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김용호 신부(2012)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 요한 복음 6,24-35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당신의 감동을 저울로 잰다면? "영원" - 장인국 세례자요한 대철중학교 교장
아주 옛날 옛적에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글자 그대로 삼천갑자를 살았으니, 계산해 보면 약 18만 년이다. 하여간 죽은 자의 명부에 이름이 빠져있어 오래 살게 되자 염라대왕은 저승사자를 보내며 잡아오라 하였다. 동방삭은 워낙 오래 살면서 꾀가 많아져서 쉽게 잡지 못하였다. 그래서 저승사자는 한 가지 머리를 썼다. 경기도 탄천 부근에서 산다는 정보를 얻은 저승사자는 숯을 한가마 사서 탄천 냇물에서 숯을 씻었다. 그걸 지나가던 동방삭이 보고는 뭘 하느냐고 물었다. 저승사자는 숯을 씻어서 하얗게 만들려고 한다고 하자, 동방삭 왈 "내 삼천갑자를 살아도 숯을 씻어서 하얗게 만든다는 놈은 처음 본다."라고 하였다. 그 말 한마디로 동방삭은 저승으로 잡혀갔다고 한다. 동방삭, 결국 죽었다. 태어남과 죽음만큼 공평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인간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말씀을 하신다. '한 번 먹으면 또 배고프고 마는 그런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없어지지도 않고 썩지도 않을 그런 양식을 찾아라.'그런데 '그게' 뭘까?
신문이나 뉴스 같은 데서 하나같이 우리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들은 외모와 재물과 건강 같은 것들이다. 아니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 존재감이 무력해진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해 말씀을 하셔도 마음은 시큰둥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갈림길에 놓인다. 선택을 해야 한다. 거짓말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그저 한 젊은이의 넋두리로 치부해 버릴 것이냐? 하는 갈림길 말이다.
보아야 믿고 만져봐야 아는 오늘 이 세상에 믿음의 세계,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가슴이 감동에 겨워 끓어오르는가? 아니면 무덤덤한가? 혹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10,000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도 흥분이나 기쁨이 덜하다면 당신의 열정과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장 난 것은 아닌가? 껍데기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르신 진료 일기(1)>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축제
"교수님, 한 달 전부터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명치 부위에 뭐가 있는 것 같아요..."
"네,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이쪽으로 누워보십시오."
천천히 진찰해 보니, 배꼽 윗부분에 달걀만한 덩어리가 숨어있다. 이를 어쩌나? 난감하다.
할머님은 평생 신앙이 독실하신 분으로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신다. 혈압 약 처방을 위해 오실 때마다 늘 밝게 웃으시고 '감사'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신다. 6.25 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와 젊은 나이에 바깥 어르신을 잃고 홀로 고생하시면서 세 자녀를 키우셨다. 자녀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여 외국에서 살고 있다고 늘 자랑하시지만, 각자 살기에 바쁜지 내왕은 거의 없는 듯하다.
제발 내손에 만져졌던 것이 대변 덩어리였길 바라면서 컴퓨터 단층 촬영 결과를 기다린다. 그러나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간암 덩어리이다. 많이 진행되었다. '무어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나...'혼자 사시기 때문에 할머님 상태에 대해 의논드릴 가족이 없다. 뵙기로 약속한 날은 다가오고, 며칠간 고민해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약속한 날에 할머님은 오시지 않고 조카뻘 된다는 먼 친척이 중년 여성이 왔다. 혹시라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까 봐 대신 왔다고 한다. 검사 결과를 알려주고 대책을 상의하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이 여인도 할머님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는 어려운 처지이다. 고령의 연세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정황상 수술도 어렵다. 외국에 있는 훌륭한 자녀들도 이러한 상황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까이에서 위로해줄 사람 아무도 없이 할머님 홀로 이 커다란 고통을 이겨내야만 한다. 의사로서도 큰 도움이 되지 모사는 것이 너무나 마음 아프다.
