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으로」변윤철 신부(2012)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 마르코 복음 16,15-20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말씀의 향기>
영혼과 육신을 위한 사랑의 혁명 "사랑의 표징" -이재훈 세례자요한 홍보국장 겸 교구장 비서실장
디지털 사회에서 위성 텔레비전,인터넷,트위터,페이스북을 비롯한 최신 스마트기기와 같은 모바일 혁명은 전 세계를 하나의'사회관계망'(Social Network(으로 연결시켜 놓았고,조언이나 제안,해답 등의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지속적인 스통체계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문분별하고 무책임한 악플로 인한 상처와 불신이 사람들을 자살로 내몰거나,최신 스마트 기기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라는 공동체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진정한 디지털 혁명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데에 도움이 될 때 그 가치를 지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하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다른 복음에서도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하며 사랑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삼았고, 바오로 사도 역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갈라 5,14)하며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에서 "너 자신처럼"이란 말은 '내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드러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에페 5,28)즉,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내를 비롯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부모드른 자녀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주지 않고 다만 부모가 자녀에게 필요한다고 생각하는 사랑을 주려고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부모는 자녀의 감정에 주파수를 맞추고 자녀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할 줄 압니다.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자존심이나 이해관계를 뒤로하고 상대방과 공동체의 감저에 귀를 기울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변화를 체험합니다.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도 사랑의 표징들을 통해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십니다.(마르 16,20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떨어져 계시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기쁨,부활의 기쁨 안에 살아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작별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루카 24,52참조).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네트워크를 통해 진정한 디지털 혁명을 이뤄나갈 것입니다.
<노인의 영성(1)>
성경 안에서 노인으로의 부르심
그리스도인의 구원 여정은 하느님의 부르심(聖召)에서 시작되고 인간의 응답과 실천으로 이어지며 다시금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편 95,7-8)는 부르심의 시작 자세에서부터,유보중인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와서,세상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는 부르심의 마지막 완성에 이르기까지,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부르시는 노년에 있어 그리스도인의 응답과 실천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선,노인은 "그들의 자랑거리는 주님을 경외함"(잠언 25,6)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노년은 성숙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찬양할 수 있는 시가 되어야 합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의롭고 독실한 신앙을 지니고,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가운데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되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ㄹ쿠 2,25-38 참조) 노년은 인생의 산비탈을 내려오는 시기이지만,영적으로는 은총과 기도 안에서 산 정상에 올라,지난 삶을 관상하며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노년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바오로,사도가 원숙기에 접어들어 말씀하신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필리 4,11)라는 삶의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노년은 "인간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이냐시오 성인의 말처럼,하느님께 봉사는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니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12,48-50 참조)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더 많은 시간적 여유가 있는 노년 시기를 본인,가족,사회를 넘어 하느님과 하느님의 가족을 위한 봉사의 시간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도들은 복음 선포에 매달리기 위해 다른 일까지 줄였습니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라고 고백하였ㄱ,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로마 14,8)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은 노년기에 겪게 되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나저도 주님 영광을 위한 봉사가 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노년은 그 자체가 병"이라고 말했지만,그리스도교 전승에서는 "노년은 그 자체로 정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경호(바오로)신부,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참회예절:
"제 탓이오,제 탓이요,저의 큰 탓이옵니다."
신앙인들은 살아가면서 말과 행위로 하느님께 지은 죄를 반성하고,그 죄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가슴을 세번 칩니다. 그리고 성모님과 천사,성인들,함께 모인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도록 전구해 달라고 겸손하게 청합니다. 죄의 용서는 자기 스스로 불가능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참회예절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참회예절은 자신이 범한 모든 죄에 대해 공개적으로 통회하는 순간이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절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20)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인간적인 마음들을 넘어: 이국승(바오로)과 김원중(스테파노)
이국승 (바오로) |
1772년 충청도 음성 출생 1801년 5월 공주에서 참수(29세) |
김원중 (스테파노) |
충청도 진천 출생 1866년 공주에서 교수(나이미상) |
충청도의 공주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이지만 이번 하느님의 종 125위 중 공주에서 순교하여 대상자가 되신 분은 두 분뿐이다. 순교하신 그 자체로 큰 의의가 있으나 모두 대상자로 삼을 수는 없어 행적 기록이 풍부한 분들 만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이국승(바오로)은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충주는 남한강의 상류에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강을 이용하여 여주,양평을 지나 서울에 이르는 뱃길이 곧잘 이용되었다.그래서인지 이국승은 경기도 양근(양평)땅의 유명한 학자이며 초기 교회 지도자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찾아가 교리를 배워 입교하겠습니다.
이국승의 처음 신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고 1795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배교한 후에 풀려났다. 하지만 다시 뉘우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는데 결혼을 하면 신앙생활에 지장이 있을까봐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결심하였다. 지금 같으면 수도자의 길을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후 한양으로 이사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이국승이 문초를 받는 과정을 보면 인간의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느낀다. 그는 고문을 받을 때에는 고통을 참지 못해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였다가 끝나면 다시 회개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가 다른 배교자에게 권고한 말대로 "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를 속여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라는 말이 그의 진심이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나약한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이미 고질병과 같이 되어"고칠 수가 없다고 말한 후 순교의 길을 갔다.
김원중(스테파노)은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라는 궁벽한 마을 출신이다. 발래기는 비신자들과 섞여 사는 마을이어서 이미 누가 신자인지 아닌지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따라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관가에서 마을로 전갈을 보내어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증거로 성경이나 교리책을 갖다 바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원중과 십여 명의 교우들은 아무 책도 지니지 않고 관가로 가서 자신들이 신자임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눈길을 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책을 관가에 갖다 바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이국승에게 긁어 부스럼 만들면 자신들이 피해를 보니 그러지 말라며 만류하였다. 비신자들 역시 함께 나서서 그리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현실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일 것이다.
내 자신 안에서건,아니면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건 우리 주변에는 나약함과 강인함,이도 아니면 그저 평범한 마음들이 혼재되어 있다. 어떠한 때를 만나던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좋으련만 현실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새 가족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
너와 내가 같다면
그것은 믿음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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