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23주일 2011년 9월4일(가해)

모든 2 2021. 4. 8. 17:42

 

백색순교자」(2011),변윤철 신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이곳 작은재줄무덤은 조선후기박해시대 서천지역 독뫼공소(문산) 신자들과 작은재 공소(판교) 신자들이 통교를 하던 장소이고,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키다가 선종한 많은 이향신자들이 묻힌 장소이다.(30여기의 작은 줄무덤).

 

 

  +  마태오 복음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질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년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향기>

 

 사랑의 시작.. 용서  "용서의 원천이신 주님"  -백종관 요셉.도마동 보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실 때,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사마리아인들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주님,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 형제를 꾸짖으셨죠.

 

  우리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그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악인이 악한 길을 걷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분명 있지만,때로는 그 책임이 책임이 아닌 분노로,사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으로,이웃을 향해 사랑 없는 꾸짖음으로 표현될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분노의 감정에 한번 휩사이면 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들고 괴롭습니다.

 

  특히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서로 모르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보다 가장 가까운 관계이거나 가장 사랑했던 이들 혹은 가장 믿었던 이들에게서 실망하였거나 배반당했을 때, 우리에게는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분노는 내 이웃을 향한 사랑의 부족에서 시작하는데,사실 내 이웃이 내게 잘못한 일에 대하여 어찌나 참기 힘든지 오늘 주님께서 차근차근 말씀해주십니다. "처음엔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그래도 그렇다면 둘이나 셋의 증언으로 확정짓고,또 그렇다면 네 뜻이 아니라,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뜻을 들어라."

 

  네 사사로움으로 이웃을 심판할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제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분노를 가라앉혔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마음 속 깊이 쌓여 있는 앙금마저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뜻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그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우리는 분명 그곳에서 주님이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불필요한 화를 가랑앉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할 때,참 용서를 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고자 청하는 이들 안에서 용서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나의 복수나 저주,나만의 위로나 보상을 위해 청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또 하난의 기만이며,또 다른 분노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자비하신 주님께 용서할 힘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아멘!

 

 

 

<세상속 교회>

 

사회교리?그게 뭐여?

 

희망버스,제주도의 강정마을,유성기업,무상급식,대학등록금,4대강사업,G20과 글로벌 경제 위기.. 열거된 단어들은 요즈음 우리 사회와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다면 노동,평화,복지,경제,정치,환경의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행복하게 살아야 할 인간의 존엄성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이루고 있으며,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 또한 이 문제들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교회는 사람이 관련되어 있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지난 해 3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춘계 주교회의를 마무리하면서 현 정부의 무분별한 4대강 사업에 우려를 표현했다. 그리고 요즈음 제주도의 강정마을에 들어설 해군기지에 대해서도 제주 교구장이신 강우일주교님과 여러 사제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현댓 속에서 교회는 정치,경제,노동,환경,평화 등과 관련된 사안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어떤 신자들은 신부님들이 정치와 세상 일들에 관심을 덜 갖고,교회 안에서 영적인 영역에서만 활동을 해 주셨으면 하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다. 그리고 교회가 민감한 세상사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불편해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질문을 해 보고 싶다. '사회교리'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혹 들어보았다면 사회교리의 내용에 대해서 예비자 교리 시간이나 본당의 신앙 교육 안에서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많은 분들이 "사회교리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을 한다. 들어보지 못한 분들도 적지 않고,들어보았더라도 내용이 무엇인지,우리의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앞으로 사회교리가 무엇인지,사회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지금,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박상병 루도비꼬 .전의 주임-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

 

우산 소녀와 매화의 미소

 

 

  8월 6일 중죽 장쑤((江蘇)성,쑤저우((蘇州)의 어느 거리,제 9호 태풍 '무이파'의 영향으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당황하며 모두 건물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죠. 그때 한 남자가 거리 한 가운데 주저앉아 마치 달팽이처럼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이 목격됩니다. 우산도 없이 동냥 그릇을 끌고 비를 피하기 위해 거의 기어가다시피 한 그는 지체장애 걸인 할아버지였습니다.

 

  거리에서 구걸행위를 하다가 비가 쏟아지자 어쩔 줄 몰라 당혹스러워 하는 그 할아버지를 사람들은 그저 멀뚱거리며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엄천난 빗속을 뚫고 그에게 다가가 우산을 받쳐 준다는 일은 결코 쉬어 보이지 않았거든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바라보기만 하며 고작 마음으로만 아타까워하고 있었겠죠.

 

  그런데 그 때 한 소녀가 그 할아버지에게 다가갑니다. 우산을 할아버지 쪽으로 기울여 정작 자신의 몸은 흠뻑 젖은 데도 게의치 않고 묵묵히 할아버지 곁을 지키는 그 소녀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누군가 그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으로 촬영해 인터넷에 올렸고,사진의 제목은 '매화의 미소'라고 했습니다.

 

  태풍 '무이파'는 중국어로 '매화'를 뜻한다고 합니다. 태풍 속에서도 피어난 그 우산 소녀의 마음이 매화꽃을 닮아서였을까요? 정말 가슴 뭉클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갈수록 미소를 잃고 살아갑니다. 모두 화난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타인을 바라보곤 하죠. 최소한의 인간적인 '연민'마저 상실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매화의 미소'가 아닌가 합니다.

 

  여러모습으로 우리 앞에 오시는 주님..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 한 가운데 걸인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누가 그 분께 우산을 씌워 줄 수 있을까요? 우산으로 오로지 제 몸 하나 가리기에 급급하다고 저마다 짜증내는 우리 가운데 누가 '우산 소녀'의 미소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우산 소녀를 다룬 신문기사의 마지막 부분이 너무도 마음에 와 닿아 인용해 봅니다.

 

  "연민은 영혼의 항독소(抗毒素)이며,귀먹은 사람도 들을 수 있고, 눈먼 사람도 볼 수 있는 언어라고 했다. 남에게 베풀었다고 해서 가난해진 사람은 없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