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3주일 2011년 1월 23일(가해)

모든 2 2021. 3. 27. 21:07

 

「우리도 아이들처럼」(2011),백 현 신부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주제로 열린 예신캠프에서 아이들이

'예,주님'이라고 열심히 대답을 합니다.

 

 

  + 마태오 복음 4,12-23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레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바다로 가는 길,요르단 건너편,이민족들의 갈릴레아,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레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레이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을 선포하시며,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말씀의 향기>

 

나를 따라 오너라!  -성병열 야고보.논산부창동 성당

 

  세례자 요한이 닦아놓은 길을 순수히 밟으며 세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광야에 가시어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을 보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는 일련의 과정을 보는 듯합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이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어둠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는 복음의 여정이 이번 주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창한 주제와는 사뭇 다르게 예수님이 공생활에 앞서 맨 처음 밟으신 땅은 '갈릴래아'였습니다. 갈릴래아는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유다인과 이방인이 함께 살던 곳이고, 어떤 지방보다도 외국과 새 사상과 접촉이 잦았기에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한 곳이었습니다. 성전이 있고 율법의 정신이 깊이 살아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저 북쪽의 배척받는 지역을 공생활의 첫무대로 삼으신 예수님을 보면 의아해 보이기도 하지만 만인의 구원을 이끄시는 그분의 깊은 섭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곳이 비록 모든 이에게 통용되는 '성역'은 아니였지만 그 당시 모든 국제 도로가 갈릴래아를 지나고 있으니 복음의 빛이 더욱 힘차게 퍼져나갈 수 있었겠지요.

 

  예수님은 장소뿐만 아니라 사람도 외면적인 것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그 당시의 어부는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던 하위 계층의 서민들로서 하루 벌어서 하루의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풍랑과 무서운 파도에 맞서 자신의 생명도 보장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물을 손에 놓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그러한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통해 외적인 권위나 제도,형식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줍니다.

 

  어부는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기다릴 줄 모르고 조급하게 군다면 고기는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지요. 또한 불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물을 몇 번 쳐서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포기해 버린다면 어부 생활은 할 수 없지요. 무엇보다도 어부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물고기가 많이 올라오면 여러 배들이 협력하여 그물을 올려야 했음으로 동료들을 서로 필요로 했던 이들입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처럼 그야말로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일꾼이였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제자들은 비린내가 나는 천박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성실하고도 겸손한 복음의 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나."

 

  그들은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았던 그물을 버리고,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가족을 남겨두면서 즉시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왜냐하면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믿어주시는 손길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는 것,이것이 바로 복음의 정신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필요한 장소나 사람들은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지요.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복음의 무대이며 주인공입니다 어둠속에서 빛을 내어 주시는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빛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놓았던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아멘.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초창기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①

 

  1784년 한국에서 시작된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과정속에서 탄생하였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교회 서적들을 읽어보고 새로운 신앙에 눈을 뜨게 된 지식층들이,해외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스스로 신앙을 찾아나서 수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초창기 교회는 때로는 엉뚱한,그러나 고민이 담겨 있는 진지한 발상으로 잘못된 행동들을 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요과정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이끄심과 신앙의 신비를 절로 느끼게 한다. 더구나 교회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교우들이 하느님을 가장 큰 효도를 드려야할 아버지로 고백하며 어떠한 강압적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은  실로 놀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상의 문제나 시복시성 절차의 특수성 때문에 초창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지난 번 글을 통해 이야기하였다. 이런 문제제기는 1984년 103위 한국 순교자들의 시성식 이후 끊임없이 세기되었고 2001년에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신유박해(1801년)200주년이었던 그해 10월 18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시성시복 주교 특별위원회'를 구성한 후 제1차 시복시성 대상자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를 선정하였다. 윤지충을 포함한 총 124명의 순교자들이 그 대상자들인데 주로 한국 교회 초창기의 박해,즉 신해박해(지산사건,1791년)와 신유박해(1801년)전후의 순교자들이다.

