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리성지성당
조선시대에 순교한
32위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곳
공세리성지 성당은 1886년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한국천주교회가 내포교회의 재건을 위해 1890년 예산 간앙골에 본당이 설립되었고, 1895년 파리 외방선교회의 드비즈 신부에 의해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현재의 자리는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서산,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문의,옥천,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 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창고가 있던 곳이다. 고종 때 이곳이 폐지되면서,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1897년 그 자리에 공세리본당 구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를 성지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바로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으로 순교한 32위 순교자들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 사바스(1808-1867),박원서 마르코(1817-1867), 세례명이 알려지지 않은 박익서(1823-1867)3형제가 있다.박익서 3형제는 1866년 서울에서 순교한 박흥갑의 아들들이다. 박의서 집안은 선대에 이미 아산만 방조제 축조와 간척 사업을 주도해 사회에 도움을 준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박의서 집안에서 처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이는 조부인 박종학(1751-1836)이었다. 그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다. 장성한 박의서는 걸매 교우촌 회장으로 임명돼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버지 박흥갑과 교우촌 신자들이 체포되자 박의서는 가족들을 데리고 여사울로 피신해 살았다. 그러나 이듬해 수원 포교가 여사울을 덮쳐 박의서 형제들과 친척들을 체포했다. 이때 둘째 박원서 마르코는 '내가 평소에 진실되게 천주를 공경하지 못했는데,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이번에 끌려가 죽게 된다면 우리 주님과 성모님께로 가서 살겠다."며 순교할 결의를 형제들에게 보였다. 그러자 큰형인 박의서 사바스가 "우리 3형제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하자."고 격려하였다. 이들 3형제는 1867년 음력 3월에 순교하였다. 순교한 박의서 3형제의 시신은 당질인 박웅진 바오로 등이 거두어 아산 맹고개(현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에 안장했고,1988년 9월 20일 유해를 발굴해 공세리성당에 안치했다.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성당과 구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10월 새 사제관,수년원,예수마음 피정의 집,성체조배실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했고 주변 정비사업을 마무리하였다. 2007년 8월,3형제 순교자 묘가 있던 곳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28위 순교자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하였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셨다. 2008년 9월에는 구 사제관을 보수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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