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신관동 장기공소
세종특별자치시 정안면 장기초교길 32-6(도계리 44-23)
+ 요한복음 3,14-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빛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강용 임마누엘 전민동 보좌-
우리들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표현할 때 "얼굴에서 빛이 난다.", "밝다."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특별히 얼굴에서 광채가 나와 빛이 나거나 밝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이나 행동,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긍정적인 느낌이 올 때 우리들은 빛이 나거나 밝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도 우리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빛이 나와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자기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함께 밝혀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늘 제1독서의 역대기 하권의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많은 지도 사제와 백성이 주 하느님을 거스르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동이 반복되어 유배를 가게 되는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모든 일련의 과정이 그렇습니다. 주 하느님의 사랑을 그 순간은 받아들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다시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수많은 예언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하느님의 빛, 빛에서 나신 참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둠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들의 세상과 많이 닮아 있는 듯합니다. 저지른 잘못을 숨기고 은폐하기에 바쁘며,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나부터 먼저 출세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보다는 세상의 재물이 우선시되고, 하느님이 중심인 삶 보다는 나 중심의 삶이 될 때, 바로 그것이 어둠에 쌓여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빛처럼 밝은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어두운 사람들입니까? 우리들은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어둠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밝게, 기쁘게, 얼굴에 빛이 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더라도, 한 순간의 자만과 방심이 순식간에 우리들을 어둠으로 빠질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오늘 제 2독서의 에페소서 말씀에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어둠에 빠져 헤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행해야 합니다. 어쩌면 빛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빛의 상태로 계속 되돌려 놓는 우리들의 노력이 더욱 필요할 때입니다. 서로 협력하고, 어려운 이들을 배려하며 이끌어주는 모습, 바로 예수님의 빛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조금씩 나의 행동 안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밝은 빛의 자녀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우리 먹거리 현주소
기사를 찾아보니 올겨울도 조류 인플루엔자로 가금류 2,540만 마리가 예방적 '살처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도 잠잠한 게 코로나 탓만일까? 아니면 이미 일상이 되어서일까? 그렇다면 이 끔찍한 일상을 무심히 여기는 오리는 과연 멀쩡할까? 이제 우리는 가축을 '고기'로 접하지 '동물'로 만나지 않는다. '예방적' 살처분은 대부분 생매장이고, 생매장은 동물보호법 위반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제품의 재료에 생긴 문제의 확산을 원천 봉쇄하는 선제적이고 과감한 처방으로 묵인된다.
빈발하는 아동과 노인 학대, 하루 평균 7명의 노동자가 일하러 나갔다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과 살처분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삶의 전환 없이는 구원도 없다. 성경은 삶의 전환을 '메타노이아(회개)'라 부른다.
육류 소비를 대폭 줄이는 삶의 전환이 없으면 메탄가스 배출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공장식 축산이 설 자리는 없다. 2018년 기준, 가축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는 온실가스 전체 배출량의 15% 정도를 차지한다. 메탄가스의 지구온난화 효과는 이산화탄소의 28배 정도로 강력하다. 유전자 변형 곡물 재배와 함께 공장식 축산은 대규모 탄소 저장고 역할을 하는 아마존 같은 열대 우림 파괴의 주범이다. 기후위기는 대규모 탄소배출에 의존하는 삶과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기술은 이 결별을 원활하게 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통일에 대한 단상(斷想)...
"20세기 들어와서 분단국가가 된 나라는 어디인가?"라고 물으면, 흔히 '베트남, 독일, 한반도'를 떠올린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미 베트남과 독일은 통일을 이루어 한 민족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나라마다 주어진 상황이 달랐고, 통일에 대한 노력 또한 달랐다.
