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인들의 임금님」 김택민 신부(2012, 솔뫼성지)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마르 14,64)
+ 마르코 복음 14,1-15,47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제자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 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자가 가까이 왔다."
<말씀의 향기>
그 사랑이 바로 날 위해..."핵심은 '사랑'" -이대근 론지노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 수난을 압축해 주고 있는 복음의 긴 수난기 속에서 우린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들은 수난기 속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역할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군중들, 향유를 부은 여자, 사제들, 율법학자들, 배신하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와 유다, 빌라도, 군사들, 키레네 시몬...
그들은 바로 내 삶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인 동시에, 살아가면서 내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나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비겁함, 배신, 증오, 분노, 고독 등 어두운 측면이 수난기에 총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 외롭게, 그러나 결연하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난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히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 모든 목소리들 앞에 오직 침묵으로 응답하십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배신을 용서로, 증오를 사랑으로 되갚으며 걸으십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이 길을 우리도 성주 간 동안 함께 걷고자 합니다.
성주간 전례를 그리스도 전례의 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주간 전례의 핵심은 특별하고 장엄한, 잘 짜여진 전례의 외적 형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아파하고 통회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주간 전례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혀 자격 없었던 우리들에 조건 없이 건네지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체험이 있어야 비로소 전례가 의미 있어지고, 진정한 통회, 회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고통,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거기에 들어가는 사랑입니다. 곧 배신할 줄 알면서도 엎드려 발을 닦아주는 사랑입니다.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 생명까지 남김없이 건네주는 사랑입니다. 죽음까지 넘어와 다시 용서와 치유, 평화와 자유의 손을 내미는 사랑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에서 골고타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 생애 마지막의 절정적 한 주간의 눈부신 사람! 그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건네진 것임을 깨닭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시니어 칼럼(8)>
노년기 친구
노년기의 원만하고 폭넓은 친구관계는 어르신의 생활 만족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요. 가장 중요한 관계는 일차적 관계인 가족이라고 하지만 자녀들이 하나둘 분가하고 노인부부만 남아있게 되면 친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친구는 내가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특히 배우자가 사망한 이후에는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지요. 노년기에는 얼마나 많이 마음에 맞는 친구가 있고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생활의 행복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노년기의 친구는 중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어르신들께서 친구를 새로 사귀거나 오래된 친구조차도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가 않는데요. 우선 어르신께서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적극적인 성격이어야 친구들과 만나거나 새로운 일들을 하러 다닐 수도 있고, 또 친구들과 어울리자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어르신들의 친구관계를 살펴보면 고령으로 갈수록 친구 수는 줄어들고, 한 곳에 오래 거주하신 분들이 친구가 많아 이웃사촌으로 지냅니다. 그러므로 도시보다는 농촌에 계신 어르신들이 친구가 더 많지요. 성별로는 여성 노인이 남성 노인보다 친구가 더 많은데요. 은퇴한 남성들이 친구수가 줄어드는 것과는 달리 여성들의 친구관계는 감정과 가슴을 주고 받으며 다져진 사이이기 때문에 주위 변화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르신 성격이 사교적이거나 젊어서부터 친구가 많았던 사람이 친구가 더 많습니다. 또 배우자가 있고, 학력 수준이 높고, 건강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으며, 종교 활동이나 각종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어르신이 친구가 더 많습니다.
노년기의 친구는 오래 사는 비결로는 손꼽히는데요. 장수마을에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의 공통점은 혼자 살더라도 늘 남들과 어울려 지낸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끼워주든 안 끼워주든 상관하지 않고 사람이 모인 곳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가보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내어줄 간식을 늘 준비하고 있거나,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해 주변에는 친구들로 북적인다는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보람까지 느낄 수 있는 일, 즉 봉사단체에 가입을 한다거나, 젊어서 못했던 취미생활을 시작해 본다거나, 새로운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 보는 일은 어떨까요? 특히 홀로 지내시는 어르신들은 자녀들이 자주 찾아와 주지 않는다고, 외롭다고 비관하지 마시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여생을 맘껏 누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임송은 헬레나. 대전보건대학교 노인보건복지과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성주 간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성주 간은 특별히 예수님 수난을 기념하는 주간으로, 예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을 말합니다. 주심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지내는 성주간을 예수님 수난과 십자가 희생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시기로 1년 중 가장 거룩하게 지내는 주간입니다. 성주간은 인류 구원의 위대한 사건을 기념한다고 해서 위대한 주간 또는 구원의 주간이라고도 불립니다. 성목요일은 수난 전날 저녁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성체성사와 성품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고, 성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십다가 경배 예절을 하며, 성토요일은 주님이 무덤에 묻히신 것을 묵상합니다. 성토요일을 마지막으로 성주간은 끝나며 이날 밤 성대한 부활 성야 예식을 통해 주니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파스카 신비를 경축합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13) 김정환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장
참다운 효(효)와 우정 : 최필제(베드로)와 정인혁(타대오)
최필제 1770년 한양 출생
(베드로)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31살)
정인혁 한양 출생
(타데오) 1801년 최필제와 함께 순교(나이 미상)
우리는 미사 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하며 가슴을 치는데 거기에 얼마만큼의 무게를 실어 가슴을 치는가? 우리 교회 역사상 최필제(베드로)는 가장 큰 무게로 가슴을 친 분일 것이다. 큰길가에서 약방을 운영한던 그는 어느 날 몇몇 교우들과 함께 모여 통회의 기도를 바치며 가슴을 치던 중 체포되었다. 노름을 단속하러 다니던 포졸들이 최필제의 집에서 나는 가슴 치는 소리를 우연히 듣고는 투전하는 소리로 착각하여 급습하였던 것이다.
본래 진실하고 성품이 후덕하여 뭇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던 최필제는 잡힌 후에도 신실한 행적을 보였다. 옥에 갇혀 있는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밖으로 나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해달라고 관장에게 청하였다. 조선은 효(孝)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던 나라였기에 그 청이 받아들여졌고,최필제는 옥 밖으로 나가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당신의 풍습으로는 아버지가 옥에 갇힐 일이 생기면 아들이 대신 옥살이를 하는 것도 허용이 되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때 포졸들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도망가라고 넌지시 귀띔해 주었지만 최필제는 장례를 마치고 다시 옥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느 님 아버지께도 효도를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한 번 알아 모신 대부(代父)를 결코 버릴 수 없으니 하느님 아버지께 효(孝)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시대 교우들의 한결같은 신앙이었으니 말이다.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겐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라고 하며 하느님 공경을 제일 윗자리에 놓은 것은 빈말이 아닌 참다운 효를 행하겠다는 당시 교우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이후 최필제는 자신이 인도하여 입교시킨 정인혁(타데오)과 같은 날(1801년 5월 14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였다. 둘 다 한양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분들이었으니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친구(敎友)로 발전하여고 급기야 "벗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요한 15,12) 우정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였다.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서 동업을 하고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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