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부여 지석리 성지(2)

모든 2 2020. 11. 1. 17:20

 

 

부여 지석리 성지(2)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는 1820년 아버지 손달원 이냐시오와 어머니 임 세실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세하여 아버지 밑에서 직접 교리교육을 받으며 신심을 키워나갔다. 1837년,불과 18세의 나이로 샤스탕 정(Chastan,鄭)신부로부터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김 루시아와 결혼하였고,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충남 진잠 장안리로 피신해 살던 중 장남 손순화 요한을 낳았다. 그 후 전라도로 이주하여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여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슬하에 두 자녀7를 두었던 그는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쓰며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인 신자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1866년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하다가 얼마 후 더욱 혹독한 박해로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그는 신자들을 보고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거두시려는 모양이군요.'하며 자기는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무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1866년 12월 5일(음력 10월 29일)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붙잡혀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심문을 받던 중 회장임이 탄로 나,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분와 교회 서적의 출처를 알아내려는 관헌들로부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오사현이 그를 찾아와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말만 하면 포교와 의논하여 빼내 주겠다."라고 했으나,그는 '나는 이미 죽기로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소. 당신의 그런 유혹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일이오."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처절한 고문 중에도 그는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등 회장의 직무를 다하였다.

 

  그가 처형장으로 나설 때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신의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했는데,희광이가 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고,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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