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마태16,24-26)
대전 가톨릭사진가회 이재춘 토마스
+마태오 복음 16,21-27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내게서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걸림돌 "하느님의 일 그리고 사람의 일" -임기선 요셉-사목기획국장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된다. 당시 우리 학교는 모내기철이나 추수시기에 어린이들이 가사를 도울 수 있도록 조퇴를 시켜주곤 하였다. 가을걷이가 한창 일 때 아침 조회를 마친 담임선생님은 조퇴하여 부모님을 도와드리는 것도 효도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조퇴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하셨다. 왜 그랬는지 그날다라 논에서 그리고 밭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이 안쓰럽게 느껴지고 빨리 조퇴해야겠다는 생각이 울컥 치밀었다.
조퇴하고 일찍 돌아온 나를 보신 부모님은 깜짝 놀라셨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아버지는 아주 무서운 얼굴을 하시고 말씀하셨다. "이 놈아,공부하기 싫으면 그만둬! 마귀의 꾐에 넘어갔구나! 빨리 학교로 돌아가!"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집과 학교의 중간즘에 작은 모래판이 있는 냇가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 쭈그리고 않자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그리고 '나는 바보"라는 글자를 모래에 새겨 넣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로서 마땅히 많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인간적이고 소박한 마음에서 예수님을 붙들고 말린다. "맙소사,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주 엄하게,아주 무섭게 이르신다. "사탄아,내게서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그랬다. 나는 어릴 때 나의 일만 생각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내 생각만으로 부모님을 위하는 일이 부모님께서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우리가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 하느님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주어진 인생길을 충실하게 걷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자신과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게 된다.
중복장애인으로 자신과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 중에 헬렌 켈러는 자신의 역경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회의 선교사명>
몇 가지 제안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특히 교회의 목자인 우리에게는 복음화의 내용에 전적으로 충실하면서 현대인에게 가장 적절하고 효적으로 복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대담하고 지혜롭게 다시 강구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40항)라고 언급하고 있다.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가두선교,문화선교,자장면선교,차(茶)선교 등 각종 선교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현대 상황에 맞추어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며 사명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한다 해도 꼭 기억하고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삶의 증거이다.
「선교교령」(11항),「현대의 복음 선교」(41항),그리고 「교회의 선교 사명」(42항)에서 선교의 방법 첫자리에 증거의 삶을 놓는다.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교회에서 복음화의 첫째가는 수단은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의 증거입니다.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친교로 하느님께 헌신하고 동시에 무한한 첫째 수단입니다."(41항) 그리고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는 「복음의 첫 형태는 증언입니다」라는 소제목 하에 "오늘날 사람들은 스승보다 증인을,가르침보다는 경험을,이론보다 삶과 행동을 더 신뢰합니다. 선교의 시작이며 다시없는 형태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증거입니다."(42항)라고 그 중요성을 언급한다.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 예비신자를 신앙생활로 인도하거나 쉬는 교우에게 다시 신앙의 활을 불어넣기 위해서 교회는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복음화의 일꾼으로 양성해야 한다.「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이것도 복음화의 한 상황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더욱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그리고 나아가 외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목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복음화 사업을 수행하는 곳은 본당이기에 본당사목이 더욱 활성화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렇게 될 때 복음화의 토대가 견실해 질 것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쉬는 교우에 대한 대책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 우선 쉬는 교우가 되지 않도록 사목적 배려를 하는 것이 예방적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쉬는 교우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이것도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언급하는 복음화의 한 상황이다.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10년에 교황청 기구인 '새복음화 촉진 평의회'를 신설하고,2012년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를 '그리스도 신앙으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라는 주제로 개최하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좋은 글을 집필해 주신 김영근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영근 신부.논산대교동 주임-
<문학 단상>
맞대결
작년 이맘때쯤 대흥동 성당에서는 전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0을 넘기신 신부님과 두살 난 어린 여자이이 사이에 맞대결이 있었다. 그날도 평상시와 별반 다름없는 주일 10시 미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말씀의 전례가 끝나고 영성체 예식이 시작되었다. 신부님께서 성체를 모시고 제단 아래로 내려오시자 성체성가가 시작되고,앞좌석의 교우들부터 중앙통로로 나와 두 줄로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발 한발 나갔다. 영성체 예식이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었을 쯤 어른들의 다리 숲을 헤치며 신부님을 향해 어린 여자아이가 뒤뚱거리며 나갔다. 어른들은 그 모습이 귀여워 길을 터주었다. 신부님 앞에 도착한 아이는 무턱대고 오른손을 내밀고 "응 응"거리며 무엇인가 내놓으라는 시늉을 하였다. 신부님과 어린 아이와의 맞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신부님은 웃음을 띤 얼굴로 성체는 주시지 않고 아이의 머리만을 감싸 주시었다. 그리고 영성체 예식을 진행하셨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는 이번에는 양손을 쭉 내밀고 더욱 큰 소리로 "응 응"대는 것이 여러 말 말고 당장에 내놓으라는 기세다. 순간 신부님의 얼굴에서 당황스런 표정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 상황을 보면서 신부님께서 아이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심정이 복잡하였으리라 여겼다. 신부님이 평범한 할아버지였더라면 호주머니에서 사탕을 선뜻 꺼내어 주었을 것이다. 만약에 빈 호주머니였다면 귀여운 손녀를 번쩍 안고 가게로 달렸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신부님과 아이의 기 싸움이 계속되고 있을 쯤 아이를 놓친 엄마가 성급히 달려 나와 "신부님 죄송합니다."하고 아이를 안고 간다. 이에 신부님은 나중에 꼭,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니는 신부님의 말씀을 알아듣는지 방끗방끗 웃는다. 대개 울면서 보채는 것이 아이들의 심성인데 신기하게도 웃고 있다. 이 흥미로운 맞대결을 바라보고 있던 교우들의 얼굴 모두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그날은 무승부이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멋진 재대결이 벌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그날의 미사는 내 가슴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 같다.
-임소천(방수)마르코.대전 가톨릭 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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