 

  시복시성의 과정은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재판의 과정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교회 자체적으로 '시복 법정'을 열어 그대상자의 적합성을 놓고 변호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변론을 벌이는 재판 과정을 계속해서 진행해 나간다.이과정은 로마 교황청의 시성성(諡聖省)과 직접적인 관련 속에서 진행되는, 한국교회는 2003년 10월 6일에 '시복 법정을 개정하는 데 장애 없음'공문을 받은 이후 요구되는 절차에 따라 모든 것을 진행하여 2004년 7월 5일에 한국 교회 내에 법정을 개정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동안 아쉬움으로만 남아 있던 초창기 한국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내포교회사 연구소장 김정환 신부-

 

 

 

<문학단상>

 

말씀은 은혜로 다가왔다

 

성경쓰기,지나온 삶이 감사로 여겨져

행복은 어느새 햇살처럼 찾아온다.

 

  오래전 일이다. 먼저 살던 아파트에서 자별하게 지내던 자매를 길에서 만났다. 오남매의 맏이인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성경을 쓰고 계셨단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여일하게 쓰셨다. 별말씀을 안 하니 일에서 손 놓고 하릴없는 노인이 소일거리로 그러시나보다 생각했다. 그리곤 병석에 누운 지 두달 만에 아버지는 가셨다. 유품을 정리하던 남동생이 깜짝 놀랐다. 사남매 각자에게 주는 당부의 말씀과 성경 필사본 네 뭉치가 고스란히 있었다. 들쭉날쭉 크기도 고르지 않은 노트 한 보따리가 누나 몫으로 전해졌다.

 

다섯째에게 줄 것만 미처 마치지 못한 채 반쯤 쓰다 가셨다는 얘기가 더욱 애틋했다. '너희들이 있어 행복했구나. 고맙다."이 말은 가슴이 서늘하리만치 감동스러웠다. 자녀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유산이 무엇이 있겠는가.

 

 며칠 후 나는 성경쓰기 노트를 사왔다. 오랜 소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이루고 싶은 구체적인 마음에서 필사를 시작했다. 집안일도 바깥 일도 해야 하니 시간은 늘 쫓기었다. 틈만 나면 펜을 들었으나 진도는 더디었다. 한두 달이나 일이 년에 끝날 일도 아니어서 꾸준히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쁨은 의외의 곳에서 왔다. 답답하고 어려운 일 누구에게 털어 놓을까.주위를 두리번거렸었은데 해답은 이곳에 있었다. 늘 듣던 말씀이었는데 구절구절이 처음 듣는 소리처럼 신선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그리하여 너에게 한결 같이 자애를 베풀었다."(예레 31,3)"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라는 말씀에 무릎을 쳤다. 동기는 기도로 시작했어도 말씀은 은혜로 왔다.

 

  소중한 이 느낌을 주위사람에게 알렸다. 친구하나와 동생,아버지께서 동참하셨다. 시간이 많이 걸려 완필까지는 인내가 필요한데 몇 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만 쓰고 계시다. 또박또박 써내려간 공책이 제법 여러 권 쌓였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신 것은 음식이나 건강에 관리를 잘 하기 때문이라 생각되지만 조용히 앉아 성경을 쓰시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성경 필사는 아무래도 시간 여유가 많은 어른들이 하기에 훌륭한 기도이며 치매 예방을 위한 정신노동이라 여겨진다. 경제적인 것과 건강만을 삶의 최고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현실에서 남아도는 시간 유용하게 경영하는 것 또한 좋은 노후의 덕목이라 생각된다.

날마다 조금씩 성경쓰기에 열중하다보면 지나온 삶이 감사로 여겨져 행복은 어느새 햇살처럼 찾아온다.

 

  -남상숙 소화데레사.대전 가톨릭 문학회-

 

 

주님

나의 주님

 

모든 것을

주의 뜻대로 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