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오 대성당,1차 건축(1229~1263), 이탈리아,파도바
+ 마태오 복음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하나는 모세께,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구름 속에서,"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일어나라,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하고 명령하셨다.
<말씀의 향기>
예수님 외에는 -이경훈 라이문도 기지시 주임-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
오늘 복음에서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하는 대목에서 떠오른 구약성경의 말씀입니다.
맨 눈으로는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든 태양과 그 빛을 많은 사람들이 경외하며 하느님처럼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피조물임을 창세기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우상숭배의 죄를 뉘우치는 이스라엘의 뼈아픈 고백이면서도,신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온 세상을 창조한,그 위대한 하느님이 우리 하느님이시다!"하고 이스라엘은 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외침, "주님,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했던 그 말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위대한 하느님,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해 내신 위대한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베드로의 눈앞에는 지금,태양을 당신의 얼굴빛으로 삼으시고 빛을 망토처럼 두르실 수 있는 분이 서 계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도자와 예언자로 기억되는 모세와 엘리야가 그 옆에 서 있습니다. 이 경이로운 광경 앞에서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들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며,이 시간을 꼭 붙들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여기에 멈춰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여정이 끝난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보게 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복음은 이렇게 전해 줍니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완성되어 갑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시작되었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탈출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예수님은 왜?
굳이 빛의 망토를 내려놓으시고,태양 같은 얼굴빛을 거두셔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한 새로운 창조,새로운 탈출을 위해 반드시 짊어져야만 했던 그 '십자가'를 지는데,당장에 그것들은 너무나도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었겠지요.
십자가 아래에서,병사들이 서로 나눠 갖게 될 예수님의 옷가지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과연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부활을 잘 맞이합시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먼저 만나서 같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웃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에 주소,직계가족,배우자,직장 등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제2조 제1호)을 말합니다.(시사경제용어사전,2017.11.,기획재정부)
그 동안 '북한이탈주민'을 가리키는 용어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뀌어 왔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심각한 경제난으로 북한을 이탈하여 남한으로 들어오는 난민이 늘어나자 '탈북자'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탈북자'라는 명칭은 1997년「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제정과 함께 국민의 의견수렴을 거쳐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 2005년 대한민국 통일부는 '탈북자'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취지에서 한국 거주 탈북자를 '새터민'(새로운 터전에 정착한 주민)으로 바꾼다고 발표했지만,탈북단체들이 용어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등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2008년 통일부는 '새터민'이라는 말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북한이탈주민'이 탈북자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북한이탈주민'이라는 명칭은 부르기도 어렵고,'이탈'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 때문에 개선의 필요성이 있어 보입니다. 실제로 2017년 서울시에서는 '북한이탈주민'의 새로운 이름을 찾는다고 공모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도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을 탈출해 북한 이외 지역에 체류하고 있는 북한 주민'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이나 외국에서 국적을 얻었다면 더 이상 '북한이탈주민'이 아닌 해당 국가의 '국민'이 됩니다.
국내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은 3만3천여 명입니다. 이들은 지금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지금,우리는 그들을 어떠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들은 평화와 통일이 오기 전에 먼저 만나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웃입니다. 차별과 편견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때,평화와 통일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됩니다.
-남광근 프란치스코 드 살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주님!
나무에 상처가 나면
옆에 새 움을 틔워 주시듯
이 고난의 아픔이
새 희망이 되게 하시어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치유하고 사랑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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