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선고」김택민 신부(2012,갈매못 성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
+ 요한 복음 3,14-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말씀을 대하는 태도 "읽고 묵상하고 실천까지...-윤달수 바오로 병원사목전담
2012을 시작하면서 포꼴라레 회원들에게 한 해를 살아가는 중심 주제로 주어진 것이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회원으로서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기위해 묵상 자료도 살펴보고 피정에도 참여하면서 이러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사실 복음 말씀이라는 것은 사제로 살아가면서 마주해야 하며,또 이를 바탕으로 신자들에게 강론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어렵다거나 낯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에 대해 묵상하면서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다면 '말씀'에 대한 저의 '태도'문제였습니다. 언제 부터인지 모르게 '말씀'은 저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라기보다 누군가에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보니 '말씀'과 저의 삶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복음을 묵상하지만 말씀이 기쁨을 주기보다는 부담스러운 일거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태도의 관점에서 사순 제4주일의 독서와 복음을 살펴보니 한 가지 통하는 흐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은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과 그들의 조롱을 받고 있는 예언자들의 엄청난 차이는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라 결국 하느님과 말씀에 대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한 쪽은 하느님과 말씀,즉 율법 앞에서 죄의식 없이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 자랑하지만,다른 한 쪽은 끊임없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오늘의 복음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말씀을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 즉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를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에 대한 태도로 인해 악인들은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게 됩니다. 이를 통해 겉으로는 말씀과 함께하는 것처럼 위장해 실제로는 이기적인 자신의 행위를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말씀,즉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를 통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살펴보면 얼마나 많이 '말씀'을 읽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태도로 '말씀'을 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거나 평화를 주는 위로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한 묵상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니어 컬럼(6)>
고부 갈등
우리나라의 가족관계 중에서 가장 힘든 관계를 꼽는다면 고부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 하나만을 믿고 시집 온 며느리와 일생을 바쳐 잘 키운 아들을 최고로 여기는 시어머니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사이는 물론 아들 부부 사이도 나빠니조 그 갈등이 가족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가 나쁜 걸 보고 자란 손자,손녀가 할머니를 존경할 리 없고,시댁 식구나 시집과 관련된 일이라면 덮어놓고 싫은 며느리는 시금치도 안 먹고 성경의 시편도 안 읽는다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있습니다.
갈등의 원인을 살펴보면 며느리와 시어머니 양쪽이 서로 주장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다른 며느리와 비교를 하는 경우,친정과 관습이 너무 달라 적응이 안 되는 경우,자녀양육에 시어머니가 간섭을 하는 경우에 불만을 품습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며느리가 친척간의 우애를 소홀히 하거나,시부모의 의견을 무시하고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거나 결정하는 경우,며느리가 자기만 알며 살림은 뒷전이고,아들이나 자녀들을 잘 챙기지 않는 경우에 며느리가 미워 화가 난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부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쪽 모두 갈등의 원인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에게서 문제점을 찾아야지,서로 상대방의 잘못만 들추어낸다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때 가운데서 교량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아들의 노력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데,아들 되시는 분은 어머니와 아내의 불만을 잘 들어주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융통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부모님 앞에서는 절대로 부부싸움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아내나 처가의 흉을 보아서도 안 됩니다. 대신에 시댁에 봉사하는 아내를 칭찬해 주고,처가의 애경사를 기억해 주면서 아내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고부 갈등의 당사자인 며느리는 남편을 잘 키워주신 어머니에게 감사하면서 시부모님을 존중하고 작은 일이라도 무엇이든지 시부모님과 상의를 하는게 좋습니다. 또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존중해 주시고, 아들 내외의 사생활에 끼지 마시고 손자,손녀 키우는 일도 아들 내외에게 전적으로 맡기되 필요할 때만 조언으로 끝내시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며느리와 시어머니,아들까지 세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과 배려를 한다면 가족전체가 화목해질 것이니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임송은 레지나.대전보건대학교 노인보건복지고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미사중 성찬례 때 무릎을 꿇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요?
무릎을 꿇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존경과 겸손의 마음을 담아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하느님께 감사와 흠숭의 마음을 드리며,그분 앞에서 속죄와 통회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찬례 때 무릎을 끓음으로써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께 감사와 흠숭의 마음을 드리고,주님을 모시기에 하당치 않은 우리의 부족함을 속죄하고 통회하여 합당하게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을 꿇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11)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최창주(마르첼리노)와 원경도(요한)-장인과 사위
최창주 1749년 여주 출생
(마르첼리노) 1801년 여주에서 참수(52세)
원경도 1774년 여주 출생
(요 한) 1801년 여주에서 참수(27세)
요즘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이 서로 얽혀있어 우연에 우연이 반복되도록 설정해 놓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알고 보면 서로 친척이나 가까운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만이 살고 있는 조그만 세상이 존재하는 듯하다.
조선시대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드라마를 찍는다면 억지로 설정해 놓지 않아도 저절로 요즘 드라마처럼 될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전국 신자를 다 합해도 수천명에 불과한데다 내포지방,양근지방,전주와 진산 일대,서울 등의 주요 지역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자들은 대부분 신자들끼리 결혼을 시켰으니 이렇게 저렇게 연결해 보면 일가친척이거나 사돈지간이 되곤 한다.
최창주(마르첼리노)와 원경도(요한)는 장인과 사위 관계로 같은 고을에 살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1800년 부활절에 즈음하여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는 아직 천주교를 무조건 박해하던 때는 아니었으므로 그해 부활절을 맞아 원경도는 "개 한 마리를 잡고 술을 준비하여 근방에 사는 교우들과 모여서 길가에서 소리를 모아 기도하고 술 마시기를 반복하며"흥겹게 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고발에 의해 그 지역 신자 11명이 함께 체포되었다.
수차례의 형벌에도 불구하고 최창주와 원경도는 신앙을 끝까지 지키며 몇몇 동료들과 1년여 동안 감옥 생활을 하였다. 그들이 감옥에서 함께 기도하며 서로 우애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간수 중 하나는 감동을 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생활을 다 마친 후 장인 최창주와 사위 원경도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같은 날 참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죽을 죄인이더라도 부모와 자식은 같은 날 죽이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최창주와 원경도는 장인과 사위 관계여서 이 관습이 적용되지 않았는지 1801년 4월 25일에 함께 순교하였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부활한 인간은 혈연을 넘어선 새로운 관계로 하느님 나라에 있을 거라고 이르신 말씀이다. 부활 때에 잡혀 이듬해 부활 즈음에 함께 순교한 최창주와 원경도는 마음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품고 부활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 어떻게 처형이 되든 상관이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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