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성당 추부 공소
충청남도 금산군 하마전로 45(추부면 마전리 395-8)
+ 요한 복음 15,9-17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 들을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서로 사랑하여라."
<말씀의 향기>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박진수 사도요한 온양 보좌
누군가를 사랑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됩니까? 먼저 그 사람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유심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라본 바를 통해 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게 되며, 그 사람 안에 머물며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사랑한다.'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비워내고, 사랑하는 '너'로 채우는 것, 그리하여 결국 '내'가 '너'의 안에서 살아감으로 '너'의 기쁨과 슬픔이 '나'의 기쁨과 슬픔이 되어 그 안에 머무르고, 그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사랑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머무르고자 하십니다. 우리 안에 당신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우리 안에 머무르고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머무르고자 하십니다. 우리 안에 당신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고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 자신을 비우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심으로써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우리가 참된 행복과 평화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어렵게 하는 고통과 슬픔, 아픔들을 모두 당신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사랑하는 우리의 기쁨이 더욱 충만해질 수 있도록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면 우리는 참된 행복과 평화,기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우리는 이 사랑 안에 머무르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참된 행복과 평화, 기쁨이라는 열매를 얻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 계명 또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제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곧,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다가오셨듯이, 내 이웃의 기쁨과 슬픔이 나의 기쁨과 슬픔이었듯이, 내 이웃의 기쁨과 슬픔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닌 나의 기쁨과 슬픔이 되는 모습, 곧, 서로가 서로 안에 머무르고, 서로가 서로의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는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행복과 평화, 기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국립통일교육원'에서 말하는 한반도에서의 평화통일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을 이해하기 위한 본격적인 개념으로 평화와 평화주의가 부상하였다. 북한의 대량살상 무기 보유, 한반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필요성, 동북아 주변 정세의 급변 등으로 인해 평화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우리 사회에서도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통일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급부상하고 있다. 통일이 전쟁 위협을 제거하는 데 필요하다는 국민의 생각은 전쟁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해된다.
이렇듯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전쟁 위협의 제거와 평화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통일 그 자체가 평화적 수단과 절차로 달성해야 하는 목표일 수도 있겠지만 그를 넘어서 통일을 한반도에서 평화로운 공동체를 실현하는 일종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통일은 결과이거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한반도에서 통일은 평화를 실현하는 새로운 출발이며 통일 이후 한반도는 국토 통일이나 민족 통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인권, 평등, 자유, 다원성 등이 보장되는 평화공동체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전문부터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인류 보편의 방향성과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열망이 동시에 담겨 있다. 헌법 전문에는 '평화적 통일의 사면,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등이 규정되었고, 제5조에서는 '국제평화 유지 노력, 침략적 전쟁 부인'등을 제시하며 평화에의 지향성을 뚜렷하게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보편적 의미에서나 지역적 특수성에 있어서나 다 같이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이다. 각자가 가진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넘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통일은 평화통일이다.
평화적인 통일은 평화적인 삶을 지향한다. 한반도 통일의 지향점은 한반도 내에서 결핍과 갈등 없이 모든 사람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평화로운 세상이다. 궁극적으로 평화는 사회적,경제적 부정의가 없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상을 꿈꾼다. 물론 아직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남북한은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며, 서로 다른 이념과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지내왔다. 남북한의 이질적 요소들은 상호 소통과 이해의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통일의 문제를 둘러싸고 대한민국 내에서도 갈등과 이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갈등의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의 과정 역시 평화적이어야 한다. 이 과정은 어렵고 더딘 과정일 것이며 많은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권지훈 베드로 신부 대전 교구민족화해위원회-