베트남의 경우,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려 했던 프랑스의 야욕에 맞서면서 생긴 제네바 협정(1954-당시 남과 북을 분할하여 2년 뒤 각 지역에서 총선을 거쳐 통일을 이룬다는 내용) 이후 통일을 꿈꾸었지만, 남베트남 측의 미국이 관여하고 있었던 남베트남 안에서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고, 긴 시간 동안의 전쟁으로 미국은 결국 철수를 결정하게 됐다. 이후 사회주의로 변해 버린 북베트남이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독일의 경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승리로 인해 폴란드령과 소련령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소련령이었던 동독이 주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으로 탈출을 시작하게 되는데, 1949년부터 1961년까지 12년 동안 약 273만 명이 동독을 탈출했다. 이에 동독은 탈주민을 막기 위해 담을 쌓기 시작했다. 이 담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다. 하지만 1898년 동유럽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혁과 혁명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영향을 동독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후 동서독 시민들 수천 명은 베를린 장벽에 모이게 되었고, 모인 이들은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1990년 분단 41년 만에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달리 전범국가인 일본이 아닌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됐다. 당시 냉전체제 시대를 비추어 본다면, 미국과 소련은 일본보다는 한반도가 전력적 위치 차원에서 더 입맛(?)에 맞는다고 판단해서였다.
당시의 결정으로 정전 협정된 지 70년이 가까워지는데도 아직 우리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이 '평화'를 지향하는 우리 교회 안에서 활활 타올랐으면 한다. 특별히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선언된 선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통일에 대한 열정을 높여 보고자 한다.
"동서독이 통일될지 안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길고 험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이 지쳐 무너지고 다른 한쪽이 자신만 살려고 할 위험성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용납해서도 안 되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 힘을 모아 단결해 나갈 것이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권지훈 베드로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교회와 나' 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1. 새로운 시대의 태동:공의회 전(前) 역사②-새 시대 탄생은 '변화'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이 두 물음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의 단초가 되었다고 지난 회에 소개했다. 그렇다면 이 물음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던가? 교회가 2000년 가까이 견지해 온 가르침은 이제 이 공의회 이후 폐기 처분된 것인가?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최초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화(325) 이후 교의로 선포한 모든 것을 오늘날까지 어김없이 지켜오고 있다.
그럼 대체 무엇이 새로워졌다는 것인가? 바로 그 교리를 이해하는 관점과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새로운 것이다. '새롭다'는 말에는 이미 '변화'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주역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 종교는 결코 더 나은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외적 요구들을 통해서 혁신되는 것이니.
이제 '신학'이라는 말을 꺼낼 때가 되었다. '신학'이라는 말에 공연히 두려워 마시길 바란다. 신학(Theology)은 하느님(Theos)과 말(Logos)의 합성어이니, 글자 그대로 하면, 하느님에 관한 말이나 담론이다. 그러니 어찌보면 하느님을 믿는 이라면 너무나 당연히 저절로 하게되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그냥 답습하듯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왜 그런지 그것이 내 삶과 어떻게 관련되고, 하느님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물어보고 성찰하며 하느님께로 정진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깨어있는'것과 상관있고, 이리하여 신학은 자연히 '살아있는 신앙'과 연결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과 삶 배우기'를 신학하기의 다른 말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실로 신학은 신앙의 진리를 간파하고 그것을 살기 위해 소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의 초석을 신학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맡게 된 건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공의회 이전 새로운 신학으로의 일대 전환이 일어나게 되니 그것은 이러하다:
첫째, 고전주의적 세계관에서 역사 의식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다. 고전주의적 세계관은 과거의 진리가 미래의 모든 시대와 문화에도 확실하고 불변한다고 인식하는 것이고, 역사 의식적 세계관은 신학적 진리의 표현은 모두 역사적 조건에 제약을 받으며, 그 진리가 표현되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인식한다.
둘째, 신학의 연역적 방법론에서 귀납적 방법론으로의 전환이다. 연역적 방법은 성서의 (완전하신) 하느님에게서 출발하여, 신학이 탐구해야 할 일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고, 귀납적 방법은 모든 강점과 약점을 지닌 인간 조건이라는 현실이 신학을 하는 요인이 되고, 인간조건을 진리의 진정한 원천으로 고려한다.
