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2011년 12월 11일(나해)

모든 2 2021. 4. 13. 21:45

 

김광호 신부 (2011)

 

 

  + 요한 복음 1,6-8,19-28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요? 엘리야요?"하고 묻자,요한은 "아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요?"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말씀의 향기>

 

자선은 기도의 자매입니다 "가난한이들에게 기쁜소식!"  -정재돈 바오로. 판암동 주임

 

남을 도와주는 손은 기도하는 입술보다 더 성(聖)스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선을 할 수 있도록  인간의 손을 만드셨다.'라고 합니다. N스트라우스는 그의 유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유태인의 격언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건강할 때 자선으로 희사하는 것은 금(金)이요. 병났을 때의 희사는 은(銀)이고, 죽은 뒤에 희사는 납()이다.'위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니 이웃을 위하여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선을 해야 하는지 그 가닥이 잡힙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금육(禁肉)을 명합니다. 그리고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과 성주간 금요일에는 반드시 금육과 단식을 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우들이 교회의 명을 받들어 정해진 날에 단식과 금육을 합니다. 특별히 금요일에는 소, 돼지, 닭고기를 먹지 않고 대신 생선회를 먹었다고 이야기하는 열심한 교우들도 있습니다. 교리의 핵심을 모르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또 없습니다. 금육과 금식의 진정한 의미는 「자선과 나눔」의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나눌 것이 없으면 굶어서라도 나누고, 내가 꼭 먹고 싶었던 기름진 음식을 꾹 참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라는 것입니다. 금육과 금식의 댓가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고 자선할 때에만 우리의 기도와 수계 생활이 빛을 발합니다. 금육과 금식한 것을 내 통장에 저금한다면 이것은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수전노 노릇이고 모독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아주 중요한 '영적인 자선행위와 구원'을 노래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희망을,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이는 성탄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소명이고 우리들이 이루어나갈 정의구현 사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천주교인으로서 기도와 자선도 참 중요하지만 혹시 나로 인하여 가난하게 사는 이웃은 없는지, 나로 인하여 마음이 부서진 이웃은 없는지,나로 인하여 잡혀갔거나 갇혀 사는 이웃은 없는지 먼저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아멘.

 

 

<시니어 칼럼>

 

운동을 새 직업으로 삼자(2)

 

  생물학적으로 은퇴란 없다. 노화도 없다. 생물학에는 성장이나 퇴화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몸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청한다. 우리 몸은 살과 힘줄과 지방 그리고 다른 여러 부위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고장 나기 마련이며 계속해서 갱신(renew)되어야 한다. 우리의 근육은 일 년에 세 번씩 새로운 근육이 된다. 예를 들어 지금이 겨울이니까 우리의 다리는 여름 이래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 것이다. 적혈구와 백혈구는 3개월마다, 혈소판은 열흘마다, 그리고 뼈는 약 2년에 한 번씩 교체된다. 혓바닥에 위치한 미뢰(미각 기관)는 매일 교체된다. 생물학자들은 인체의 세포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짧은 수명을 다한 후 소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몸의 상당 부위는 새로이 성장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만들기 위해 트럭 여러 대 분이나 되는 완벽한 신체 부위들을 끊임없이 내다버리고 있다. 물론 여기서 버리는 정도보다 더 많이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운동이 개입한다.

 

  몸 전체에서 성장의 화학 작용을 통제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근육이다. 근육 운동을 하면서 생기는 신경자극은 근육을 키우라는 신호도 동시에 보낸다. 이 신호가 충분히 보내지면 인체라는 정밀 기계가 구동되어 근육, 심장, 모세혈관, 힘줄, 뼈, 관절, 협응력 등을 단련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운동은 성장신호를 보내는 가장 중요한 주체이다. 우리가 걷거나 달리면서 땀을 흘리기 시작하면 수백 개의 화학 신호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근육과 관절 속에서 '강화'와 '수리'의 주기를 일으키는 주체이며 긍정적인 뇌의 화학작용의 기초가 된다.

 

  또한 운동은 면역체계를 강화하고, 숙면을 도우며 체중을 줄여주고, 인슐린을 조절하며, 지방을 연소시키고, 심장 질환, 뇌졸중, 고혈압, 채매, 관절염, 당뇨병, 콜레스테롤과 우울증 예방에 큰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노년기에 활기 있는 제 2의 청춘을 살고자 하면 규칙적인 운동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해야 한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운동만큼 노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다. 운동이 노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운동은 노년기를 한심한 늙은이로 전략하지 않도록 지켜주기에 사활을 걸고서라도 꼭 해야 한다. 20년 후에 일주일에 6일 동안 운동하지 않는 것이 하루에 담배 2갑을 피우는 것처럼 자기 파괴적인 일로 여겨질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퇴화의 파도가 거세어져 여러분을 휩쓸고 지나가지 않도록 , 매일 직장 출근이 젊은 시절의 삶을 지탱해주듯 나이 들어서는 운동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이다.

 

  50세 이상의 성인들이여! 일주일에 6일은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도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다.

 

-한성동 갈리스토.노인사목부 전담 신부-

 

 

 

<문학 단상>

 

주님이 주신 어둠의 영광

 

  성탄을 앞둔 마음은 하얀 눈을 기다리는  소녀처럼 마음 가득한 희망이 피어오른다. 열 평 남짓한 작은 나의 정원에 솔향기 물씬 피어오르고 조용히 내려앉은 달빛이 따끈한 찻잔에 머문다.  기쁠 때나 힘들 때 묵상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마음의 평화와 문제의 해답을 찾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랑이 머무는 성모동산이다.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맑게 변해가는 내 영혼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다짐하기를 수차례, 오늘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뒤 돌아본다. 싸늘한 밤 어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의 솔잎 사이로 어머니의 숨결이 느껴진다.

 

  성모님의 고결하신 순명..

  천사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한 말을 그 분은 마음 깊이 새겼다. 그리고 많은 시간 묵상을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순명하시며 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때때로 고난을 주신다. 어느 누구라도 고난의 아픔은 있다. 그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묵상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 아픔에서의 자유가 복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만사형통일 때 하느님의 은총을 잊어버리고 감사보다는 모든 일이 내 힘으로 이루어 질 것 같은 교만에 빠지고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축복에는 보이지 않는 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모님께서도 주님이 주신 고난을 통해서 큰 영광을 선물로 받으셨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 더욱 성숙되고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으리라.

 

  주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밤, 나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는지, 또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을 하는지...

 

  야고보서 2장 14-17절 말씀에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에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주님의 말씀에 온 몸에 전율을 느낀다. 차가운 밤바람에 이슬마저 잠이든 깊은 밤 조용한 묵상으로 마음은 고요해지고 주님의 평화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애틋함, 생각이 아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주님 말씀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이웃에게 다가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떠한 말을 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공원의 빈 벤치와 같던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하느님의 사랑스런 숨결을 느끼며 이 밤은 깊어간다. 그리고 빛을 향해 가벼운 발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긴다. 어둠은 빛을 향해 다가서는 주님이 주신 또 하나의 영광이다.

 

그동안 좋은 글을 집필해 주신 대전가톨릭문학회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달형 베네딕도.대전가톨릭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