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24주일 2011년 9월 11일(가해)

모든 2 2021. 4. 8. 17:48

 

따르는 길」(2011),김광호 신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였듯이 저도 이웃을 위하여 용서를 청합니다.

 

 

  +  마태오 복음 18,21-35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제발 참아 주게,내가 갚겠네.'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용서는 하느님의 마음이요 행복이다 -김문수 야고보.월평동 주임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이다. 1독서에서는 분노하지 말고 용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규정을 잘 지킬 때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에서도 역시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인간적인 한계를 초월하여 언제든지 용서할 것을 말씀하신다.

 

 '용서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요서는 이미 과거가 된 일로 인해 발생된 미움,상처,주고받은 물적 혹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불만,인간의 좁은 마음으로 결정 내린 보잘 것 없는 일에 대한 비교 등에 대하여 초연하게 기쁨과 평화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미 엎지른 물에 대하여 긍정적인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다. 용서는 시간의 반복 속에서 세상과 하느님 사이를 오고가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깨달으며 체험하게 되는 희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용서는 불완전한 평화 속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는 순간이 된다. 따라서 용서는 일종의 순교와도 같다.

 

  용서는 언제해야 하는가? 하루 일과 중에 '청소'는 늘 기본적으로 하는 일이다. 그런데 '언제 또 청소해야하나요.? 어제 했는데요'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남의 일이라면 몰라도 그것이 나의 일인데 당연히 '청소'는 나의 몫일 것이다. '청소'와 마찬가지로 '용서'는 나의 몫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그야말로 숙명적인 것이다.

 

  율법에 충실했던 베드로도 일곱 번은 용서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차원을 넘어서서 끝없는 용서를 요청하신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죽여야한다는 처절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일단 자신을 죽여서 용서를 실천하면 평화로운 사람이 된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면 평화롭지 못한 잡다한 괴로움에 평생 끌려다닐 수박에 없다. 미움은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괴롭히지만,용서는 언제나 기쁨과 평화로 자신을 이끌어 준다. 용서는 하느님의 마음이고 그분이 바라시는 행복이다.

 

 

 

<세상 속 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사회교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3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2년 10월 11일에 「신앙의 유산(Fidei Depositum)」이라는 이름으로 교황령을 반포한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 준비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발행에 관한 교황령이었다. 교황령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의 유산을 지키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며,교회는 이 사명을 항구히 수행해 오고 있음을 밝히면서,선임 교황인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막한 의도를  다시금 상기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라는 값진 유산을 더 잘 보존하고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과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더욱 쉽게 다가설 수 있게 하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요한 23세는 공의회가 먼저 시대의 오류를 단죄하기 보다는,이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교회가 걸어온 그 길을 따라, 이 시대가 요청하는 과업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기꺼이 헌신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페막 이후에도 계속하여 교회의 삶에 생기를 불어 넣었고, 요한 23세 교황이후의 교황들은 공의회가 추구하려고 했던 정신을 계승하였다. 1985년 공의회 폐막 2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주교대의원회는 임시 총회를 소집하였고, 이 총회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 모든 가톨릭 교리를 망라하는 교리서나 그 개요서가 편찬되어야 함을 건의한다. 이 건의로 결실을 맺어진 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총 4편으로 이루어진다. 제1편은 믿을 교리에 해당하는 '신앙 고백'이고,제2편은 성사 생활을 설명하는 '그리스도 신비의 기념'이다.그리고 제3편은 신앙고백과 성사 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삶'이며,마지막 제4편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이다. 이 교리서를 바탕으로 교리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부분이다. 제3편은 '인간으 소명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제목으로 이루어진 제1부와 '십계명'을 다루고 있는 제2부로 구성되어 있다. 교리 교육 안에서 십계명 부분은 어느 정도 잘 다루어지고 있지만,제1부에 있는 내용들은 잘 다루어지는 않고 있던 것이 우리교회의 현실이다.

 

  제1부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 공동체,즉 인간과 사회,사회 생활 참여,사회 정의의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사회교리의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즉 사회교리는 가톨릭 교회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보편교회의 교리서 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인 것이다.

 

-박상병 루도비꼬.전의 주임-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담배를 끊은 사연

 

청년 시절 마산화력발전소와 남양만 간척공사장에서 생활할 때는 아침에 눈을 뜨면 맨 먼저 손에 잡는 것이 담뱃갑이었습니다. 낙방거사 문학청년 시절에는 시름을 달래기 위해 붕어 낚시도 많이 다녔습니다. 저수지나 수로의 수심을 재어 준비를 하고, 낚시에

떡밥을 끼워 던져놓고,손을 씻은 다음 좌대에 앉아 맨 처음 피워 무는 준비를 하고, 낚시에 떡밥을 끼워 던져놓고,손을 씻은 다음 죄대에 앉아 맨 처음 피워 무는 담배 맛이 가장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술자리에서 얼큰하게 술기운이 돌 때 피워 무는 담배와 고스톱 판에서 화투장을 살펴보며 긴장 가운데서 피워 무는 담배 맛도 최고였지요.

 

  마흔 나이에 혼인을 했습니다. 혼인 후 정확히 열 달 만에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참 시긴하더군요. 내 손으로는 머리카락 한 올도 만들수가 없는데,내가 혼인을 하여 한 생명을 낳았다니! 아이를 보면서 조물주의 섭리를,그 신비를 수없이 생각해 보았지요.

 

 집사람은 직장에 매인 몸이라,낮에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어머니와 내 몫이었습니다. 나는 도리 없이,조금은 재미롭게 '애보는 남자'가 되어 생활했습니다. 갓난 것이 눈의 초점을 지니게 되었을 때부터 아이에게 아바의 기도하는 모습,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의도적으로 신경을 쓰곤 했습니다.

 

  한 번은 아이를 돌보면서 방 안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게 되었습니다. 방 안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한 집사람과의 약속을 슬그머니 어긴 것이지요. 유모차 안의 아이가 몸을 뒤틀며 칭얼대더군요. 순간적으로 담배연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담배를 껐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잠드는 아이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조물주의 섭리로 태어난 이 아이,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나게 하시고 나와 혈육의 인연을 가지게 한 이 아이,나를 통해 세상에 나온 이 아이에게 나는 최초로 무슨 선물을 줄 수 있을까? 어쩌면 방금 담배연기 속에서 잠시 칭얼댄 것은 내게 담배를 끊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날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절연과 동시에 낚시도 끊었고, 고스톱도 끊었습니다. 담배를 끊은 이후로는 그간 사흘이 멀다 하고 다니던 붕어낚시를 지금까지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또 초상집이나 처가에 갈 때도 화투판에는 일절 끼지를 않았습니다. 첫아이를 얻은 이후 담배를 끊음과 동시에 그 절연을 위해 오늘까지 낚시와 화투도 끊고 사는 내가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요하(소설가,태안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