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성당 세도공소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부흥로 912번길 9
+ 요한복음 2,13-25
<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말씀의 향기>
우리는 주님의 아름답고 귀한 성전입니다 -장태혁 요셉 대전성모병원 원목실 차장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에 모입니다. 성전에 앉아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또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그분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체험합니다. 때론 내 나약함에 가슴을 치며 죄를 뉘우치기도 하고 그분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얻기도 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세상에 많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예절과 방식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고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습니다. 옛날도 지금도 변함없이 성전은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보신 예루살렘 성전은 그런 모습과 달랐나 봅니다. 거룩한 성전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탐욕에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보다 특권층의 이익이 더 우선시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잘 만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성전이지만,오히려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이른바 '장사하는 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채찍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탁자들을 엎어버리면서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온화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고 하지요.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은 늘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시기에,오늘 이 예수님의 다소 과격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고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습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당신의 성전에 대한 깊은 애정,죄와 탐욕에 물들어 있는 성전의 모습에 결코 타협하지 않으시는 단호함,그리고 본연의 아름답고 거룩한 성전으로 돌아가길 바라시는 간절함..자신의 자녀를 너무나 아끼는 부모와 같은 이 예수님의 마음이,회개와 정화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작은 성전입니다. 이 사순 시기,주님께서 바라시는 본연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시간 보내시길 희망합니다.
생태순교자 월터 멘데스 바라오스
2021.2.24.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사순묵상
-성찰 질문-
우리보다 앞서 많은 사람들이 창조물을 온전하게 돌보기 위한 사명에 헌신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유산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그는 마야문명으로 알려진 과테말라인으로 천연자원의 보호,인권운동을 하다. 36살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자택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오염이 요한묵시록 11장 18절을 의역하는 '자기 우상숭배'(인간에 대한 숭배)의 한 형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을 파괴하면 피조물도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이것을 절대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지구의 권리를 보장하라!
인권을 넘어서 지구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권을 지킬 수 있다.
지구상의 여러 나라에서 '자연의 권리'를 찾아주려는 소송의 사례들이 있는데,남아메리카의 에콰도르는 2008년에 헌법개정을 통해 세계 최초로 헌법전(典)에 자연의 권리 조항을 두게 된 나라다. 실제로 강의 권리에 대해 주장해서 망가진 강의 흐름과 생태를 복원하도록 명을 받은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개발행위에 대한 소송에서 자연의 권리를 고려할 것을 주문받고 있다. 에콰도르는 생태 선진국이다.
나도 농어법인의 이름으로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하고 있는데, 사람이 모인 어떤 단체에 법인격을 부여해서 활동하도록 하는 것처럼 많은 나라들에서 자연물에 대해서도 법적 실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2017년에 인도 우타라칸드주(州) 고등법원은 갠지스강과 야무나강의 법적 권리를 인정했다. 법원은 지류를 포함해서 이 두 강이 법인(legal person)의 지위를 갖는 살아 있는 실체임을 선언했다. 이외에도 콜롬비아,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유사한 '자연의 권리'가 인정되고 있는 경우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미 대전환이 시작되었다.
뉴질랜드의 황거누이강은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신성시하는 290킬로미터를 흐르는 수로인데,황거누이강은 불가분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뉴질랜드 중앙의 산들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 정신적 요소들을 포용하고 있다고 마오리 공동체는 믿고 있다. 1873년 이래로 마오리족은 이 강과의 특별한 관계를 인정받고자 정부를 상대로 150년 간의 긴 싸움을 해 오다가 2017년에 황거누이강의 법인격을 인정받기에 이르른다. 이제 이 황거누이강은 법에 따라 권리와 의무,책임 등 인간이 가진 것과 같은 법 지위를 갖게 되었고, 마오리족 공동체가 임명한 대표자 1명과 정부가 임명한 대리자 1명으로 구성된 보호자가 강의 건강과 안녕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헌법 개정을 통해 '자연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헌법전(典)에 넣어야 한다.
-강승수 요셉 신부 대전가톨릭 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
'교회와 나' 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1. 새로운 시대의 태동 : 공의회 전(前)역사①-나와 상관있는 이야기
말간 가을 아침 영롱한 이슬 속에 핀 노오란 국화를 보기 위해선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하고 간밤에 무서리도 내려야 한다. 눈부신 봄날 고운 노래 부르며 하늘 높이 나는 종달새는 먼저 알을 까고 나와야 그 봄빛을 만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천지창조 이전에도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어야 한다(창세1,2참조). 모든 새로운 시작은 거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안에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사람이 다 예측할 수 없고 도저히 파악 할 수도 없는 신비가 들어 있다. 고통과 인내와 신비,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시작은 이미 하도 장엄하여,우리는 마음의 옷깃을 여며야 하리라. 이 새 시작의 매력은 단 한 번으로 끝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새 희망이 있다. 우리가 이제부터 함께 나눌 이야기는 바로 그 고통과 인내와 신비 속에 계속되는 새로운 시작 이야기이며,그 새 시작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나의 이야기이며,또 나와 너,우리(교회)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시대의 태동은 무엇보다 나와 상관있고,내가 믿는 하느님과 상관있다.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에도 어김없이 명암의 면면이 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명암의 면면을 거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이루어내는 건 그 역사 순간순간 하느님 손길이 함께하신 때문 아닐까? 여기에서 전체 교회사를 다 살펴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 시대 태동의 전조는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대, 제2차 바타칸 공의회(1962-1965)는 어떻게 교회의 2000년 큰 물줄기를 바꿔 놓게 되었나?
