아온 제가

죽은 후에도 이렇듯 많은 분들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니...

 

나는 행복에 겨운 사람입니다.

감사하며... 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생전에

하지 못한 마지막 부탁이 하나 있어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불교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을 쳐다본다."

 

달은 하느님이시고... 저는 손가락입니다.

제가 그나마 그런대로 욕 많이 안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의 덕분입니다.

 

성직자로 높은 지위에 까지 오른 것도...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다 그분의 덕입니다.

 

속으론 겁이 나면서도...

권력에 맞설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다 그분의 덕입니다.

 

부자들과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는

유혹이 많았지만...

 

노숙자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다 그분의 덕입니다.

 

화가 나... 울화가 치밀 때도...

잘 참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의 덕입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유머로 넘긴 것도...

사실은 다 그분의 덕입니다.

 

나중에 내가 보고도 약간은 놀란

내가 쓴 글 솜씨도...

사실은 다 그분의 솜씨였습니다.

 

 

내가 한 여러 말들...

사실은 2천 년 전 그분이 다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의 덕이 아닌... 내 능력과...

내 솜씨만으로 한일들도 많습니다.

 

 

빈민촌에서 자고 가시라고 그렇게

붙드는 분에게...

적당히 핑계 대고 떠났지만...

 

사실은 화장실이 불편할 것 같아

피한 것이었습니다.

 

늘 신자들과 국민들만을 생각했어야 했지만...

때로는 어머니 생각에 빠져...

많이 소홀히 한 적도 있습니다.

 

병상에서 너무 아파...

신자들에게는 고통 중에도 기도하라고 했지만...

정작 나도 기도를 잊은 적도 있습니다.

 

이렇듯 저는 여러분과 다를 바 없는...

아니 훨씬 못한...

나약하고 죄 많은 인간에 불과합니다.

 

이제... 저를 이끄신 그분...

죽음도 없고, 끝도 없으신 그분을 쳐다보십시오.

 

그분만이 우리 모두의 존재 이유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실 제가 한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손가락 일 뿐입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분을 쳐다보십시오.

 

천국에서 김수환 스테파노(여기서는 더 이상 추기경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