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32주일 2011년 11월 06일(가해)

모든 2 2021. 4. 13. 20:36

 

깨어 있어라,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2011),백종관 신부

등잔의 기름을 채우기가 너무나도 번거롭습니다.

등잔의 기름이 다 떨어져가는 것도 모른채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마태오 복음 25,1-13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주인님,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질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말씀의 향기>

 

누구세요..?  '가을녘,신앙인의 겨울 채비"  -곽명호 루카.사무처장

 

 봄이 탄생과 부활의 계절이라면,여름은 청춘의 계절이고,가을은 노년,겨울은 죽음의 계절일 게다. 가을 단풍이 차분하고 아름다운 것은 봄과 여름의 폭풍을 이겨낸, 마치 인생의 긴 여정을 격량처럼 지낸 후 이제 여유롭게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노년의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을 맞았으면 의당 겨울을 맞는 것이 순서이다. 지금이 바로 겨울 맞이 준비를 하는 시기이다.

 

  오늘 복음은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로 종말에 관하여 가르친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처녀의 비유로 종말에 관하여 가르친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모두 혼인 잔치에 초대된 들러리였다는 것이다(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하느님 나라에 초대를 받은 사람이다.) 둘째는 이 열 처녀는 모두 같은 목적인 신랑 즉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우리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희망하고 살아간다.) 셋째는 이 처녀등른 모두 등불을 준비하고 있었다.(우리는 모두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넷째로 슬기로운 처녀든 어리석은 처녀든 밤이 깊어지자 모두 지쳐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우리는 나약한 신앙은 자칫하면 모두 지쳐 잠이 들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슬기로운 처녀라고 말했던 사람이나 어리석은 처녀라고 말했던 사람이나 같은 신분,같은 목적, 같은 신앙을 가진 나약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슬기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는 별로 구분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신랑이 예상하지 않았던 시간에 갑자기 왔을 때,비로소 기름을 미리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의 구분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리석은 처녀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단순히 세례를 받고, 허겁지겁 주일미사를 다니며,교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살았다는 것만으로 하느님 나라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당연히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일 뿐이다.  의무는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맞갖은 삶을 위해 노력하고, 이웃 사랑의 실천이 자랑거리가 아니라,그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될 때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치고 자동차에 기름이 충분한지 점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만 빼고 말이다. 우리는 지금 가을 끄트머리에서 겨울 여행을 떠나야 한다. 우리의 영혼이 겨울 여행을 떠날 때 쓸 기름은  충분한가 물어보자. 그렇지 않으면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고 하느님 나라문을 두드릴 때 베드로 사도께서 빼꼼히 문을 열고소 "누구세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세상 속 교회>

 

노동,창조의 자리 그리고 사회교리2

 

  지난 주에 언급했던 쌍용자동차,한진중곡업의 해고 노동자 사건 만이 아니라,오늘 우리 주변에는 이와 비슷하게 아픔을 간직한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1400여일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우리 교구 안에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들,대법원 판결에 따른 정규직화 요구를 하다 도리어 구속되고 해고되고 징계당하면서 울산 현대차 공장 앞에서 끌어가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홍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농성하던 비정규직 청소용역 노동자들 등 참으로 많은 이들이 아픔을 머금고 일을 하고 있다.  이는 어느 특정인들의 이야기가 아닌 나와 나의 가족의 이야기 되었고, 바로 내 옆에 있는 이웃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지난 세기 말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로 인하여,전에 많이 들어보지 않았던 비정규직 노동이 사회 전반에 걸쳐 퍼졌고,이제 비정규직 노동은 거부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사회에서 88만원 세대는 그것을 방증하는 표현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비정규직 노동은 이토록 사회 전반에 걸쳐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을까?

 

  시장 경제는 늘 자본과 노동의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경기가 좋을 때는 자본과 노동이 어느 정도 공생관계를 유지하지만,경기가 좋기 않을 둘의 관계는 충동하곤 한다. 더욱이 지속적인 경제위는 이 관계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경제위기를 파타하기 위해 선택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들이 전세계적으로 급속도로 퍼진 것은 불과 30여년 안팎이다. 이 과정 속에서 노동에 대한 유연화 정책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키게 된다. 경제 상황에 따라 노동을 유연하게 함으로 위기에 대응한다는 정책이다. 이때 노동은 자본을 위한 도구가 되버리는 결함을 낳게 된다.  즉 이윤을 위해 노동을 손쉽게 조정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종류의 비정규직 노동이 양산되고, 비정규직에 속한 노동자들은 늘 불안함 속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하여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교회의 사회교리 발전의 역사는 어쩌면 초기부터 이 둘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하여,"자본은 노동 없이 있을 수 없고,노동은 자본 없이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늘 이둘의 상호 보완성을 언급하면서,사회는 '노동은 자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명백해 하였고,교항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에 대하여 '교회의 가르침이 남긴 유산의 일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자본과 노동의 협력으로 얻어진 것을 어느 한편에만 귀속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며,또한 어느 한편이 다른 편의 노력을 무시하고 모든 이익을 독점한다는 것은    정의에 크게 어긋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박상병 루도비꼬.전의 주임-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

 

"넛지 전교"

 

  남자 공중 화장실을 항상 깨끗하고 쾌적하게 유지하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첫째,화장실 입구에 지키고 서서  화장실을 지저분하게 이요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제한하다. 둘째, 깨끗하에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할인쿠폰을 제공한다. 셋째,소변기에 파리 모양 스티커를 붙인다."여러분은 이 세 가지 방법 가운데에서 어느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실제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국제공항 남자 화장실에서 실험을 해 봤는데 놀랍게도 가장 효과가 있었던 방법은 세번째 방법,즉 소변기에 파리 모양의 스티커를 붙이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소변기 밖으로 새어 나가는 소변량을 무려 80%나 줄일 수 있었다니 정말 놀랍죠? 더 놀라운 사실은 화장실 어디에도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라'는 강요의 말이나,소변기 안의 파리를 겨냥하라는 지시문조차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파리 스티커 한 장으로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이 실험을 통해서 알게 된 소중한 진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강요나 금지,혹은 보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눈에 두르러지거나 요란하지도 않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우리의 행동에 변화를 가져가게 하는 힘,이것을 '넛지 효과'라고 합니다.

 

  '넛지'(Nudge)라는 단어의 뜻은 원래 '팔꿈치로 슬쩍 옆구리를 찌르다'입니다. 넛지 효과는 '타인의 행동과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영향력'을 뜻하느는 행동경제학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저는 이 단어가 참으로 '사랑'을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사랑이 참으로 위대한 까닭은 그 변화가 결코 요한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웃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큰 소리로 말하기 전에 묵묵히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그것도 어쩌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넛지 전교'인지도 모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