셋째, 신학을 가르치는 방식의 '호교론(護敎論)적'접근에서 '토대적'접근으로의 전환이다. 호교론적 접근방식은 신앙의 진리들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설명은 소홀히 한 채 그 진리들을 진술하고 옹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토대적 접근 방식은 단순히 신앙의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들이 삶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여 신앙의 토대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교구내 공소 공주신관동성당 장기공소 1916년경 한다리(장기)에 전교가 되어 금흥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6.25한국전쟁중 공소가 폐쇄되었다가 대교리 밤실에 위치한 박명래 회장집에서 15여 명의 교우들이 모여 공소예절을 지냈다. 이후 사설 고아원과 평기리 홧골 박 회장집에서 공소를 지내다가,1960년경 공주본당 방약종 신부의 지원으로 민가를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였다. 신자수 증가로 공소집이 협소해지자 1978년 공소집을 철거하고 현 25평 규모의 시멘트벽돌조 강당을 신축하였다. 전교에 힘입어 신자수는 한때 200여 명에 이르렀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과 운영위원회 조직 등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현재,이 공소에는 50여 명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
코로나19와 나의 신앙생활 이야기 개인수기 부분 최우수작
두 번째 신세계 -오정희 마리아 순성본당
코로나가 준 선물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루는 신부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갑자기 웬 문자인지하고 열어 보니 SNS 밴드의 초대 문자였습니다. 우리 본당은 시골 본당이고 핸드폰이나 컴퓨터에 서투른 어르신들이 많은데 밴드가 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가입자가 126명에 달한답니다. 신부님께서는 코로나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으니 밴드로라도 만나야겠다고 새로운 소통의 창구를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날부터 밴드에는 본당 소식, 교육관 건립현황 등 성당의 크고 작은 소식들이 올라왔고, 밤 9시가 되면 주모경 기도와 강복을 올려 주셨습니다. 어느 날 온 밴드에 공지가 한 올라왔습니다. 본당에서 미사를 못하니 가정 미사를 신청해 달라고... 사회적 거리 두기로 한 가정씩만,많은면 두세 가정 이내로 누구든 신청만 하면 언제든 신부님께서 찾아 가서 미사해 주시겠다는 공지였습니다. 우리 성당은 코로나 때에도 원하면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밴드에 보니,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정미사를 줄 지어 있을 때도 있었답니다. 굶주린 저희 영혼들이 드리는 미사가 얼마나 뜨거웠을지, 얼마나 큰 감격이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 코로나라는 것이 참 요사스럽습니다. 미사를 중단하게 만들더니 오히려 미사를 더 갈망하게 만들고, 신앙을 느슨하게 만드는 듯하더니 신심을 더 키워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갈라놓는 것 같더니 거꾸로 더 모아들이게 만들어 줍니다. 또 공동체를 모래알처럼 흩어지게 만드는 듯하더니 오히려 공동체를 더욱 더 끈끈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왜 십자가가 필요한지, 어째서 고통이 있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어두운 밤이 필요한지를 이 코로나가 깨닫게 해 주닌 참 아이러니합니다. 역시 부족한 우리는 겪어본 후에야 깨닫게 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코로나가 고맙지는 않습니다. 달갑지도 않습니다. 제 신앙을 뜨겁게 만들어 준 것은 결코 코로나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코로나 덕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지요. 악 마저도 선으로 바꿔 주시는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 덕분이지요. 그런 주님을 따른 형제자매님들의 마음을 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코로나 덕분이 아니고 하느님 덕분이고, 형제자매님들 덕분이라고 감히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을 부활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 덕분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 덕분인 것이지요. 그러니 코로나 덕분이 아니라 주님 덕분입니다. 코로나를 함께 이겨 낸 형제자매님들 덕분입니다. 코로나는 우리를 멸망시키려 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들은 그 코로나를 이겨 냈습니다. 오히려 어둔 밤이 더 짙어질수록 반대로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고 빛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고, 함께하는 모든 형제자매님들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하나되어 코로나를 이겨 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날이 추워지고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마음으로 함께하는 데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위기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참고로, 이제는 평화방송 미사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평화방송 미사'도' 합니다. 주일 아침마다 미사를 봉헌하기 위한 분주한 그 일상이, 이제는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임을 느끼며 그렇게 저는 두 번째 신세계를 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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