'교회와 나'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3. 교회 쇄신의 시작 : 공의회의 교회 이해 ②-왜 하느님의 백성인가?(상)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어머니 품처럼 모든 것을 끌어안는 놀라운 은총의 표현을 부디 마음속에 새겨두시길! 이는 제2차 바티간 공의회가 이해한 교회 개념으로 그것의 가장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특징은(지난 회에 보았듯) 교회와 백성 사이의 분리의 벽을 극복하고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 곧 '분리'가 아니라 '일치', '하나'인 것이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는 본디 하나의 교회 아니었던가! 그 토대 위에서 '하느님의 백성'은(본래 하나이면서) 새로이 전체로서의 하나를 향해 보다 심화되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나아간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 극복해 낸 장벽이 비단 교계제도와 평신도 사이뿐만 아님을 이미 암시한다. 곧 하느님의 백성은 이 공의회 교회론의 기초이자 핵심 개념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공의회의 교회에 대하여 가르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풀어내고 이해하게 하는 열쇠가 된다. 그러면 이 하느님의 백성에 감추어진 또 다른 의미들은 무엇인가? 이제 이 새로운 교회상 '하느님의 백성'이 종전의 교회 개념에 비하여 무엇이 얼마나 크게 달라졌고 또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차이와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하느님의 백성'은 '백성'이라는 인격적 개념을 취함으로써 종전까지 이어져 온 '제도'의 개념을 극복하고, 교회가 제도 이상의 인격적 공동체임을 분명히 한다. 공의회 이전의 교회론은 교회를 '완전한 사회'로 보면서 교회 안에는 어떠한 죄의 요소도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하고, 그것이 교계제도로써 유지, 존속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입장은 비록 당대의 오류에 맞서 가톨릭 교회를 지키려는 의도였다 해도, 교회의 진정한 쇄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대정신에 방어적으로만 대응하여 교회 중심 권위의 한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교회는 곧 교계제도'라는 인격적 개념이 주는 또 다른 의미는, 선과 악의 성향을 함께 소유하고 있는 인간들의 공동체이니만큼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성인들과 죄인들의 공동체이므로 늘 쇄신으로 불림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겸손한 교회의 모습 역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의 백성'개념은 그 구성원의 평등성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교계제도(성직자)에 대한 신자(평신도)의 무리로서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을 포함한 전체로서의 하나의 교회이다. 본디 교회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모임'으로 그 자체로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교회는 이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일정한 신분이나 등급 또는 관청이나 집단일 뿐일 수는 없다. 그것을 넘어서서 교회는 언제나 어디서나 전체 하느님의 백성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H.Kung) 공의회 이전의 교회론은 교회 안의 여러 신분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평등성을 드러내지 못했다. 공의회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하느님 백성'개념으로 극복한 것이다. 곧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한 모두가 하느님 백성이며(「교회헌장」 30), 바로 이러한 교회 구성원의 평등성이 교회의 친교의 신비를 드러내는 바탕이 된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강사
* 교구내 공소 금산성당 추부공소 ![]() 추부 지역에는 1960년대 전후부터 교우가 거주하였으나 전교가 미약하였다. 1991년부터 박유섭 요셉 회장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교되어 1996년에는 신자수가 6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양해동 대건안드레아 회장 재임 시기인 1997년 경량철골구조의 공소건물(건축면적 271,28㎡)이 준공되었다. 대지 매입에는 금산본당 백요한 신부가 지원하였고,건축은 곽승룡 신부 재임 시기에 이루어졌다. 2008년경 신자수는 130명에 달하였다. 2014년부터 공소사목을 위해 나기순 신부가 파견되었고, 현재는 원로사목자로서 공소를 돌보고 있다. 현재는 30여 명의 교우가 정기적인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6)>
윤여정 씨 때문에
배우 윤여정 씨가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지자 이를 보고 있던 남편이 아내에게 한마디 합니다.
"축하해,여보,당신 친구가 큰 상 받았네?"
"내 친구? 윤여정 씨가 왜 내 친구야?"
"윤여정 씨도 일흔 다섯,당신도 일흔다섯.
"그러네, 듣고 보니 내 친구 맞네!"
엉뚱한 남편의 축하인사에 잠시 당황했던 아내는 이내 활짝 웃습니다. 그리고 정말 윤여정 씨가 동갑내기 친구인 것처럼 그녀의 수상 소식을 한결 더 기쁜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그런데 똑 같은 시간에 똑같은 뉴스를 시청하고 있던 옆집 노부부의 대화는 사뭇 달랐습니다. 먼저 남편이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한마디 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뭘 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TV보다 말고!"
"똑 같은 일흔다섯에 누구는 큰 상을 받는데 누구는.."
"기가 막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가 누굴 뭐래?"
윤여정 씨 때문에 어떤 집은 훈훈해졌고, 어떤 집은 냉랭해졌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윤여정 씨 때문이 아니라 윤여정 씨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타인의 기쁨을 내 행복과 연결하는 시선에는 사랑이 가득하지만, 타인의 기쁨을 내 불행과 비교하는 시선에는 원망만 잔뜩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기자 간담회에서 최고의 순간을 묻는 기자에게 윤여정 씨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최고라는 말이 싫어요. 우리 모두 '최중'의 삶을 살면 안 되나요?"
누가 최고이고, 어떤 순간이 최고인지 비교하지 말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그녀의 이 말은, 비교의 시선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명대사 중의 명대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 교수-
"오다 주웠다."
불쑥 내민 사랑
그것은 아마
오래 묵혀둔
새것일 겁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21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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