팔십 평생 긴 세월을 사시면서 그동안 주니께서 주신 인생의 많은 어려운 숙제들을 잘 풀어 오셨는데, 이제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만나야 할 마지막 숙제로 간암이라는 질병을 홀로 사시는 할머님께 주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
누구나 큰 질병 또는 죽음 앞에 서면 자식의 훌륭한 성공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진다. 평소에 마음을 쓰던 모든 경쟁적 가치들이 무의미해진다.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내 삶의 본질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모든 철학은 의학에서 끝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생각난다. 그 자리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주님과 '벌거벗은 나'와의 대화뿐이다. 할머님께서 이 힘든 마지막 삶의 숙제를 잘 마무리하시도록 소망한다.
"주님, 저보다 할머님을 더 완벽하게 알고 계시는 당신께서 함께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시오. 이 마지막 숙제에서 혼자 사는 할머님께 너무 힘든 고통을 주지 마시기를 간청합니다."
-김종성 요셉. 충남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말씀 전례: 말씀의 영성체
말씀의 전례에 대해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찬의 잔으로부터 성혈을 마시듯이 성경의 잔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 또한 교부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충고합니다. "손으로 성체를 받았을 때 축성된 빵의 한 조각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듯이 전례 중에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헛되이 흘리지 말라."이처럼 말씀전례는 성찬 전례를 위한 서곡이 아니라 영성체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지닙니다. 그러한 만큼 말씀전례에 참여하는 우리들에게는 말씀의 영성체 즉 신앙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정성되이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31) 김정한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구약성경의 토빗과 토비야를 조선에서 만나기: 한덕운(토마스),홍재영(프로타시오)
한덕운 (토마스) |
1752년 충청도 홍주 출생 1802년 광주 남한산성에서 참수(50세) |
홍재영 (프로타시오) |
1780년 충청도 예산 출생 1840년 전주에서 참수(60세) |
교회사 공부를 하다보면 성경에서만 보던 전설 같은 위인들의 삶을 실제 역사 안에서 만나게 된다. 한덕운과 홍재영의 삶은 마치 구약성경에 니오는 토빗과 토비야의 삶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이스라엘 태생의 토빗은 나라가 망한 후 아시리아로 유배를 가서 살면서도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토빗은 아들 토비야와 함께 길거리에 버려진 동포 한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고 나서 나무 밑에서 쉬다가 새똥에 눈이 머는 불행을 겪는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정말 힘든 선행을 실천하였음에도 그에게 불행이 닥쳐왔으니 그것이 하느님의 이끄심 안에서 어떻게 풀려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토빗의 이야기다.
한덕운(토마스)은 고향이 충청도 홍주였으나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광주 땅으로 이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서울로 가던 길에 이미 순교하여 주검이 되어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는 홍낙민(바오로)과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거두어 수습해 주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행동이었는데 결국 이 때문에 한덕운은 포도청으로 끌러가 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다.
홍재영(프로타시오)은 한덕운이 시신을 수습해 준 홍낙민의 아들이었다. 그는 본래 아버지와 함께 잡혀갔으나 마음이 약해져 배교한 후 전라도 광주로 유배를 가 목숨은 건졌다. 이 과정에서 시신을 수습해준 한덕운으로부터 큰 꾸지람을 들은 홍재영은 유배지에서 회개하여 다시 신앙생활을 하며 평생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기도와 단식, 선행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렇게 38년을 살았을 때인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그가 오랜 기간 동안 유배지에서 얼마나 올곧게 생활하였는지 광주를 거쳐 전주로 이송될 때에 동네 주민들 300~400명이 몰려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을 이렇게 벌한단 말인가'라며 선처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홍재영은 결국 전주에서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후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당하였다.
토빗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불행이 토빗과 그 아들 토비야의 변치 않는 꿋꿋함으로 극복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하던 한덕운의 삶도, 유배지에서 평생을 보속과 선행실천에 힘쓰던 홍재영의 삶도 해피엔딩이다. 자기가 믿는 올바른 신념대로 살다가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때로는 적응, 때로는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사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 스스로 잘 알 것이다.
꽃잎의 무게
8월의 잎이
푸르게 푸르러
그 줄기 줄기에
맺힌
담황색 꽃잎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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