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2년 주보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2012년 5월 27일(나해)

모든 2 2021. 4. 19. 10:16

이진옥 신부(2005),탄방동 성당 십자가)

"숨을 불어 넣으며"(요한 20,22)

 

부속가(성령송가)

 

오소서,성령님.주님의 빛,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오소서 은총 주님.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영혼의 기쁜 손님,저희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영혼의 기쁜 손님,저희 생기 돋우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무더위에 시원함을,슬플 때에 위로를.

영원하신 행복의 빛,저희 마음 깊은 곳을 가득하게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시면,저희 삶의 그 모든 것,해로운 것뿐이리라.

허물들을 씻어 주고, 메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소서.

굳은 마음 풀어 주고,차디찬 맘 데우시고,빗나간 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 믿고,의지하는 이들에게,성령 칠은 베푸소서.'

덕행 공로 쌓게 하고,구원의 문 활짝 열어,영원 복락 주옵소서.

 

 

 +요한 복음 20,19-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흐르게 하시는 성령 "성령을 받아라" - 황인기 베드로  새얼센터(아자리아 선교단 전담)

 

  제자들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세상과  분리,단절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한 가운데에 서신다. 잠가 놓은 문,그런데 어딘가로 흘러 들어오셔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신다. 그리고 숨을 불어넣으신다. 숨이 흘러간다."성령을 받아라."

 

 이제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선포하신다. "용서해 주면 그사 용서 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단절시킬래? 흐르게 할래?

 

  1독서 오순절,성령강림의 모습을 보자,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말한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유다인들은 "저마다 자기 지방말로 듣고 어리중절해 하였다." 인간의 언어는 분리와 단절의 벽을 만들지만 성령의 언어는 벽을 허물고 흐르게 한다. 흘러 소통하고 일치하게 한다.

 

  이 시대는 분리하고 단저시킨다. 나누고 쪼개고 서열화시킨다. 그래서 너는 너,나는 나다. 그래서 나는 너를 이겨야 한다. 너와 나는 별개이니까 그런 사람은 너의 슬픔은 고소하고, 너의 기쁨은 배 아프다. 아니,무관심하다.

 

  너와 내가 흐르고 있다면,너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너와 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연대할 수 있다. 어떤 이의 죄를 보고 '죽일 놈'이라 말하지 않고'그러면 안 된다.'고 내 일처럼 관심을 가진다. 내 일이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충고해 줄 수 있다. 내가 살아야 한다는 자기연민은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인 것처럼"(1코린 12,13참조) 우리는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령께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신다. 너와 나는 경쟁대상,단절의 대상이 아니라,사랑의 대상,연대의 대상이다.

 

  오늘 우리는 "오소서,성령님,주님의 빛,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라는 성령송가를 부른다. 물이 흘러가는 것은 위에서 아래내린다는 것만 분명하고 물길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그것을 인위적으로 단절하는 것은 세상이 하는 일이다. 그렇듯,주님의 빛을 가지고 오시는 성령께서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주님으로부터 하늘(heaven)에서부터 흘러온다는 것만 분명하다.

 

  흐르게 해야 한다. 어떻게 주의깊게 삶을 관조하며 하늘을 보자. "성령을 받아",너와 내가 흐르게 해야 한다.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성령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노인과 영성(2)>

 

성경 안에서 노년의 삶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당신의 모습과 닮은 모상의 씨를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상의 씨를 각자의 다양한 삶 안에서 은초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시켜 주시고, 이를 통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친교를 이루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노년은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존재의미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시기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노년에도 계속적으로 맡기시고 완성에 이르게 하고 계심을 유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에 계약을 맺으셨고(창세 17,1-8참조),다윗왕은 노년에 아름다운 전례음악과 시편을 지었고, 이사야 역시 노년에 대부분의 놀라운 예언시들을 지었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를 나이 든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한편 시편저자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전하는 것(시편 71,17-18참조) 이 노인의 사명임을 전하고 있고,옥중에서 바오로 사도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필레 1,9)이면서도 형제에 실천을 가르치고 권고하였습니다. 이처럼 "풍부한 경험은 노인들의 화관"(집회 25,4)이기에 노인은 신앙 안에서 좋은 가르침을 보여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노년 그 자체가 존경과 공경의 시기,축복과 기쁨의 시기,영에로움과 영적성숙의 시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회서에서는 싫어하는 세 가지 인간유형 중에 "지각없이 간음에 빠진 늙은이"(집회 25,2)를 지적하고 있고, 다니엘서에도 수산나를 모함하던 노인 재판관에 대해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다니13,52)라며 노년의 악행과 죄를 바오로 사도의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라는 노년 고백처럼,영적인 성숙과 신앙의 열매를 맺는 시기가 되기 위해,본인 스스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무상한 인생"(시편 49편 참조)을 경험한 노인으로 인생의 길에서 아름다운 노년이 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디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3)

 

-김경호 (바오로)신부,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자비송: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백성

