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2주일 2011년 1월 16일(가해)

모든 2 2021. 3. 27. 19:55

「하느님의 어린양」(2011),황영준 신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  요한 복음 1,29-34

 

<보라,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러 세례를 주라고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말씀의 향기>

 

세례자 요한 처럼 구세주를 선포합시다!   -임종택 미카엘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세례자 요한은 단번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던 율법학자들과 사제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왔으니,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간 세례자 요한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집도 없이 광야에서 거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참으로 어려운 여건에서 살았습니다. 한편 세례자 요한은 그 당시 예수님보다도 더 큰 명성을 누렸지만 그 명성을 예수님께 돌리고 자신은 뒷자리로 물러섭니다. 죽음 또한 비참합니다. 품행이 좋지 않은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의 술수에 말려들어 목이 칼에 잘리고, 그 목은 쟁반에 담겨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구세주로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삶과도 비슷합니다.

 

 단편적으로 볼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의 돌보심과 사랑스런 손길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버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어떻게 돌보아 주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어떤 태도를 보였기에 인간적으로 버림받은 것 같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것일까요? 그것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바보처럼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만 사랑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둔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할 힘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삶처럼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나도 모르게 힘과 용기를 얻고 하느님의 돌보심과 사랑의 손길을 느낍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의탁합시다.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합시다.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또 다른 시복시성의 필요성

 

  현재 한국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복시성에 대해 어떤 이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미 시성되신 103위 한국 순교성인들의 시복시성 과정을 살펴보면 긍정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한국 교회는 1784년 이 땅에 첫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이후 100여 년에 걸친 박해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생겨났다. 이분들 중 삶과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여 신앙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분들을 복자나 성인품에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우리가 공경하는 103위 성인들은 모두 기해박해(1839년),병오박해(1846년),병인박해(1866년)에 관련된 순교자들이고 초창기의 박해들,대표적으로는 신유박해(1801년) 때에 순교한 분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증거 자료의 부족과 시복시성 과정의 특성 때문이다.

 

  누군가를 성인품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자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설립 초장기부터 박해로 인해 성인품에 올릴만한 분들이 계속 생겨났으나 그분들에 대한 자료 수집은 40여 년이 지난 후에 시작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살아남은 신자들은 성직자와 교회를 이끌어갈 만한 지도자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으므로 무엇인가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830년대 후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증언을 들어 비로소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하였는데,순교를 목격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죽은 뒤였고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 다른 시급한 일들이 많아 자료 수집은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제대로 자료 수집이 이루어진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였으므로 시기적으로 보면 나중에 순교한 분들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시복시성이 진행되어 오히려 나중에 순교한 분들이 먼저 대상자가 되어 1925년에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 79위가 시복되었고, 1968년에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되었으며,이분들 모두를 합한 103위가 1984년에 시성되었다.

 

  그런데 시복시성 과정에서는 한 번 시작된 건에 대해서는 중간에 대상자를 더 추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한국 교회 초창기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들이 추가로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시작된 건에 포함하여 진행될 수 없었고 결국 또 다른 시복시성 과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내포교회사 연구소장 김정환 신부-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영세'라는 용어에 대한 생각

 

  「영세」옷깃을 여미고

  정성으로 성체성사를 받는다.

 

  '예수성탄대축일'과 '주님공현대축일','주님세례축일'동안에 모든 성당들에서는 세례성사가 베풀어졌을 것이다. 태안성당에서는 주님공현대축일 교중미사 중에 세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세례식을 보며 다시 한 번 '영세(領洗)'에 관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세례'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 역시 신.구교 공동번역 성서출간 이후 우리 교회에서 '천주님'대신 '하느님'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일치운동'의 소산이기도 할 터이고...,

 

  영세라는 용어는 제게 좀 더 장중한 질감을 주는 듯싶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성체성사를 이를 때도 "영성체한다", "성체 영한다"라는 표현을 많이 했습니다. 단순히 성체를 '받는다'라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영한다"라는 말은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었지요.

 

  영(領)이라는 글자는 '영수증'등으로 쉽게 활용되기도 하지만,'옷깃'이라는 뜻을 지닌 이글자가 '영세'와 '영성체'등의 용어에 쓰일 때는 '옷깃을 여미고 정성으로 받는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일 터였습니다. 그러니까 옛날 선조들이 세례의 의미로 영세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옷깃을 여미고 정성으로 성세성사를 받는다'라는 뜻을 새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어느 모로는 재미있는 면도 있지만,그것은 그만큼 우리 선조들의 철두철미한 신앙심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지금 시대야 한자 하나의 의미와 쓰임새를 따지는 것은 너무 고리타분하여 "어느 시대 사람이냐?"는 소리도 들을 법하지만, 위에 적은 사항들을 머리에 새기며 '영세'라는 명칭을 접하게 되면 자연 장중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어학이나 학문 쪽으로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언어는 관습적인 것을 초월하여(또는 관습이든 아니든)사람에 따라서는 각별한 감흥 작용과 깊은 사유를 안겨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물로 씻는' 것이지만 성령이 결부되는 성사이지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는 성사이니,성사를 '받는다'는 것이 좀 더 적극적인 자세일 것 같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세례성사를 일컬어 '옷깃을 여미고 받든다'는 뜻으로 영세라는 명칭을 성립시켰을 때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서 '성령을 모시게 되는 것'을 더 많이 결부시켰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영세라는 말에서 좀 더 각별한 감흥을 갖게 됩니다.

 

-지요하(소설가.태안성당)-

 

 

 

 

어느 것이 그림자입니까.

 

얼어붙은

눈 사이로

오는 봄.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