우선, 교회의 가르침은 고래로 '이 세상과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었고,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는데,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어 당신 외아들을 보내셔서 그를 믿는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함'(요한 1,14;3,16참조)이라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단박에 이해될 수 있는 간단명료한 가르침은 아니다. 인류사와 교회사를 통해 늘 도전받았고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는 시대별로 맞닥뜨린 오류들을 단죄하면서 그 가르침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 세계는 교회가 제시하는 일련의 답들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일련의 새로운 의문들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 이 의문의 발단은 1859년 「종의 기원」을 통해,인간이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원숭이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다윈(C.Darwin)의 주장이었다. 이처럼 성경의 묘사와 교회의 정통적 가르침과 다른 자연과학적 주장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아주 중대한 현대적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이에 대한 교회의 답은 인간의 기원은 하느님 안에 있고,인간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람들은 이 가르침에 도전했고, 하느님과 종교 없이 살겠다는 세속주의가 20세기 현대사회의 한 사조가 되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현대적 물음이 제기된다:'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있는가?'결국 이 두 물음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의 단초가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교회란 무엇인가?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교구 내 공소 강경성당 세도공소 1956년 당시 강경본당 주임인 목세영 율리오 신부는 세도 지방의 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망개 부락에 살고 있던 최 가밀라 집에서 처음으로 공소를 본 이후 1년이 지나는 사이 신자 수는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58년 말 현 위치의 대지를 매입하고 본당 부속건물을 철거하면서 얻어진 목재로 28평 규모의 강당을 건립했다. 이때 신자 수는 약 100명으로 급증했다. 점점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강당이 협소하고 낡아 1984년 10월에 새 공소 건물을 착공하여 1985년 3월 31일 경갑룡 요셉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현재,이 공소에는 60명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
코로나19와 나의 신앙생활 이야기 개인수기 부문 최우수작
두 번째 신세계 - 오정희 마리아 순성본당
집에서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니..평화방송은 저에게 신세계였습니다. 최대한 늑장 부리다 눈꼽만 떼고 추리닝 입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됐습니다. 게다가 주교님들과 유명한 신부님들께서 봉헌하시는 평화방송 미사는 늘 익숙한 본당미사보다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심지어 성당에 나가 봉사하지 않아도 되고, 미운 얼굴 보지 않아도 되고..그뿐인가요? 집에서 평화방송 미사를 봉헌하면 대송이 될 수 있다니요. 부득이한 상황에 간절한 열망만 있으면 신령성체를 할 수 있다니,코로나로 인해 직장도 안 나가게 된 저에게는 신세계가 열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다시 미사가 시작되면 어쩌지? 이렇게 평화방송으로 미사 하는 것도 나쁘지 않는데.. "얼마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놀랍게도 평화방송 미사에 몸이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평화방송에 빠져 있을 즈음,성당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봉투를 열어본 순간 저는 깜짝 놀라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습니다. 분홍색 한지로 된 이쁜 편지지에는 주임 신부님께서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쓰신 손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서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참 많이 보고 싶습니다. '라는 신부님의 인사말부터 마음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은 '양떼 없는 목자'가 되었다며 저희들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저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별 볼 일 없는 신부님 자신께 사제의 존재 이유였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200여 년 전 한 대의 미사를 몰말라 했을 신앙 선조들을 기억하자고, 그렇게 목마름을 견디며 영적인 단식의 시기를 보내자고, 편지에 신부님의 마음을 담아 집집마다 보내주셨습니다.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성당에 가고 싶어졌는지요. 다시 한 대의 미사가,예수님의 성체가 배고파졌습니다. 성당에 도착해 조심히 성당문을 빼꼼 열어보니 신부님은 제대 위에서 미사 준비를 하고 계시더군요.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가라 하면 어쩌나...'눈을 피해 유아실에거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유아실에는 벌써 주인이 있었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자매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성당에는 대여섯 명의 교우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그 누구도 돌려 보내지 않으시고 우리는 함께 미사를 드렸습니다. 얼마 만에 맛본 주님의 몸인지요! 성체가 어찌 그리 달콤하고 감사하던지 제 안에 영적인 갈망이 다시 불타오름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예전에도,코로나 이전에도 저는 신앙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사가 너무 흔해서,언제든 영성체를 할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는 영적인 갈증이 해갈되지 않는다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많이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영하면서도 더 큰,더 감동적이고 더 자극적인 그런 신심을 원했던 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이 한 번의 간절한 영성체는 저의 모든 영적 목마름을 해갈해 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그렇게 회개의 미사이며 감동적인 미사를 마치고 함께했던 자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서로 성경읽기를 해 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우리는 카톡방을 만들어 성경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행복한 마음으로 도둑(?)미사를 참례하고, 성경을 낭독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코로나는 제게 새로운 신앙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지요.
그런데 그 행복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었던 분들이 하나둘씩 늘어나 성전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사제관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시겠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으나 저를 비롯한 우리 성경읽기그룹은 예전의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사제관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시는 11시에 성전에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네 명의 여인이 함께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얼마나 울었는지요. 매일이 울음바다요. 매일이 회개의 순간이었으며, 매일이 천국이었습니다.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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