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사랑으로」(2011),황영준 신부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낮게 여기십시오."(필리 2,3)
+ 마태오 복음 21,28-32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맏아들에게 가서 '얘야,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말씀의 향기>
큰아들의 변화 "양심의 외침에 귀기울이라" -이봉효 프란치스코·가수원 주임
오늘 복음에 두 아들이 나오는데,그 중 큰아들의 모습은 하느님 앞에 선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일깨워 주고 있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인간은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면 먼저 반사적으로 거절부터 한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 본다. 비록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바라던 대로 살았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 인간으로서 정당한 길이 아닐 때 마음한쪽에 불안함을 느끼는데 그것이 바로 양심의 소리가 아닌가 한다. 즉 죄를 범했을 때 느끼는 마음의 가책이나,비록 죄는 아니더라도 올바른 삶의 모습이 아닐 때 오는 허무한 감정들이 바로 양심의 소리이다. 곧 양심이란 인간이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본래의 길을 망각하고 있을 때 마음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소리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 양심의 소리가 들리더라도 이 양심의 소리에 따라 사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이유는 현실의 욕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양심의 소리를 듣기 힘들어지고,눈앞의 행복이나 쾌락에 끌려 본질을 잊은 채 일시적 욕구 충동에 빠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권세욕,명예욕,허영심으로 마음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 안에 양심의 소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어찌 해야 하는가? 양심의 소리는 집요하게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에 외치고 호소 하니 말이다.
결국 이런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 정신적 안정감이 없어지고 마음의 평화도 사라지며 늘 불안한 상태가 되어,마침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하는 고귀한 인간성마저 침해받고 총체적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고통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양심에 귀를 기울이라는 호소의 말씀이다. 즉 눈 앞에 보이는 일시적인 욕망과 쾌락 때문에 귀가 멀어 듣지 못했던 양심의 소리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호소에 따라 자신의 욕망이나 쾌락을 억누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는 큰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것은 어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과감한 결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용기로 회개할 때 가장 귀중한 나의 마음에 밝음과 평안함,행방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을 찾으러 노력하는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큰 아들이 보여준 변화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선교의 핵심 문제(19)
사랑은 모든 계율의 근본 정신이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말은 모든 계율을 포함하며,승화시키는 율법의 혼이다. 또한 사랑이라는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만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도 해도 다 못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명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자만과 위선에 빠졌다면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부족함을 깨닫게하여 겸손하게 만든다.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이라는 헛된 믿음에 대하여 가장 예리하게 비판을 가한 사람은 바로 사도 바오로이다.(로마 2장,3장,4장 참조) 율법은 단죄의 이유만 될 뿐 우리를 절대로 구원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로 선택된 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행을 보시고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로마 5,1-2)라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세상속 교회>
복음화와 사회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교회본연의 사명이다. 복음 선포는 교회가 임의적으로 해도 좋고,안 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이가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명에 의해 교회가 맡은 의무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요소가 있다. 즉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복음화 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 선포는 단편적으로 규정할 때 복음 선포는 빈약해 지거나 그르치게 될 위험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선포의 핵심은 복음 그 자체와 복음 전달이 될 사람들에 대한 성실한 자세임을 밝히고 있다. 즉 사람이 되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선물인 구원을 모든 이에게 베푸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는 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열정과 사랑은 복음을 듣는 이들의 상황을 바라보도록 이끈다. 왜냐하면 복음 선포가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 생활과의 관계,즉 복음과 개인적 사회적 생활 사이에 있는 상호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완전한 복음 선포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화되어야 할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복음 선포에 있어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사회의 기본 세포인 가정,노동과 경제,정치와 국제 관계,평화,환경,정의,개발 등에 대하여 명벽한 견해를 표시하는 이유인 것이다.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추상적 차원이나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는 것이다. 즉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인 인간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에서 결정되고 이루어지고 겪는 일들에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발표한 '간추린 사회교리'가 가르치듯이,교회는 사회교리로 복음을 선포하고 사회 관계의 복잡한 구조 안에 복음을 현존시켜야 한다. 즉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하여 구원의 길에 있는 인간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첫째가는 유일한 목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사회교리는 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도구이고,필수적인 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상병 루도비꼬,전의 주임-
<이충무의 행복나침반>
빌과 셀마의 지상낙원
'빌'은 87세,그리고 그의 아내 '셀마'는 83세. 저는 이 노부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미국 보스턴에 살고 있는 그 분들을 제가 모르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생면부지의 그 분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난 후 그 분들은 저의 든든한 '정신적'이웃이 되었습니다.
올 해로 결혼한 지 68년 되었다는 그 노부부의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긴 결혼 생활이나 특별한 행적 때문이 아니라,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할 수도 있는 둘만의 여행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여름 피서지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해마다 들러 보고 싶은 곳이 있으신가요? 그 곳이 아무리 아름다운 여행지라도 10년 넘게 계속해서 방문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빌과 셀마 부부는 놀랍게도 매년 한 곳을 정해 여름휴가를 그 곳에서 무려 39년째 보내고 있었으니 해외 토픽감이 될 만하죠. 그들은 매년 여름 영국 남서부 해안도시 플리머스를 찾아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단지 그곳에서 두 사람이 68년 전 처음 만났다는 그 이유와 기억만으로...
해군에 복무하고 있었던 미국인 빌은 우연히 영국 플리머스에서 셀마를 만나게 되었고 4년 동안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가다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그 후 25년간 가정에만 충실하던 빌과 셀마는 여행을 계획했죠. 자신들에게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게 해 준 최초의 장소에서 휴가를 보내자는 그들의 '추억여행'은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이제 그들은 유명인사가 되었고, 매년 여름이 되면 플리머스 사람들은 빌과 셀마가 언제 올지 기다리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매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장소를 구경하는 이닭살(?) 노장커플은 인터뷰에서 수줍게 말했습니다. "이 곳이 우리에게는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지상낙원이니까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빌과 셀마 부부를 보면서 낙원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행복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낙원이 보이시는지 궁금해집니다.
-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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