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2년 주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2년 12월 30일(다해)

모든 2 2021. 4. 26. 23:57

「성가정」

이영배 그레고리오.대전가톨릭사진가회(2012)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2,51-52)

 

 

+ 루카 복음 2,41-52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고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

 

 

<말씀의 향기>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콜로 3,20) -하느님께 순종하듯! -이석우 비오 진산성지 주임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꼭 수행해야 할 인간의 본분이며 의무입니다. 이것의 첫걸음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해야 함은 성가정에서 자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과월절을 지내려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잃었던 아들 예수를 찾은 이야기입니다. 성모님께서 "얘야,우링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답합니다. 이 대화에서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성모님은 모든 일을 새기셨고,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순종하며 지냇다고 전합니다.

 

  오늘 날 많은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녀 간에 간격은 날로 벌어지고 있고,자녀의 부모에 대한 공경 또한 약해지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은 부모에 대한 순종의 정신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그리스도 가정 안에서 자녀된 도리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콜로 3,20 참조)

 

  그런데 이 순종의 정신을 자녀에게만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배우고 익힙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를 공하고 순종의 정신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분은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마칠 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얼마나 순종하며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자녀 된 도리입니다.

 

  한국의 첫 순교자인 하느님의 종,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참수 당하기 전에 "천주를 큰 부몰로 삼았으니,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증언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게 순명하는 삶이 성가정을 이루는 첫걸음이라 여겨집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신앙은 하느님 아버지를 공경하고,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될 때,우리 가정 안에서 자녀는 부모께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감싸는 아름다운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청소년 바로보기(5)>

 

청소년 이미지에 대한 편견(4)

 

  한국 전쟁 이후, 우리 나라는 지겹도록 반복되는 독재 정치와 부정 부패가 있어 왔고, 그 과정 안에 1960년 4.19 민주주의 혁명,1972년 유신 이후 독재정치에 대한 반대 운동들,1980년 8.15 광주 민주화운동,1987년 박종철,이한열 사건으로 불이 붙었던 민주 운동 등,수많은 반정부운동들이 있었으며,정부는 끊임없이 그렇게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매스컴을 통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덮어 씌워 갔던 것이지요.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지는 대한민국 정치 역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바로 그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자신도 모르게 청소년 하면 떠오르는 왠지 모를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며,그 이미지의 상당 부분이 우리 나라의 왜곡된 정치 역사 안에서 조작된 것들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사춘기는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성장과정에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시기를 맞이한 청소년을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청소년이 사춘기를 '사춘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현상(?)으로 이해를 하곤 합니다.

 

  저는 청소년의 사춘기와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청소년의 스트레스 현상(?)을 구분해서 볼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이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부모에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모습이나 또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자연발생적인 반항적인 모습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가 만나는 청소년의 스트레스 현상(?)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에게 주고 있는 잘못된 현상의 결과물들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현상을 '그 시기에는 그래!'라는 인식으로 사춘기와 혼용해서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청소년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마음 속에 담아둔 채 그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그것이 결국 청소년들과의 만남에서 단절을 체험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박진홍 신부.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성찬전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성찬례

 

 말씀전례는 보편지향기도로 마무리 되고 이제 성찬례가 시작됩니다. 성찬전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신 것을 재현하여 봉헌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시켜 주는 미사의 핵심적인 전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희망을 주셨고, 이 파스카의 신비가 성찬례를 통해 완벽하게 재현됩니다. 성찬전례를 집전하는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주관하여 십자가상의 제사를 다시,"지금이 자리에서"(Hic et numc)재현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원의 효과가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현실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51) 김정환 신부 . 내포교회사연구소

 

어머니와 아들:이성례(마리아),최양업(토마스)신부

 

이성례
(마리아)
1801년 충청도 홍주 출생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39세)
최양업
(토마스)
1821년 청양 다락골 출생
1861년 6월 15일 경북 문경에서 선종(40세)

 

  누군가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공로이다.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공로를 쌓아야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어머니들은 바로 천당에 다다를 자격이 있다.

 

  이성례(마리아)는 여섯 아이를 둔 어머니이다. 18살에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결혼하여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낳은 맏이가 최양없(토마스)신부이다. 다락골에 살 때는 살림이 넉넉하여 지낼만했으나 남편 최경환이 '이런 곳에서 교우들과 교류도 없이 살아가면 신앙생활에 좋지 않다."고 하여 고향을 떠나면서 큰 고생이 시작되었다. 좋은 농토를 버리고 서울로,강원도로 떠돌며 생활하다가 정착한 곳이 경기도 안양에 있는 수리산이었다. 이때 15살이던 맏아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성례는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세 살배기 막내는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성례와 더불어 감옥에 있었는데 젖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에 마음이 약해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배교하고 풀려났지만 큰 아들이 중국에 있다는 것이 알려져 다시 잡혀 들어갔다. 이후 이성례는 배교를 취소하였고 신앙을 고백하며 의연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맞섰다.

 

  한편 옥 밖에서 동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12살 둘째 아들 야고보의 활동은 참으로 대견하였다. 어머니의 사형 날짜가 결정되자 그동안 푼푼이 모은 돈을 몽땅 들고 희광이를 찾아갔다. 어머니의 생김새를 설명하며 부탁하기를 "우리 모친이니 칼을 갈아 행형하되 각별히 조심해 달라."며 단칼에 아픔 없이 죽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성례는 1840년 1월 서울 당고개에서 아들의 희망대로 단칼에 순교하였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하여 조선 팔도를 두루 다니며 활동하였다. 틈틈이 기록도 남겼는데 당시 교우들의 모습을 이렇게 남겼다.

 

  "단 한 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큰 은총입니다. 더 자주 걷는 것쯤은 오히려 가깝게 여깁니다. 교우들이 사제를 보기 위해서나 미사에 참여하려고 떼를 지어 한꺼번에 급히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매우 엄격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위반하는 교우들에게 아무리 벌을 내려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교우들이 막무가내로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열성 앞에 어찌 몸을 아끼겠는가! 결국 최양업 신부는 과로와 장티프스가 겹쳐 1861년 6월 15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오늘로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을 마칩니다. 이분들의 삶은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는 요리문답의 한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이고 여러분의 삶이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주신 김성환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잘가

2012

가서 아름다웠다고

전해 주!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