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21주일 2011년 8월 21일(가해)

모든 2 2021. 4. 8. 17:2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16,15)

 

 

제자들에게만 하셨던

물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신앙인이 되었고

왜 수도자가 되었고

왜 사제가 되었는지.

 

늘 품어야 할 물음이 아닌지요.

답을 하기 어려워 문제가 아니라

묻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닌지요.

 

제자들에게 그랬듯이

나를 신앙인으로,수도자로,사제로

살게하는 물음입니다.

 

백 현 신부

 

 

+  마태오 복음 16,13-20

 

<불행하여라,저희 눈먼 인도자들아!>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재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의 존재 이유와 가치"  -최익선 그레고리오. 태안 주임

 

  서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한 가지 늘 아쉬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속내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속내를  확인하고자 질문에 질문을 더한다. "자기야 나 사랑해? 정말 사랑해?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듣노라면 마냥 행복하고 또 마음 든든하가보다. 확인해보고 또 확인해서 확신이 설때 만족하고 행복해지는가보다.사랑하는 이로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가 확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래 봤으면...?

 

  예수님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로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길 원하셨나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당신의 존재 가치를 사랑하던 제자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제자들 스스로가 자기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아야 만이 자신들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깨달아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갈수 있겟기에 던진 질문이리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지금 예수님께서 나에게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사제로 살아가는 나에게도 이는 분명 중요한 질문이다.다변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신원과 존재의 가치가 거기 달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슴치 않고 답변 하리라.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사제로 부름 받은 이유도, 또 사제로 살아가는 이유도 단 하나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고 계심을 오늘도 확신하며 살아 가고 있다. 그리고 나를 부르신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사랑받고 있음을 감사하며 살고 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도 저의 삶을 다 바칩니다.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이토록 행복함을 새삼 느껴본다. 주님 감사합니다.

 

 

<교회의 선교사명>

 

복음화의 관점에서 구별되는 세 가지 상황

 

  현대 선교의 대헌장으로 불리는 "교회의 선교 사명"(REDEMTORIS MISSIO)에서 교회의 단일한 사명인 복음화라는 관점에서 구별되는 세 가지 상황을 언급한다. 세 가지 상황으로 구분하여  좀 더 세세하게 보면서도 전체적으로 본질적 목적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 상황이 함께 어우러질 때 복음화으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 상황은 고유한 의미의 만민 선교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었던 선교에 대한 이해와 같은 내용이다. "아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거나,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여 그들이 환경 안에 신앙을 구체화하고 못하고 다른 집단들에게 이를 선포할 수 없는 민족과 활동을 전개하는 경우"(33항)이다. "따라서 이 홀동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고, 지역 교회를 설립하며,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을 촉진하는 일을 특징으로 한다. 이 만민 선교의 특성은 '비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데에 있다."(34항)

 

  두 번째 상황은 교회 활동과 사목이다. "적합하고 견고한 교회 구조를 갖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과 그리스도교 생활에 열성적이고,자기 주변에 복음을 증언하며, 보편 선교의 책임을 느끼는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들 공동체에서 교회 활동과 사목을 수행한다."(33항) 첫 번째 상황과 다른 점은 이미 세례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언급되겟겠지만 세 번째 상황과 다른 점은 세례를 받고 또한 신앙에 충실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를 더욱 복음화시키고, 그리하여 다른 두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누가 예비자를 인도하고 쉬는 교우에게 신앙의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겠는가? 복음화의 일꾼을 길러내지 않고 어떻게 교회가 세상의 복음화를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통사적인 사목이라고   볼 수도 있겟지만 복음화의 한 상황이고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세 번째 상황은 '새로운 복음화'이다 "앞에서 말한 두 상황의 중간 상황이 있습니다. 특히 오랜 그리스도교 뿌리를 가진 나라들뿐만 아니라 이따금 신생 교회들에서도, 세례 받은 신자 집단 전체가 신앙의 산 의미를 잃어버렸거나,심지어 더 이상 자신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서 멀어진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33항) 바로 쉬는 교우를 대상으로 하는 복음화의 한 상황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3년 하이티에서 열린 제 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연설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내용이다. "복음화 500년을 기념하는 일은 새로운 복음화의 약속으로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것은 열정과 방법과 표현에서의 새로움이다."쉬는 교우들이 신앙의 활력을 다시 얻어서 교회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도 교회의 사명인 복음화의 한 상황이다.

 

  -김영근 신부.논산대교동 주임-

 

 

 

<지요하와 함께 하는 믿음살이 풍경>

 

기도 중에 욕도 튀어나오니 어쩌지요

 

  운전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합니다. 언제부터 이 버릇이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먼 길 운전을 하건 잠깐 운전을 하건 한 손에는 늘 묵주가 쥐어져 있습니다. 왼손잡이라서 매번 왼손으로만 핸들 조작을 하고, 오른손으로는 묵주를 쥔 채 변속기 차량을 갖게 된 뒤로는 묵주를 쥔 오른손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하는 일에서도 나는 '일거양득'이라는 단어를 결부시킵니다. 걷기 운동을 할 때마다 줄곧 묵주기도를 함으로써 '일석이조'의 실체를 얻는 것처럼,그 일거양득과 일석이조는 운전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하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운전만 한다면 무미건조한 느낌도 갖게 되고 시간이 아까워지기도 할 터인데,나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셈이기도 할 것입니다.

 

  덕분에 묵주기도를 참 많이 하며 삽니다. 매일 집사람의 출퇴근을 도와주면서도 묵주기도를 하고, 성당을 가고 오면서도,묵주기도를 하고,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서룰 여의도를 가고 오면선 줄곧 묵주 알을 굴리니,화요일 저녁의 레지오 쁘레시디움 주회 때는 매번 사오백 단 씩 보고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운전을 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욕이 뛰어나오는 현상이 생기곤 합니다. 다시 말해 묵주기도를 하다가 말고 돌연 욕설을 내뱉는 거지요. 다른 운전자들의 운전방법이나 미숙함 때문에 내 입에서 욕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참고 이해하고 관용해 줍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다. 나도 저럴 수가 있다는 생각으로 너그러움을 챙기곤 하지요. 그런데도 내 입에서 가끔 욕이 튀어나오곤 하니,욕을 한 다음 순간에는 번번이 내 손에 들린 묵주를 의식하며 무안함을 삼키게 되지요.

 

  의외로 많은 운전자들이 차창 밖으로 담배꽃초를 버리곤 합니다. 신호를 받을 때 창문 밖으로 버젓이 손을 내놓고 담뱃재를 털기도 하고,출발하면서 꽁초를 버리기도 하고, 달리면서 버리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길바닥이 재떨인 줄 알고,온 세상이 쓰레기통인 줄로 아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런 운전자들을 볼 때마다 욕을 합니다. 그 욕을 그대로 적지는 않겠습니다. 한번은 "저런 인간들 때문에 대형산불도 난다니께!"하고서는 앞 차에서는 듣지도 못할 욕을 하니,옆 좌석의 집사람이 이러더군요. '아무리 그렇더라도..당신,묵주기도 하는 중이었잖아요."

 

-지요하 (소설가.태안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