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준 신부(2012, 루르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 코린 1,23)
+ 요한복음 2,13-25
<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말씀의 향기>
거룩한 분노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들은... -김석태 베드로 정하상 교육회관 관장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의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이 성전정화 사건은 해외토픽 1면 감입니다. 사랑의 설교를 하고 늘 사랑의 길을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휘두르시면서 당시 독점기업이자 독점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비폭령을 주장하고 설교하셨던 예수님께서 오직 한 번 폭력을 휘두르셨는데 바로 오늘 복음의 장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고요하고 기록해야 할 성전이 장사꾼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인 성전이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꿈틀거리는 시장바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책임자인 대사제도,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도, 율법에 충실했던 바리사이들도 이 풍경을 보고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일상의 삶으로, 과월절에 늘 있는 삶의 방식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고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솟아올라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셨습니다.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심과 동시에 성전의 개념을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46년 동안 지은 화려한 외적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의 몸이 성전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더 발전시켜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교 신자 각자가 하느님의 성전임을 알려주었습니다. (1 코린 3,16 참조)
그렇다면 하느님이 성전인 우리들 모두는 과연 거룩한 성전인가? 아니면 이기심과 탐욕이 흐르는 장사꾼의 소굴인가? 참된 성전인 예수님이 오셔서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기도하는 집인가? 아니면 시끌벅적한 시장바닥인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현실과 체제에 그저 순응하면서 살게 만드는 노예근성을 상징합니다. 양은 우리를 불의한 현실과 체제에 그저 순응하면서 살게 마드는 노예근성을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우리를 이리저리 푸득거리며 날게 하면서 좀처럼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생각과 분심을 상징합니다. 환전꾼은 이득이 된다면 양심도 윤리도, 자연도 생명도, 버리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들 마음 안에 있다면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정된 틀(탁자)을 들어 엎어버리실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를 쏟아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거룩한 분노 앞에서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내적 정화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을 향한 사순시기의 여정을 참되게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상화 되어 있는 학교 폭력 앞에서, 관행처럼 당연시하는 정치인들의 돈봉투 사건 앞에서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는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시니어 칼럼(5)>
노년기 부부의 역할변화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남성과 여성에게 각기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규범이 있습니다. 여성은 이러이러하는 게 좋고 남성은 저러저러하는 게 좋다는 믿음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은 한 가정을 대표하며 가족들이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돈을 벌어오고 한 집안을 책임지는 역할을 합니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동안 자녀들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하면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하며 어울려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그 역할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고 태어나 여성은 여성성을 주로 쓰면서 살고, 남성도 남성성을 주로 쓰면서 살다가 노인이 되면 남성노인은 여성성이 남아 있게 되고, 반대로 여성노인은 남성성이 남아 있게 되어 부부의 역할이 바뀌게 됩니다.
남성 노인이 은퇴하고 집에 들어앉게 되면 현역일 때 그 많던 친구는 다 어디로 갔는지 부인만 바라보게 될뿐더러 퇴직금 관리는 주로 아내가 하므로 용돈을 타서 써야 하고, 크고 작은 일도 아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 집안이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그 즈음의 아내는 동창회다, 친목계다, 레지오다, 취미생활이다 하면서 밖에 나갈 일과 함께 친구도 많아집니다. 이렇게 아내의 목소리가 커진 것과는 달리 남편은 간단한 의식주도 스스로 해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내에게 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아내만 따라다니는 '바둑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한마디로 부부의 위상이 바뀌게 된 겁니다. 실제로 노년기에 남편이 아내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3배나 증가한다고 합니다. 이 때 부부사이가 젊어서부터 별로 좋지 않았던 남편은 아내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 '평생 웬수'가 되기도 합니다.
평생을 가족부양을 위해 애쓰고 헌신한 남편을 위해 아내는 좀 살갑게 챙겨 드리셔야 하고 남편은 자녀들을 키우느라 희생한 아내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집안일을 거들고 협조를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혼자되신 분에게는 부부가 해로하는 모습이 제일 부럽다고 합니다. 부부가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노인 되기 이전부터 준비가 필요한데 젊어서부터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부부공동의 취미생활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부부가 대화를 많이 하면서 서로에게 있었던 좋은 일, 기분 나빴던 일, 슬픈 일들을 솔직하게 열고 나누면서 친밀한 감정을 주고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부부가 소소한 일이라도 신뢰와 존중으로 함께 상의하고 노력하면 싸우며 상처 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자녀는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테니 자녀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가정교육까지 저절로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임송은 헬레나. 대전보건대학 노인보건복지과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미사 시간에 일어섰다 앉았다하는 것이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요?
전례 안에서 동작 하나하나는 하느님을 향한 예절이며 깊은 만남의 표현입니다. 특히 일어선 자세는 전례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로서 깨어 준비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 대전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은 나의 전존재가 그분께로 향한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과 이웃에 봉사할 마음 자세를 갖추는 겸허함의 표현인 것입니다. 또한 앉아 있는 자세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자세입니다. 듣는 자세는 단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뿐만 아니라 말씀에 마음을 열고, 말씀을 실천하고, 나아가 복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10) 김정환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그분 편에 서기까지 :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홍낙민(루카)
홍교만(F. 하비에르) | 1738년 한양 출생 1801년 4월 8일 한양 서소문밖에서 참수 |
홍낙민(루카) | 1751년 예산 출생 1801년 4월 8일 한양 서소문밖에서 참수 |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홍교만과 홍낙민은 같은 홍 씨 성을 가졌지만 본관이 서로 다르고 출생한 곳도 다르다. 하지만 삶의 조건은 비슷하였으니 두 분 모두 남인 양반 집안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른 후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신앙을 갖게 되었다.
홍교만(F. 하비에르)은 다소 늦게 신앙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의구심을 갖다가 먼저 신앙을 받아들인 아들에게 교리를 자세히 듣고 난 후에 자신이 찾던 진리임을 알고 받아들였다. 후일 그가 심문을 받을 때 한 신앙고백은 그의 일생을 잘 말해준다.
"제가 이 학문을 수십 년을 세월을 허비하며 공부하면서 비로소 얻은 것을 이제 어찌 한마디의 말로써 억지로 뉘우친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강생한 예수를 알고 있으니 이제 갑자기 뉘우쳐 '예수가 그르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진리에 평생 목말라하던 홍교만은 하느님을 큰부모(大父母)로 알아본 후부터 한결같은 신앙을 간직하였다. 그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부모를 부모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대답하면서 흔들림 없이 한 길을 갔다.
반면 홍낙민(루카)은 조금은 에둘러 목적지에 닿았다. 교리를 아직 잘 몰랐던 초창기 신자들이 성직자를 임의로 선출하여 임명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아래서 신부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했던 홍낙민은 첫 번째 박해를 당하자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며 비난하는 글까지 쓰고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지는 않은 채 6년여 동안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에 이르러 다시 기회가 오자 그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내가 과거에 행하고 말한 모든 것은 일시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수치스러운 은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섬기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 인간과 모든 창조물들의 최상 군주이심을 알아주십시오"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 11,23)라는 서로 모순된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이 말씀이 홍낙민에게는 삶의 과정 안에서 모순되지 않게 실현되었다.
그는 한동안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정도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그분 편에 선' 삶으로 옮아갔던 것이다. 홍교만처럼 한생을 늘 그분 편에서 꿋꿋이 살기도 하지만, 홍낙민과 같은 과정을 거쳐 그분 편에 서기도 한다. 이게 우리의 모습은 아닐는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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