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에 불러오너라"
(마태22,9)
주님이 지어 초대하신 잔치인데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든 세상에 머물려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어 초대하신 잔치에서
비로소 사람다울 수 있는데
사람이 만든 세상에서
사람다움이 엷어져만 갑니다.
마음을 열어 눈을 뜨면
주님이 지으신 세상
초대하신 잔칫상이 보입니다.
백 현 신부
+마태오 복음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하고 물으니,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말씀의 향기>
예복을 입은 신앙인 "신앙인이기에 신앙인답게" - 황인제T.아퀴나스.천안쌍용동 보좌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는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는데 참석을 거절한 사람들과 새롭게 초대를 받아 잔치에 참석했지만 예복을 갖추지 못해서 쫓겨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대를 받았지만 참석을 거절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과의 친교에로 초대하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방인들이 초대를 받습니다. 선한 사람만이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선하거나 악하거나,우리 모두가 하느님과의 친교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새로이 초대를 받아 잔치에 참석한 한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겨납니다. 길거리에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모을 때는 언제고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갑자기 초대를 받았지만 그들은 예복을 갖추고 왔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초대를 받았지만 아무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초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 예복을 갖춰 입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복은 무엇입니까?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지만 분명 예복을 입은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다른 삶이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신앙인이기 때문에 기꺼이 하는 삶이고, 남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일을 신앙인이기 때문에 과감히 하지 않는 삶입니다. "다를 그렇게 사는데 뭐!"하며 세상에 묻혀 지내왔던 것들이 있다면 이제 예복을 입은 신앙인답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속 교회>
사회교리의 원리(2)
공동선의 원리가 지닌 무수한 함축적 의미 가운데에서도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즉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지상 재화의 사용에 있어서 우리는 주어진 재화를 보편적 목적에 부합하게 돌리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 개인의 고유한 권리로서 사유지산을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유지산권을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전통은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권을 규제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은 본질적으로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치기을 존중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결국 목적의 원칙을 존중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결국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교회는 가르쳐 왔다.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리는 사람이 재화의 기원과 목적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이끌고,모든 사람이 충만한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요한 바오로 2세는 재화의 공동 사용권은 "모든 윤리적 사회적 질서의 제1원칙"이고,"그리스도교 사회 교리의 특수한 원칙"이라고 가르친다.
보조성의 원리는 사회교리 회칙이 나온 이래 지속적이고 특징적인 지침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어 왔다. 보조성의 원리는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회에 맡길 수 없는 것처럼 한층 더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해악이며,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티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즉 모든 상위 질서의 사회는 하위 질서의 사회들에 대하여 도움의 자세를 갖추어야지 흡수하거나 과도한 개입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보조성의 원리가 잘 이루어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참여이다. 참여는 모든 사람이 책임을 가지고 공동선을 위하여 의식적으로 이행하여야 할 의무이다. 이러한 참여는 사회 생활의 특정 영역에만 제한된거나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노동을 포함한 경제 분야,정보와 문화 분야,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고차원적 사회 정치 생활 분야에서의 성장,특히 온 인류의 성장을 위한 내적 원동력으로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참여의 원리는 다시 연대성을 요구한다. 연대성은 인간의 타고난 사회적 본성,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과 권리,그리고 일피를 향한 개인과 민족의 공동 노선을 특별히 강조한다. 연대성은 진정한 도덕 덕목 가운데 하나로 이 원리를 바탕으로 개개인과 민족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죄의 구조를 극복해야 한다. 즉 죄의 구조는 법률,시장의 법칙,사법 체계의 수립과 적절한 개정을 통하여 연대성의 구조로 정화되고 전환되어야 한다.
-박상병 루도비꼬.전의 주임-
<문학 단상>
길을 가야만 또 다른 길이 보인다.
여러 가지 길,모든 사람들의 삶엔 저마다 가는 길이 있다.
'울지마 톤즈'의 고(故) 이태석 신부님처럼 희생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길이 있고,좋은 부모 만나 한평생 노력 없이 평탄한 길로만 살아가는 사람,열심히 노력하지만 늘 고단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길도 있다. 올라가는 것도,잘 내려오는 것도 다 한발 한발을 내딛는 길이다. 인생은 여러 갈래의 길 중 한 갈래를 선택하여 가는 여정이기에 언제나 가 본 길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더 애착을 느끼고 미련을 갖는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처럼..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길을 걸어 왔고 또 걸어 갈 것인지 진지하게 묻는 것을 화두로 삼아 하루를 시작해본다.
누구에게나 살의 멍에가 있듯이 어느 날 행복했던 우리 가정에 엄청난 쓰나미가 덮쳐 그 현실에 적응을 못해 고통으로 자신을 잃어갈 때 제일 먼저 원망의 대상이 된 분이 보이지도 않고 어떠한 감각으로도 인지할 수 없는,내가 그토록 믿었던 주님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고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주시고 사랑으로 내앞에 있는 또 다른 길로 나를 치유해 주셨다. 그분은 한계가 있는 인간의 계획과는 달리 가는 길이 막히면 돌아가는 다른 길을 보여주신다.사랑의 관계에서,믿음의 관계에서 체험되는 그분을 다시 마주한 것은 은총의 해후였다.
지난 날 고통 속의 나를 정화하여 참된 마음으로 그분을 향한 시각과 청각으로 그분을 대하니 걸어가는 길이 주님이 나에게 준 아름다운 선물로 다가왔다. 참 쉬운 일이었는데 허망한 욕망과 본성적 욕구에 눈이 가려 영성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장하지 못했다. 바늘 하나 꽂을 자리조차 없는 옹색한 마음에 빗장을 열어 주님이 말씀과 함께 온전히 들어와 신앙적인 삶을 가진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편안한 마음으로 변화됨이 하나의 신비였다. 주님은 나의 영원한 동아줄이었다.
우리 교회는 10월을 로사리오 성월로 보낸다. 주님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그리며수태고지에서 보여준 "네"한마디로 인류를 구원한 어머니의 아픈 삶,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함을 보여주는 어머니의 길이다. 종교와 이념이 갖는 거창한 이름(~ism)을 떠나 모든 세상 어머니의 큰마을 안에 희생과 사랑이 녹아든다. 성숙되지 않는 나의 언행과 영적 교만이 내 인생이 되지 않게 겸손하게 이웃을 위한 봉사를 번제물로 바치는 일상이 현대가 요구하는 녹색순교의 길이라 믿고 그 안에서 세상의 증거자로 나의 내이를 다스릴 것이다.
오늘도 묵주 알알의 장미송이 성모님과 주님께 바치며 햇살과 그늘이 공존하는 아름답고 쓸쓸한 가을 속으로 어머님과 함께 주님의 길을 갈 것이다.
-이상향 프란체스카.대전 가톨릭 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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