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1년 주보

부활 제5주일(생명주일) 2021년 5월 2일(나해)

모든 2 2021. 5. 2. 22:00

 

 

+  요한 복음 15,1-8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안에 머무러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는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생명의 주시는 하느님  -이상덕 우달리꼬 시노드사목연구소 차장

 

 

  어느덧 약동하는 생명의 원대한 힘을 느낄 수있는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풀과 나무는 해가 돌아오면 어김없이 푸른 잎과 꽃들을 피워 내며,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을 아름답게 드러내 보입니다.

 

  이와같이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넘치는 생명력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 생명력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살아 숨쉬게 될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의 숨을 막아버릴 수 도 있고,생명의 숨이 온 세상에 흘러넘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때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이 우리의 생명력을 막아버리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가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일회용품을 지양하고 생태친화적인 노력들을 일상 속에서 실천해나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우리는 현실 앞에서 어려운 상황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또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처럼 좌절하게 만드는 기업이나 국가 단위의 사업들이 우리의 마음을 꺾어 버립니다. 교회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생명운동을 펼쳐 나가지만,세상 사람들의 냉소 속에 죽어가는 생명들을 볼 때면 우리의 노력이 대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허무함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생명을 꽃피울 수 있는 복음의 씨앗을 뿌릴 분입니다. 그 씨앗을 싹 틔워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미약해 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은,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일으킨 기적인 셈입니다.우리에게도 이런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는데,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더 큰 기적과 표징을 마련해 두고 계실까요? 우리는세상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으며,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우리 자신부터 말과 혀가 아닌,우리의 삶으로써 복음을 살고, 하느님의 기쁨 안에 살며,생명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진리 안에 속해 있음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우리를 둘러싼 죽음의 문화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촛불이 되어 이 세상을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흙을 만지면서

 

    병은 알리라고 하는 말에 사연을 나누어 본다.

  얼마 전부터 가슴 한복판에 무너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무실에서 복잡하고 해결하기 힘들어 보이는 일에 대해 토론하거나 기나긴 마라톤 회의를 할 때면 이러한 증상이 생기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심호흡을 크게 하거나 '에헴!'을 크게 몇 차례 하면 가슴 무너지는 증상이 완화되곤 한다.

 

  몇몇 지인들에게 말씀드렸더니 얼른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라고 이르신다. 그 와중에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최근에 개강한 '도시농부학교'에 참가하고 있는데,하루 4시간의 학교 수업시간 중에 절반은 앉아서 듣는 강의고,절반은 퇴비도 만들어 보고 작물을 심고 가꾸어 보기도 하는 실습이다.

 

  엊그제 도시농부학교 강의를 듣는데 가슴이 무너지는 증상이 시작되기에 심호흡으로 다스리고 앉아 있다가 실습시간이 되었다. 장화로 갈아 신고 호미를 챙겨 드는데 이미 신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땅을 가볍게 일구고 토마토를 심고 물을 주고 났는데 이마에 땀이 약간 배어 나면서 봄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신통하게도 가슴 무너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함이었다.

 

  근래 들어 도시농업 인구가 많이 늘고 있는데 그 이유 중에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흙을 만지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과 몸의 긴장 완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흙을 밟지 않거나 전혀 만지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흙에서 나온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에서부터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종 질병에 쉽게 망가지고 마는 '기저 질환자'로 전락해 버린 것이 아닌가!

 

  주말농장도 좋고,도시텃밭을 분양받아도 좋고,배란다에 상추와 고추,토마토를 길러보시라.지친 몸과 마을에 생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체험하시리라!

 

-강승수 요셉 대전가톨릭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교회와 나'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3. 교회 쇄신의 시작: 공의회의 교회 이해①-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오로지'교회'가 무엇인지만을 들여다본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결국 교회를 두고 새로이 내린 정의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그런데 이 말이 그렇게 새로운 것인가? 오히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너무나도 친숙한 말 아니던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예레 30,22:에제 36,28 참조)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신,이'내(하느님)백성'이란 말씀을 거듭 두루 나타난다. 그러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해한 교회 개념,

