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이재춘 대전가톨릭사진가회(2012)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주셨다."(요한 6,11)
+ 요한 복음 6,1-15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 자시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말씀의 향기>
믿고 알고 행동하고! "자기희생은 삶의 원리요 구원의 길" -최견우 사도 요한 송촌동 주임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동기로 표징을 연관시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믿음'이란 명사를 쓰지 않고 '믿는다'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동사는 '안다'라는 동사와 병행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믿는다'와 '안다'라는 동사는 동일한 대상을 목적으로 합니다. 아는 것은 믿는 행위, 곧 신앙의 삶에 있어서 조건이자 요소가 됩니다. 믿음은 믿음의 내용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결단과 더불어 실제로 받아들이는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믿음에 따른 자기 희생은 바로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삶의 원리요 구원의 길이며 사랑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을 실천한 사람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내놓은 음식이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남겼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기적이 기적이라면, 어른들이 주저하는 사이에 한 아이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은 사실 또한 기적입니다.
성경에서 자비는 '정의'와 관령이 있습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본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의 개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당신은 당신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속한 것을 그에게 건네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선이란 호의가 아닌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해타산에 밝고 받는 것에만 익숙한 현대인들은 삶을 나누기보다, 오늘 복음의 사도들처럼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만 관심을 둡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깊은 뜻과 삶의 원리는 바라보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빵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뜻이요, 능력이며 삶의 원리입니다. 희생없이 결코 삶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일해서 죽은 무덤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흙과 더불어 적당히 노동을 하는 것이 최상의 건강비결입니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부족함을 느낀다면 과욕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자가 될수록 욕심이 생기고 과식을 하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편리하고 풍요로운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하고 부족한 것을 느낄 때에 훨씬 행복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서 아이의 몇 조각 안 되는 빵을 기다리기보다 부자가 제공하는 대량의 빵이 더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이억 데나리온도 다 채우지 못할 탐욕 때문에 순수해야 할 교회의 본래 정신이 망가질까 걱정됩니다.
<행복한 노년의 삶(4)>
기쁨 가득한 실버 베하스 운동프로그램
몸은 잊었던 나이를 말해줍니다.
설거지하는 동안 컵이나 그릇을 놓쳐서 깨는 일이 잦아들면 손가락으로 물건을 잡는 힘이 감소하였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지나면 손톱깎기를 잡을 수가 없어서 가위로 손발톱을 깎아야 합니다. 또한 계단을 디디는데 무릎이 시큰거리기 시작하면 점차 걷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걸으려고 노력하면 이번에는 숨이 차서 걷기가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그뿐인가요,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것이 점차 심해져서 손에 든 집 열쇠를 찾느라고 한참을 헤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은 누구나 같습니다.
공평하신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같은 시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나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조금만 관리를 하면 관리를 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덜 아프고, 잘 움직일 뿐 아니라 인지기능도 좋아질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실버 베하스 운동프로그램을 권합니다.
실버 베하스 운동프로그램은 생명존중, 자존감 향상, 타인 배려를 기본 정신으로 하여 관절염이 있는 어르신들의 기쁘고 건강한 삶을 위해 개발된 운동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골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어르신들의 통증을 감소시켜 주고 균형감을 높여 주며 하지근력을 튼튼하게 해주어 낙상예방에도 도움이 되는 운동입니다.
또한 이 운동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삶의 방식을 즐겁고 기쁘게 변화시키는 여러 가지 집단 활동을 통해 우울감도 감소하고 수면도 개선되고 생활만족도가 증가된다고 합니다. 아울러 인지기능 개선과 일상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능력도 좋아지는 효과도 보고되었습니다.
즐거운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면서 남들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실버 베하스 운동프로그램은 늘 웃음을 선사할 수 있게 하지요.
대전교구에는 실버 베하스 운동프로그램 강사교육을 받은 봉사자가 계십니다. 대전교구 노인사목부로 신청을 하시면 이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를 받으실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실버 베하스 운동 프로그램을 통하여 즐겁고 행복하게 주님 사랑을 나누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주시는데 동참하시면 어떨까요?
그동안 좋은 글을 집필해 주신 김종임 마르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종임 마르타. 충남대학교 간호대학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본기도 : ⑤삼위일체의 끝맺음과 아멘으로 동의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본기도는 원칙적으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기도,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이 맺음을 통해 본기도가 올려지는 종착지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며, 그 기도가 올라가는 길은 그리스도요, 그 기도를 올리는 힘은 성령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제가 신자들을 대표해 공적으로 바치는 기도가 끝나면 교우들은 "아멘"이라고 환호합니다. "아멘"이라는 환호를 통해 교우들은 사제가 바친 기도에 동참하고 동의하며 자신들의 기도로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아멘"은 교우들의 공동서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30) 김정한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장
두 개의 천국 속에 살다: 황일광(시몬)
황일광 (시몬) |
1757년 내포 홍주에서 출생 1802년 1월 홍주에서 참수(45세) |
황일광(시몬)처럼 삶을 기쁘게 살다간 분도 드물 것이다. 그는 백정 출신으로 어린 시절은 아주 어렵게 보냈지만 천주교를 알고 나서는 모든 것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백정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존재였다. 가축을 잡는 백정이란 사람들은 생명을 죽인다 하여 어찌나 천한 대접을 받았던지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고 일반인들의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오죽하면 신분제도가 법적으로는 없어진 일제강점기에도 백정 출신들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생들이 '우리가 아무리 천한 일을 해도 어찌 배정을 손님으로 받느냐'며 거부할 정도였으니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으랴.
황일광은 입교한 후에 상상도 못할 대접을 신자들부터 받았다. 그가 백정임을 알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대해주었고 양반 집 방에까지 초대를 받아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조선시대의 신분제도 안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격이 명랑했던 황일광은 이런 변화가 너무 기쁜 나머지,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황일광은 서울에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는 이것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포졸들이 나를 '남원'에서 '옥천'으로 데려왔네."하고 농담하였다. '나무'(남원)하로 나갔다가 '감옥'(옥천)에 갇힌 것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황일관에게 형벌을 가하며 신앙을 버리라고 아무리 강요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고향인 홍주로 보내져 한겨울인 1월 30일에 참수를 당하여 두 번째 천국으로 갔다.
황일광을 생각하노라면 그의 명랑한 태도와 신앙에 대한 열정이 존경스럽고, 그를 받아들여 자신들과 똑같이 대했던 신자들도 존경스럽다. 아무리 같은 신자라도 조선시대의 사회 풍습 안에서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천민을 신분의 벽을 넘어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평수만 달라도 서로 구역 모임이 어렵다는 현재의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환한 웃음 곱게 내려
두북 두북 쌓이고
쌓인
하늘과 같은
우리사랑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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