 

자비송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라 고백하는 환호입니다. 교회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미사에 모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환호합니다. 비록 세상살이 중에 믿음이 약하여 죄를 짓지만,다시금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며 참회하고,그분의 자비를 청하여 용서 받음으로써 거룩한 미사를 합당하게 참례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비송 중,'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간청보다는,오히려 '주님'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믿음의 고백에 큰 비중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21)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의좋은 교우:김광옥(안드레아)과 김정득(베드로)

김광옥
(안드레아)
예산 여사울에서 출생
1801년 8월 25일 예산에서 참수(약 60세)
예산 대흥에서 출생
같은 날 대흥에서 참수(나이 미상)
김정득
(베드로)

  친척인 김광옥과 김정득은 지금은 같은 예산군에 속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인 여사울과 대흥 출신이다. 대흥에 가면 옛날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와 있던 '의좋은 형제'의 효제비가 서 있을 이런 식으로 표현 한다면 '의좋은 교우'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김광옥(안드레아)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과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기에 그의 영향으로 50세쯤 되었을 때 신자가 되었다. 김광옥은 동네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데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여서 사람들이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세를 한 이후 얼마나 순하게 변하였던지 '젖먹이 어린아리 같았다."고 한다.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인접 고을에 사는 김정득(베드로)은 김광옥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서로 '의좋은 교우'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둘은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갔다. 평소 순교를 열망하던 그들이 산으로 피해 간 이유는 감히 자신들의 힘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교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것이다.

 

  둘은 공주에서 체포되어 각자의 고향과 청주,서울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는데 이때마다 하느님을 배반하라고 강요하는 관리들에게 김광옥이 신앙을 고백한 말들은 듣는 자체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더 이상 나에게 재차 묻지 마십시오. 충실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실한 아내는 두남편에게 몸을 맡지기 않습니다."

 

  "사또,관장께서는 임금님의 명을 어기시겠습니까?임금님을 부인하시겠습니까?아닙니다. 만번이리도 아닙니다.저는 저의 대왕이시며 저의 아버지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처형하라는 사형판결을 받았으므로 서울부터 고향으로 함께 이송되었다. 하지만 고향이 속한 관청이 서로 달라 예산과 대흥으로 갈라지는 길에 오게 되자 "내일 정오,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는 말로 서로 격려하며 헤어졌다. 둘은 다음날 같은 시간에 예산과 대흥의 장터에서 서로의 약속을 지켰다. 이제는 두 '의좋은 교우'를 아무도 갈라놓지 못하리라.

 

 

<청소년 주일 특집>

 

본당에 청소년들이 없다.

 

  "본당에 청소년들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본당에 청소년들이 많아질 수 있을까요?"

 

  어떤 답을 해야 할까? 마치 교구 청소년 사목국장이면 통달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도사처럼 청소년에 관한 비법이라도 알고 있다고 여기시는 모양이다. 하지만 청소년 사목에 비법이 어디 있겠는가? 벌써 6년째 주교님을 따랄 사목방문을 다니고 있다. 대전 교구 대부분의 본당을 다 다니면서 각 본당의 청소년 사목 현황을 다 만나고 왔지만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다만 하나의 큰 흐름은 분명히 보였다. 신부님을 중심으로 한 본당 공동체가 청소년에 대해 더 많은 사랑을 쏟은 곳에는 늘 더 많은 청소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법이 아니라 청소년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그리고 노력이 깃들여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청소년에게 비추어야 할 빛에 관한 비추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시대 청소년들에게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아파하고 있는지 정확히 보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이 시대 가치관은 1,000명의 청소년들에게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목적지에는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 네 옆에 친구는 다 너의 경쟁자야!"과연 이 엉터리 거짓말 앞에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이미 스스로 낙오자라 여기며 무의미한 달리기를 하고 있는지,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교회는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교회는 분명히 우리 시대 청소년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청소년들이 달리고 있는 이 경기는 등수가 목적이 아니라 완주가 목적이라는 시실 말이다. 경쟁의 대상은 친구가 아니라 유혹에 약한 자신임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가끔 우리 시대 청소년에 대해서 교회가 너무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심각하게 죽음의 문화 안에서 엉터리 가치관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너무나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교회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주일학교에 나오는 청소년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숫자를 세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아파하고 있는 모든 청소년들을 향해 빛을 비추고, 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 성당을 찾아오는 청소년에게 무엇을 줄까?'라는 시각을 뛰어 넘어 청소년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래!' 그것이 맞어!'라고 맞장구를 칠 수 있는 그런 가치관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시각으로 우리 시대 청소년들의 아파하는 영혼을 보며,우리의 시간을 바꾸고,더 많은 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모아 더 밝은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박진홍 신부,청소년사목국 국장-

 

아시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캄보디아에서 학교를 짓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

 

 

 

 

참 소중한 우리

긴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

그렇게

성령으로 피어나는 꽃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