'하느님의 백성'은 아무런 성서적.역사적 기원이나 관련없이 이 공의회에서 돌연 나타난 개념이 아니다. 원천적으로 교회는(온갖 약점과 결핍에도 불구하고)하느님의 공동체,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되어 왔다. 곧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럼에도 공의회 교부들이 그 숱한 토론과 고뇌와 성찰을 거쳐  이 옛(?) 개념을 다시 집어든 데에는 그에 합당한 연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은 우선,구약의 하느님 백성과 (신약의)교회와의 연속성을 표시한다. 그분 아니라 교회가 인류 역사의 변천과 성장 가운데 함께 하는 불안전한 공동체로서,늘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쇄신되어야 하고,그분 은총으로 온 인류와 더불어 구원되어야 할 실재임을 보여준다.

 

  이제 왜 공의회가 본래의 유산,'하느님의 백성'을 새로 택하게 되었는지 서서히 의문점이 풀릴 것 같다. 바로 '오랜 유산이자 거룩한 전통'을 오늘의 시대의 징표에 따라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해 낸 것이니라. 그렇다면 필시 이 '하느님의 백성'은 세월 따라 시대 따라 인류사와 교회사 안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헤매었던 것이 아닐까? 이에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성서적 개념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필 필요가 있겠다. 이 성서적 의미의 하느님의 백성 개념은 초기 교회,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한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세와 반종교개혁의 신학 안에서는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그리스도의(신비스런) 몸'이라는 개념 뒤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는데,그것은 교회는 곧 '완전한 사회'(societas perfecta)라는 의미와 맞닿았다. 이 제도적 교회의 의미를 담고 있는 '완전한 사회' 개념은 보통 '교계제도'로 이해되는,엄격한 위계질서적 구조를 가진 교회로서 교황,주교,사제들이 정상에 있었고, 이들이 모든 구원의 중개에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평신도(라오스)라는 교회 백성 역시 있었으나,이들은 엄격한 교계제도의 권위에 복종하며,참여나 공동책임의 고유한 권리가 없었으므로 '완전한 사회'로 이해되는 교회 밖의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바로 교회와 백성에 대한 이러한 이분된 이해를 극복했다. 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 아래,교회 안의 모든 구성원(성직자,수도자,평신도)이 각각 고유한 은사와 임무를 지니고 진정한 평등성 속에 전체로서의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명령을 하달 받는 기관이 아니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교구내 공소

금사리성당 용당리공소




  용당리(고당)공소는 1891년 퀴를리에 신부의 사목담당 지역으로 38명의 신자가 있었고 김재관 원선시오,강씨,이씨 집안의 교우들을 통해 신앙이 이어져갔다. 당시 교우들은 용당리에 본당 설립 계획을 펼쳤으나 공베르 신부는 1901년 금사리에 본당을 설립하였다. 1892년 경 공소에 학교가 설립되어 강 마지아 교사가 활동하였다.
공소예절은 1979년 현 공소를 건축하기 전까지 회장집에서 이루어졌다. 공소건물은 시멘트벽돌조(연면적 110.16㎡)로 박종우 신부 재임시기에 건립되었다. 1961년 교우수는 104명에 이르렀으나 인구의 감소로 현재는 30여 명의 교우가 정기적인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5)>

 

우리 앞의 생의 당신

 

  네가 아무 말 없어도

  내가 곁에 있을께

  네게 필요한 말은 오직 이뿐

  내가 곁에 있을께

 

  영화<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주제가 가사의 첫 부분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 이 노래가사만 읽으면 감정이 크게 흔들리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이 노래가사 한 자 한자가 화면에 펼쳐질 때 본인도 모르게 울먹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 영화는 상처에 못 박힌 두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상처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유대인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노년의 여인과 난민 신분으로 고아가 된 12살 소년 사이에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 했을까요?

 

  '연민'이 답이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박힌 상처에 대한 끈질긴 연민으로 두 사람 앞의 생은 조금씩 그 온기를 높여 갔습니다. 이 영화는 말합니다.상처는 이해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감싸주기 위해 있는 것임을..

