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사순 제4주일 2020년 3월 22일(가해)

모든 2 2020. 6. 8. 19:23

미켈란젤로「최후의 심판 중 살가죽을 들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부분),1537~41,바티칸,시스티나 경당

 

 

  +  요한 복음 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이,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니가?"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하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하여,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도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하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하고 그들이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요?"하며,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선생님,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저는 믿습니다."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말씀의 향기>

 

  다른 것으로 채워져선 안 되는 자리   - 양동혁 가브리엘 홍북 주임 -

 

  이불킥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몸 둘 바를 모르게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저도 간혹 그럴 때가 있습니다. 잘못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숨막히게 부끄러울 때가 있죠.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보다 더욱 저를 괴롭히는 것은 아직도 제가 그런 실수를 반복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약함을 고친다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고쳐 보려 해도 잘 안 되는 경우가 많고, 혹여 어느 정도 고쳤다 싶으면 슬그머니 살의 한 켠에 다시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감추고 싶은 우리의  나약함을 우리 안에 남겨두신 걸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점점 더 '볼 수 있게 되는 사람'과 점점 더 '볼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흑과 백처럼 맞물려 펼쳐집니다. 이를 통해 한 사람의 성장하는 신앙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죠, 태어나면서부터 볼수 없던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점점 더 빛을 향해 나아가게 되지만,이미 볼 수 있던 바리사이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점점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선택한 그 미움과 폭력의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빛이신 예수님을 선택한 그 사람의 믿음은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는 그의 신앙 고백에서 최고조에 다다르게 되죠.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을 뜬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자리가 그의 '보이지 않는 눈', 즉 그의 나약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셨으니 사람의 나약함과 부족함은 그 자체로 죄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가 볼 수 없던 이유를 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 말씀해 주시죠. 오히려 진짜 문제는 그 부족함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잘못된 방법으로 채우려고 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눈을 뜬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 눈을 예수님께 더러내며 주님을 만나기 시작하지만,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예수님이 아닌 미움과 폭력,혹은 정당성이라는 다른 무엇으로 채워가면서 점점 더 깊은 어둠에 빠져 들게 되죠.

 

  1독서에서도 볼 수 있듯 사람이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기는 중에도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사람 안에 당신의 뜻을 귀하게 담아 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내 나약함이 드러날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남들의 나약함 앞에서 우월감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면 오늘 우리도 주님을 뵈옵는 큰 기쁨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마련해 주신 소중한 만남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생육성(생명을 전달하는 기쁨)의 순간들,

① 생명을 열망한다

 

  사랑의 열망(욕구),그리고 생명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베네딕토16세 교황님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회칙에서 '에로스와 아가페에 관한 항목'(3-7항 참조) 을 할애하셨다. 특별히 열망의 문제는 그 답변에 따라 다양한 결과들과 함께 현대 인간학의 주요 문제 가운데 하나인,'욕구'에 관한 이야기다.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모든 것으로,그리고 어떤 것으로도 향할 수 있으며,특히 자아의 무한한 환상 속에서 집착할 수 있는 열망(욕구)의 다양한 형태와 대립적인 측면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열망의 광대함'도 알고 있었다.

 

  이 '열망의 광대함'은 자신의 기원을 되새기게 한다. 인간의 열망('우리가 사랑하는 것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은 절대 안에서만 사라지며,시편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참고로,저서'고백록')와 같은 영성가들도 이 열망의 경이로움을 노래하였다. 또한 그 정점에 도달하는 열망은 모든 것을 향하는 열망도,아무것이나 향나는 열망도 아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사물이나 관념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망은 늘 누군가(대상)를 가리킨다. 배우자,자녀,애인,친구,직장 동료,이웃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일상의 무질서 속에서 우리가 의미의 여정들을 구축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의미 자체인 하느님은 인격적일 수 밖에 없는 분,곧 우리가 '당신'이라 부르는 누군가이시며,결정적으로 항상 하나의 얼굴(인격)을 다시 입는다.

 

  이처럼 하느님에 대한 열망은 타인을 절대적 존경의 대상으로 부르면서도,타인에 대한 욕구를 정화시키고,우리가 누구인지를,곧 우리가 모두 운명의 주체임을 더욱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타인을 조금 더 사랑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우리는 타인을,그리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완성에 이르지 못해,열망(욕구)의 갈증을 느낀다. 그래서 보다 고상하고 더욱 충만한 삶에 관심을 갖도록 이끈다.

  이 삶은 유한과 시간의 우연성을 수용하면서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삶이다. 바로 이 사랑의 열망과 그로 인한 출산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오로지 그 원천이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열망이 하느님을 향한 열망과 일치하기까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가능케 하고,우리의 열망이 때로는 그 특수성 안에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하느님의 열망처럼 최고선에 대한 열망이 되게 한다(욕구의 정화,회개).

 

  결국 우리의 인간적인 열망이 취하는 방향(행복,성공,물질,성 등의 욕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해서 그 열망 안에 '열망보다 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열망은 우리보다 더 먼 곳으로부터 오며,우리보다 더 먼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열망(욕구)은 번식을 위한 '본성적(자연적) 책략이나 방법'이 아니다. 열망은 얼굴로부터,미소와 말,행동으로부터,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는다. 열망은 영을 통해서 육을 비추며,아가페를 통해서 에로스를 비추고,전인적인 출산에 유지된 약속을 통해서 몰아(沒我)적인 사랑과 덧없는 것이 되어 버릴 위험의 순간을 비춘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눈먼 이의 간절한 믿음으로

눈 뜨게 하시고

맑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어

우리가 스스로의

존엄성을

돌아보게 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