 

  왜  말이 없고,왜 밉게 행동하고,왜 소리를 지르고,왜 도망치려 하는지 그 이유보다 더 중요한 건 그저 그때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라는 단순해 보이는 진실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주제가 가사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곁에 있을께

  널 알아보는 사람 없어도 난 널 알아볼께

  아무도 널 믿지 않아도 난 널 믿을께

 

  네, 주님,제가 원하고 또 원합니다. 아무 말 없고,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고,아무도 믿어 주지 않아도,언제나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길 원하고 또 원합니다. 내 앞의 생은 당신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교수-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제 11회 생명 주일 담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생명을 존중하는 입법을 촉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 성월에 첫 번째 주일인 5월 2일은 한국 교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정한 생명 주일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제20조 참조) 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국가는 국민의 존엄과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국가는 남성과 여성이 안정적으로 자녀를 낳아서 책임 있게 기르도록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제도와 법적 안전망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우리 사회는 낙태 찬성과 반대 여론으로 분열과 갈등이 심해졌고 입법은 공백 상태에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현실에 깊이 우려하며,수정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입법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1. 오늘날 많은 이가 인간 생명에 대한 공격을 시민의 권리로 국가가 인정해 달라는 법적 정당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헌법 재판소는 2019년 4월11일 형법상 낙태죄에 대하여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은 아니지만,2020년 12월 31일까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조화를 이루도록 법률을 개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생명은 수정된 순간부터 시작하는 것이므로 임신 단계에 따라 보호의 정도를 달리할 수는 없습니다.

 

  2.  정부는 2020년 10월 7일 낙태죄 관련 형법과 모자 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였는데,임시 초기인 14주까지 사실상 아무런 제한없이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낙태가 임신 초기에 이루어지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이는 국가가 나서서 태아 살인을 정당화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마저도 헌법 재판소가 정한 개정 시한을 넘긴 채 국회에서 방치됨으로써,지난해 말로 형법상 낙태죄 조항의 효력이 상실되는 입법 공백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결과 의료 현장에서는 태아의 생명과 산모의 건강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낙태죄을 둘러싼 논란들은 현대 문화의 특징인 윤리성 상대주의의 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법과 제도는 대부분이 민주주의의 원칙인 다수결의 원리,절충과 합의에 근거를 둡니다. 이런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하여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긍정적인 '시대의 징표'로 보아야"(「백주년」46항)하지만,민주주의를 우상화하여 도덕성의 대체물이나 비도덕성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의 도덕성은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성뿐만 아니라 동원하는 수단의 도덕성과도 긴밀히 결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사회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합법적인 것으로 규정할 때,이것이야말로 가장 약하고 보호 능력 없는인간 존재에 대하여 폭압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생명의 복음」70항 참조)

 

  4. 국가는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을 제정하고 적용하고 집행해야 합니다. 나약하고 무고한 태아를 살해하는 것은 어떠한 법으로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낙태를 승인하는 법은 개인의 고유한 생명 불가침권을 침해하고 공동선을 거스러므로, 진정한 법적 효력을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정부와 국회는 여성들이 안심하고 임신,출산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낙태의 위험성과 부작용에 대한 다양한 상담 지원,임부와 의사의 양심적 낙태 거부 권리 인정,생명을 존중하는 방향으로의 사회 문화 개선과 사회 복지 지원 등을 위한 입법이나 제도 개선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5. 향후 개정 보완된 법률이 통과되어 시행될 경우,그 법에 협력하는 것과 관련하여 양심상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을 거스르는 법을 따를 수 없습니다. 비록 국법이 허용하더라도 하느님의 법에 배치되는 행위에 명시적으로 협력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양심적으로 그러한 법들에 반대해야 할 중대하고도 명백한 의무가 있습니다. 불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거부는 도덕적 의무일 뿐 아니라 인간의 기본 권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사나 보건 종사자들,병원,진료소,요양 시설의 운영자들에게 생명을 거스르는 행위들의 상담,준비,실행 단계에 참여를 거부할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생명의 복음」74항)관련 법령의 입법과 시행 과정에서 이러한 점들이 충분히 고려되고 반영되리라 기대하지만 그러하지 못할 경우,양심의 법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에 대한 위협에 저항하고, 일치된 기도와 생명 교육,적극적인 홍보와 참여를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또 임신한 모든 여성이 안전하게 생명을 낳고 기를 수 있도록 동반해야 하며,이들이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잉태한 임부들과 새 생명들을 축복합니다.

 

2021년 5월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문희종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